# 159
뜻밖의 준비 (2)
“이더웨더가의 모든 가신들에게 소집령을 내려라.”
저택으로 돌아온 알프레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집안의 가신들을 모두 소집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외투를 신경질적으로 벗어 던진 알프레드는 집무실 책상 위에 있는 술병들을 거칠게 쓸어 던졌다.
채 비우지 못한 술병과 유리잔들이 바닥에 술을 흩뿌리며 깨졌지만 알프레드의 눈에는 이미 아이젠과 작성한 결투 협의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건방진 놈 같으니! 고작해야 만년 백작이었던 놈이 감히 내 앞에서 유세를 떨어?’
아이젠을 만나고 다시 저택에 돌아오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화가 가라앉고 이성을 되찾을 법도 한데 알프레드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 결투는 반드시 압도적으로 짓눌러야만 한다!’
자신감은 있었다.
자신은 뛰어난 천재 정령사이고 제국 정령대의 총사령관직을 맡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한낱 검이나 휘두르는 칼잡이에게 지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젠 또한 굉장한 무력을 가진 기사였다.
그는 중앙귀족 시절에도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맡은 임무를 시원스레 처리해 오던 전형적인 무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프레드는 이번 결투에서 최대한 압도적인 힘으로 그를 짓밟고 싶었다.
무장을 힘으로 눌러 버리는 것만큼이나 무장의 자존심을 찢어발기기에 좋은 건 없었으니까.
‘더 큰 힘이 필요해……!’
알프레드는 이번 결투 종목으로 ‘영지전’을 택했다.
영지전 만큼 상대 가문에게 확실한 피해를 주고 명예를 짓밟기에 좋은 종목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영지전을 치르게 될 경우, 가주가 직접 전투에 참여해야 했으므로 여건만 받쳐 준다면 충분히 아이젠의 목을 칠 수 있는 명분 또한 생길 것이다.
하지만 아이젠 또한 최상급 소드 마스터에 해당했다. 그리고 자신은 최상급 정령사의 자리에 위치에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직접 맞붙는다면 사실 승리는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었으나 ‘압도적인 승리’는 장담키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알프레드는 현재 가진 힘보다 더 큰 힘을 필요로 했다.
제아무리 최상급 소드 마스터라 할지라도 감히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그런 힘을 말이다.
‘결국 그것뿐인가.’
알프레드 이더웨더.
그는 대지의 최상급 정령과 바람의 최상급 정령을 부리는 속칭 ‘더블’에 속하는 천재였다.
하지만 제아무리 정령사들의 천재이자 귀감으로 불리던 그였지만 끝끝내 최고 등급의 정령인 ‘정령왕’과는 계약하지 못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친화력이 부족한 것일까?
아니면 이것이 자신이 가진 재능의 한계인 것일까?
족보를 살펴보면 선조들 중에는 정령왕과 계약에 성공한 이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알프레드는 자신의 재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의 정령술은 위대한 이더웨더가의 핏줄을 통해 전승되어 온 ‘가문의 비전’이었으니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알프레드는 최상급 정령 둘과의 계약은 끝마칠 수 있었으나, 끝끝내 정령왕과의 계약을 이뤄 낼 수가 없었다.
‘오베르…….’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오베르가 가지고 있는 ‘진화의 알’을 손에 넣는 것.
진화의 알은 계약한 정령의 등급을 한 단계 올려 주는 신비로운 보물로 정령사들에겐 억만금만큼이나 소중한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알프레드는 아직까지도 비통해했다. 하필이면 왜 오베르의 손에 그런 보물이 들어갔는지 말이다.
그 알만 있으면 현재 계약된 최상급 정령을 ‘새로운 정령왕’으로 진화시키는 건 꿈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래서 알프레드는 그동안 오베르를 상대로 어떻게든 진화의 알을 손에 넣기 위해 숱한 거래를 제안해 왔다.
하지만 오베르는 전략가였다.
자신과 같은 위치를 가진 알프레드가 진화의 알에 목매는 걸 확인한 그는 진화의 알을 비장의 카드로 쓰기 위하여 끝끝내 거래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오베르는 작위를 박탈당하고 반역자의 신분으로 가문 전체가 혹한의 땅, 살게라로 추방당하고 말았다.
‘이해할 수가 없군, 진화의 알을 미끼로 나한테 도움을 청했다면 어떻게든 도와주었을 텐데 말이야.’
물론 상황이 급박했던 면도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오베르라면 살게라로 추방된 이후, 충분히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해 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베르를 만나 봐야겠어.’
가신들의 소집령을 내렸으니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서 모두가 모일 것이다.
그러면 그들에게 곧 벌어질 영지전의 준비를 맡긴 뒤, 그동안 자신은 황제와 아서스를 만나 영지전에 대해 보고하고 살게라에 있을 오베르와 진화의 알을 거래하면 될 일이었다.
생각을 마친 알프레드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집사에게 소리쳤다.
“지금 당장 황궁에 다녀오겠다.”
생각을 마친 알프레드는 즉시 황궁으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 * *
황제와의 독대.
올해에만 벌써 두 번째 긴급 독대였다.
그러나 황제는 이번에도 역시 알프레드의 독대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삼대가문의 특권이었으니까.
이에 알프레드 앞에 앉은 황제는 아이젠이 가져다준 핑크 스왐프의 연기를 내뿜으며 알프레드에게 되물었다.
“후우우…… 방금 뭐라고 했지?”
“아이젠 후작과 명예로운 결투를 벌이고 싶습니다.”
“왜 하필 아이젠이지? 혹시 이것 때문인가?”
연기를 내뿜은 황제는 알프레드 눈앞에 핑크 스왐프를 흔들어 보였다.
으득!
화가 났다.
기껏 감사를 부탁했더니 이제는 핑크 스왐프가 없으면 못 사는 몸이 되어 버렸다.
이에 알프레드는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화병이 치솟았지만 극한의 인내심으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무려 제국에 하나뿐인 ‘황제’였으니까.
“……그렇습니다.”
“흐음, 알프레드 후작.”
그 이유가 핑크 스왐프 때문이라고 대답하자 황제는 다시금 궐련을 깊이 빨아들였다.
“후우우…… 굳이 그래야겠나? 내가 한 번 피워 보니까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닌 것 같던데?”
“폐하, 그 궐련으로 인해 벌써 제 아들 둘이 반푼이가 되었습니다. 폐하께 핑크 스왐프를 금지시켜 달라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비 된 마음으로서 이 분한 마음을 풀 수 있는 기회만 주십시오.”
“으음…… 듣고 보니 그대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군. 근데 나는 여전히 이해를 못 하겠어. 겨우 이 궐련 몇 개비로 어떻게 사람이 반푼이가 됐다는 건지…….”
아들 둘을 거의 잃다시피 한 아비에게 저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모욕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황제였고 알프레드는 후작이었다.
이에 황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뭐, 그대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허락하지 않는 것도 그대에 대한 모욕이겠지. 알겠네, 내 두 사람의 명예로운 결투를 허락토록 하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렇게 알프레드는 숱한 치욕과 함께 황제에게 결투 허락을 받을 수가 있었다.
* * *
“공작님을 뵈러 왔다.”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알프레드는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디아의 힘을 빌려 마차를 초고속으로 몰아 아서스의 저택으로 향했다.
공작과의 독대는 쉬웠다.
공적인 황제와는 달리 알프레드와 아서스는 사적으로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황제보다 더 엄한 예를 차리는 알프레드. 그것은 아서스가 제국의 진정한 실세라는 것을 증명하는 바였다.
이에 아서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죠?”
간만에 본 아서스의 분위기는 묘하게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물씬 풍겼다.
하지만 현재 알프레드에게 있어 그런 것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알프레드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유일한 상관인 아서스에게 아이젠과의 결투 소식을 알리는 것이었으니까.
이에 여유를 되찾은 알프레드가 물었다.
“공작님, 공작님께선 괜찮으십니까?”
“무엇을 말이죠?”
“혹시 테리온이나 오스카 백작이 공작님에게 핑크 스왐프라는 궐련을 선물하지 않았습니까?”
“핑크 스왐프라면…… 아, 그 샤하트라제 궐련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저는 궐련을 피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내가 직접 고른 게 아니면 음식조차 입에 대지 않고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그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괜찮아요. 그나저나 무슨 일 때문에 시종을 보내지 않고 직접 찾아왔나요?”
“저, 그게…… 다름이 아니오라 아이젠과 결투를 벌일 생각입니다.”
멈칫.
아이젠과의 결투라는 말에 차를 마시던 아서스의 손이 잠시 굳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은 뒤 알프레드에게 되물었다.
“무슨 연유로요?”
“좀 전에 말씀드렸던 핑크 스왐프라는 궐련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그 궐련에 다량의 마약이 함유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제 아들 두 놈은 이미 병신이 되었고 중앙귀족회의 회원들뿐만이 아니라 황제 폐하까지 그것에 중독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요?”
오스카는 아서스에게도 핑크 스왐프를 선물로 보냈다.
하지만 아서스는 궐련을 피우지 않기 때문에 선물로 들어오는 궐련의 대다수를 아랫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화를 피할 수가 있었다.
“결투 종목은요?”
“영지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지전이라면…… 당연히 목표는 아이젠의 목이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아이젠 놈을 설득하느라 저의 보물과도 같은 황금 삼대지를 이번 결투에서 걸었습니다.”
“황금 삼대지를요?”
황금 삼대지를 걸었을 정도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패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아서스가 잠깐 동안 고민하더니 장고 끝에 알프레드에게 말했다.
“마침 잘됐군요. 황제까지 그런 마약에 중독되었다니, 더는 미룰 필요가 없겠어요.”
“미루다니요? 공작님 설마……?”
“마침 시기도 적당하고 드디어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알프레드, 아이젠과의 영지전을 기점으로 ‘그 계획’을 실행토록 하겠습니다.”
“……!”
그 계획.
오직 아서스와 알프레드, 그리고 추방당한 오베르만이 알고 있는 그 계획.
그 계획은 다름 아닌 새로운 황좌의 주인을 가리기 위한 ‘반란’을 뜻하는 말이었다.
* * *
사방이 새카만 어둠에 잠식되었다.
그리고 그 암흑의 공간 속에는 헨리와 비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환술은 생각보다 훨씬 더 편리한 힘이었다.
환술은 환술사가 가진 기억을 바탕으로 상대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들을 재구성하여, 상대의 정신을 현혹시키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힘은 교육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는데 샤하트라 사막의 70년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비람은 환술을 일종의 영상 교보재로 활용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도움이 될 만한 건 없는데……’
헨리는 지루했다.
비람이 아무리 지체 높은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그 또한 칠순이 넘는 노인네였다.
그렇다 보니 환술에 대한 핵심적인 이야기만을 거론하기보다는, 자국에 대한 위대함과 애국심을 바탕으로 수업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지루한 역사 수업이 끝날 때쯤이 되어서야 헨리는 다시 눈빛을 반짝일 수가 있었다.
“……여기까지가 샤하트라 사막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럼 이제부턴 칸 일족이 네 개의 부족을 통일하고 샤하트라 왕조를 건립한 것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망할.’
아무래도 환술에 대한 가르침은 멀고도 험한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