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뜻밖의 준비 (1)
“알프레드가 왔다고?”
아이젠은 베디칸의 보고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알프레드가 자신을 찾아오다니?
삼대가문으로 권력이 분립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에 아이젠이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학학! 내가 후작이 되니 확실히 이런 날도 오는구나! 가서 정중히 모셔라, 손님으로 왔으면 응당 대접해 줘야지!”
아이젠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뭐가 어쨌든 간에 아쉬운 놈이 먼저 우물을 파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평생이 지나도 절대 자신을 찾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 자신을 찾아오자 묘한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대접은 당연히 응접실에서 이루어졌다.
그동안 아이젠은 후작으로 승작한 이후 재력과 명예를 과시하기 위해 수많은 돈을 들여 응접실을 더욱 화려하게 꾸몄다.
그러나 화려한 응접실과는 달리 알프레드의 낯빛은 거무죽죽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아이젠은 알프레드의 낯빛이 어둡든 말든 한껏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맞이했다.
“그학학학학! 이거, 이거…… 알프레드 네놈이 무슨 바람이 불어 나를 다 찾았을까?”
비웃음이 가득한 인사말이었다.
이에 알프레드는 여전히 아이젠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아이젠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젠.”
“왜 그러지?”
“네놈에게 결투를 신청하러 왔다.”
“……뭐?”
결투.
그 선명한 두 글자가 아이젠의 귓전에 새겨졌다.
이에 아이젠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어 귀를 한 번 후빈 후 다시금 질문했다.
“내가 방금 뭘 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말해 봐, 방금 뭐라고 지껄인 거지?”
“결투를 벌이자고 했다. 그것이 기사전이든 영지전이든 무엇이든지 상관없다. 아이젠, 네놈에게 최소한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순순히 나의 결투 신청을 받아들여라.”
“양심이라고? 그학학학학!”
알프레드는 매우 진지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화병이 나 죽어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젠은 코웃음을 쳤다.
굳이 지금 상황에서 자신은 쓸데없이 피를 흘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싫다면?”
“이젠 기사로서의 자존심도 뭣도 버린 것이더냐?”
“그러는 너희 정령사란 놈들은 필요할 때만 기사도를 운운하고, 정작 네놈들이 나서야 할 땐 기사가 아니라며 의무에서 쏙 빠지는 놈들이 아니더냐?”
조롱에는 조롱으로 응수한다.
이에 알프레드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쓸데없는 소리! 아이젠, 네놈이 숨긴다고 해서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네놈이 테리온과 오스카를 시켜 중앙귀족회는 물론이고 내 아들들에게까지 그 빌어먹을 마약을 뿌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글쎄, 나는 애초에 궐련을 선물했을 뿐이지. 그걸 좋다고 피워 댄 건 네놈들 몫이 아니었나?”
맞는 말이긴 했지만 듣는 사람에겐 복장이 터지는 논리였다.
그리고 아이젠은 더 이상 과거의 멍청이가 아니었다.
물론 헨리가 혹시라도 돌발 상황을 대비하여 샤하트라로 떠나기 전에 충분한 설명을 해 주긴 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이젠의 생각 자체가 깊어진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 결과, 헨리를 끔찍하게 아끼는 아이젠은 헨리가 한 일들 전부를 자기가 한 것처럼 짊어지기로 했다.
이에 알프레드가 이를 아득 갈며 말했다.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감투를 쓰더니 입만 살아났군 그래.”
“글쎄, 팔이 병신이 된 것보단 낫잖아?”
“아이젠!”
콰앙!
사람은 논리에 밀려 할 말이 없어질 때 근거 없는 비난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욕설들은 결국 누가 더 자극적인 말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느냐로 변질되는 것이었다.
현재 알프레드가 그랬다.
하지만 그도 그런 것이 쇼난 지방으로 이동하는 내내 알프레드의 화는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여기까지 오는 내내 술을 세 병이나 추가로 비운 탓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젠은 후작으로 승작하면서 생각이 깊어짐과 동시에 성격 또한 많이 차분해졌다.
헨리의 답안지를 오랫동안 학습해 온 까닭이었다.
분노한 알프레드가 책상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모습을 무심히 지켜보던 아이젠이 말했다.
“알프레드, 만약 여기서 네 아들놈처럼 정령을 끄집어낸다면 공식적으로 나에게 위해를 끼친 것으로 알고 황제 폐하께 보고를 드리도록 하겠다.”
“네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그리고 알프레드는 더 이상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다.
“후우…….”
다시 자리에 앉는 알프레드.
이에 아이젠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나와 결투를 벌이고 싶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네놈을 찢어 죽일지도 모르겠거든.”
“재주가 있다면 어디 한번 해 보시지 그래?”
“네놈……!”
“입 닥치고 들어. 그래도 과거의 정이라고, 내 이번 한 번만 너에게 특별히 기회를 주도록 하지.”
“뭐라고?”
알프레드는 직접적인 행동을 할 수 없으니 말이라도 사납게 내뱉었다.
하지만 아이젠은 그러한 알프레드를 사나운 사냥개를 다루듯이 비슷한 방식으로 다독였다.
어찌 됐든 칼자루는 아이젠이 쥐고 있었으니까.
이에 아이젠이 다시 말했다.
“기회를 준다고 했다, 알프레드. 하지만 삼대가문씩이나 되는 우리가 단순한 분풀이 때문에 결투를 벌인다면 얼마나 큰 웃음거리가 되겠나?”
“그딴 게 무슨 상관이지?”
“네놈은 상관없겠지만 나는 이제 그런 걸 신경 써야 하는 위치가 돼 버려서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네놈이 가지고 있는 일리안 광산을 걸어라. 그렇다면 내 친히 너의 결투 신청을 받아 주도록 하지.”
“뭐, 뭐라고……!”
일리안 광산.
알프레드가 가진 영지 중 이더웨더 지방의 가장 규모가 큰 광산의 이름이었다.
일리안 광산은 알프레드에게 꽤나 쏠쏠한 자금들 중 하나로 보통의 강철보다 더 강한 강철이 채굴되어 최상품 중의 최상품으로 취급되었다.
“헛소리하지 마라, 아이젠!”
쾅!
다시금 책상을 내려치는 알프레드.
이에 아이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왜? 혹시 자신이 없는 건 아니고? 나에게 분풀이를 하고 싶은 거라면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으니 당당하게 결투를 신청한 게 아닌가?”
가벼운 도발.
아이젠은 확실히 성장해 있었다.
아이젠은 더 이상 뒷방 늙은이나 만년 백작이 아닌 사교계에서 새롭게 붙은 별명인 ‘잠룡’다운 모습들을 보여 주었다.
알프레드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확실히 아이젠의 말마따나 놈은 결투를 거절해도 상관없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아이젠이 억지스러운 투정을 받아 주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놈이 요구하는 대로 순순히 응해 주기는 더더욱 싫었다.
이에 결심을 마친 알프레드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좋다, 하지만 일리안 광산뿐만이 아니라 숄레리온 들판과 마룬 협곡 또한 함께 걸도록 하지.”
“뭐라고?”
깜짝 놀라는 아이젠.
그도 그런 것이 숄레리온 들판은 유라시아 제국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최고의 곡창지대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제국의 주요 교역로들 중 한 곳에 위치하여 반드시 지나갈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마룬 협곡이었다.
세간에서는 이 두 가지와 일리안 광산을 포함해 이더웨더가의 황금 삼대지라고 불렀는데 그만큼 수익이 뛰어난 알짜배기 땅들이었다.
이어서 알프레드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젠, 대신 너는 네 가신의 목을 걸어라.”
헨리의 목!
알프레드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아이젠이 급속도로 성장한 것은 헨리라는 그 재수 없는 가신을 들인 직후부터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확신은 없었다.
그저 토벌 직후부터 떠도는 병사들의 소문과 이번 샤하트라 교역의 총책임직을 맡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추측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히 가신 따위가 나에게 그런 치욕을 줘?’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건넨 그놈의 행태를 알프레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알프레드는 자신의 황금 삼대지를 걸면서까지 아이젠을 도발했다.
이에 알프레드가 헨리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아이젠의 얼굴 또한 와락 구겨졌다.
“네 가신의 목을 걸어라, 아이젠! 설마 내가 가진 이 세 개의 땅보다 네 가신의 목이 더 가치 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확실히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았을 땐 알프레드의 과한 베팅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는 승리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전제가 깔린 전형적인 도박꾼의 마음이었다.
아이젠은 구긴 얼굴을 하고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미친놈!’
자식이 없는 아이젠에게 있어 헨리는 자신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자 하나뿐인 최고의 보물이었다.
하지만 무려 알프레드의 삼대지였다.
그 아서스조차도 탐냈다던 알프레드의 황금 삼대지.
확실히 그 정도라면 아이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헨리와 비견될 만한 가치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저놈이 지금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슬슬 기분이 나쁘기 시작했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저 태도.
게다가 황금 삼대지를 걸 정도라면 무조건 자신이 이길 것이라 생각하는 그 오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투는 물물교환이 아닌 명예를 건 베팅이었으니까.
그리고 아이젠 또한 알프레드에게 질 것이라곤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기사 우월주의, 그것이 바로 아이젠의 가치관이었다.
이윽고 아이젠의 입에서 대답이 떨어졌다.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손해 볼 것이 없는 베팅.
그리고 질 자신 또한 없는 게임.
이것이 바로 둔탁한 아이젠이 머리를 굴려 내린 결론이었다.
‘헨리 녀석이 알면 섭섭해하겠지만…… 이 제안만큼은 거절할 수가 없다.’
결투에 헨리의 목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히 헨리가 섭섭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가 여기까지 오가자 더 이상 내빼기도 뭣한 상황이 됐다.
그렇기에 아이젠은 이 대결에서 절대 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헨리 그 녀석도 기뻐해 줄 것이다. 내가 녀석의 가치를 황금 삼대지와 동등하게 만들었으니까.’
이미 내린 결정이었기에 아이젠은 자꾸만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생각이 굴러갈수록 헨리에게서 영향받은 품격 있는 교양이 아닌 원래 가지고 있던 멍청한 가치관이 우후죽순처럼 다시금 튀어나왔다.
“종이와 펜을 가지고 와라!”
아이젠은 결투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제 남은 것은 황제와 아서스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결투 날짜와 장소, 그리고 방식을 선점하는 것이 전부였다.
펜을 집어든 알프레드가 말했다.
“날짜는 차후에 정하도록 하지만 종목만큼은 영지전으로 치렀으면 좋겠군.”
“흥, 좋을 대로.”
이에 두 사람은 서로간의 사인이 담긴 결투 협의서를 몇 장 작성한 뒤 그 위에 지장을 찍었다.
“그놈 목, 깨끗이 씻겨서 데리고 있어라.”
이윽고 협의서를 챙긴 알프레드는 거칠게 응접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가 아이젠의 저택을 떠난 그 순간, 영지전은 쏘아진 화살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 * *
“……그런 연유로 비람 대사장님께 환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헨리는 결국 헤라리온에게 환술의 배움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기도 의식을 끝낸 비람을 만나 헤라리온의 명령을 전했다.
그리고 헨리의 말을 들은 비람의 미간이 일시적으로 좁혀졌다가 다시금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전하께서 생각이 있으시겠지.’
비람의 나이가 일흔이 넘었다.
그리고 헤라리온은 비람의 삼분의 일도 되지 않는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람은 어린 칸의 선택을 존중했다.
게다가 헨리는 혼절한 상태의 셀렌까지 살려 주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비람이 불만을 표출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순순히 환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니 헨리로선 다행일 따름이었다.
이윽고 장소를 옮긴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칸 왕실의 ‘서고’였다.
‘서고?’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된 책자들이 서고 가득히 넘쳐 났다.
그리고 서고의 한쪽에는 수업의 용도로 사용됐을 큼지막한 책상과 칠판이 보였다.
비람이 그것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은 전하께서 수업을 받으실 때 이용하였던 곳입니다.”
“그렇군요.”
“사실 환술 자체를 익히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환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선 그만한 지식들이 기반이 되어야 하기에 우선은 저희 샤하트라 왕조와 사막의 역사부터 가르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통!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비람은 손에 쥐고 있던 거대한 지팡이를 바닥에 한 번 두드렸다.
그러자.
화아악!
헨리와 비람의 주변이 순식간에 새카만 어둠으로 물들었다.
수업을 위한 비람의 환술이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