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칼리번의 군부 상인 (5)
대련을 마친 직후, 로난의 기분은 상당히 들떠 있었다.
자신의 목검이 헨리의 것보다 덜 파괴되었다는, 그 미세한 차이에서 나오는 기쁨 때문인 것 같았다.
물론 헨리는 그런 차이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제 막 익스퍼트에 접어든 상태였기 때문에 중급 마스터에 달하는 로난과 호각을 겨루었다는 사실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다시 이셀란의 관사로 돌아온 두 사람은 커피 대신 시원한 맥주를 택했다.
이에 로난이 시원하게 들이켠 맥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너도 중급 마스터지? 오러의 경도가 나랑 비슷한 걸 보니 대충 그런 것 같던데.”
“중급 마스터?”
“모른 척하기는. 근데 참 특이하네, 수많은 주특기를 보아 왔지만 너처럼 색깔이 특이하고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오러는 처음 봐. 꼭 소드 익스퍼트처럼 이글거리더라.”
“……그래?”
아무래도 로난은 헨리의 경지가 소드 마스터 중급쯤은 되는 줄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에 헨리는 잠시 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사실을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익스퍼트처럼이 아니라 익스퍼트가 맞아.”
“뭐라고?”
“익스퍼트가 맞다고. 게다가 난 오러를 깨우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래서 아직 마스터 유저들처럼 오러를 정돈시키지 못해.”
“……농담이지? 익스퍼트 유저, 아, 아니 얼마 전에 갓 오러를 깨우친 놈이 중급 마스터인 나와 호각을 겨루었다고?”
“그래.”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맥주잔을 다시 입에 대려던 로난의 손이 돌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적잖이 충격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난의 그런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로난뿐만이 아니라 다른 마스터급 유저들이었어도 로난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다시 정신을 차린 로난이 여전히 놀란 눈초리로 헨리에게 질문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럼 아까 전에 봤던 에메랄드빛 오러는 뭐야? 난 태어나서 그런 오러,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그렇겠지. 나도 처음 봤으니까. 아 참, 참고로 말하자면 아직 이 오러는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이 없어. 아니, 내가 오러를 터득했다는 사실 자체를 누구에게도 밝힌 적이 없어.”
“뭐? 그럼 내가 네 오러를 처음 본 사람이란 말이야? 대체 왜?”
“넌 내 하나뿐인 동기니까. 우리가 자주 보진 못해도 난 널 꽤나 신뢰하는 편이거든. 그러니까 오늘 있었던 일은…… 알지?”
“헨리……!”
헨리의 말에 로난은 진심으로 감동했다.
그도 그런 것이 한평생 포람가의 생존형 양자로 살아온 로난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아무런 대가 없이 받는 신뢰는 여러모로 뜻깊은 일이었다.
헨리의 부탁에 로난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믿어라. 동기 좋다는 게 뭐겠냐?”
“그럼 고맙고.”
“근데 그럼 네 말대로 정말 오러를 터득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네 오러는 정말로 굉장한 힘이라고 생각해. 무려 중급 마스터인 나와 쌍벽을 이루었잖아?”
“그래서 나도 아직 내 힘에 대해 파악 중이야. 그래서 더더욱 밝히지 못하는 이유도 있고. 그나저나 너야말로 대단하던데? 검기를 두껍게 넓히는 거, 그게 네 주특기지?”
“맞아, 요즘 틈만 나면 주특기를 단련하고 있어. 그래야 나도 결전기를 가질 수 있을 테니까.”
‘결전기라…….’
결전기.
마스터급 오러 유저에게 있어 결전기란, 그 사람이 가진 힘의 개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기술이었다.
그리고 그 결전기를 바탕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면 호칭이나 별칭, 위명 같은 별명들이 붙게 되는 것이었고.
‘나도 이제 슬슬 눈높이를 마스터로 올려야겠군.’
검사의 힘은 다음과 같이 나뉜다.
오러가 없는 검사, ‘소드 러너’.
오러를 이제 막 터득하여 절제하지 못하고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상태인 검사, ‘소드 익스퍼트’.
그리고 그렇게 출력되는 오러를 자유자재로 매끈하게 유지해 내는 단계의 검사, ‘소드 마스터’.
그리고 익스퍼트부터는 출력되는 양에 따라 급수가 정해지지만, 마스터 단계부터는 주특기와 결전기, 그리고 최종 단계인 궁극기의 유무에 따라 중, 상, 최상으로 나뉘었다.
‘반의 결전기 이름이…… ‘은하수 내리기’였지, 아마?’
공중으로 높이 치솟은 다음, 마치 은하수와 같이 길고 아름다운 검기를 떨어뜨려 내는 반의 시그니처 기술.
로난의 주특기가 검기의 ‘폭’을 넓히는 것이라면, 반의 주특기는 검기의 ‘길이’를 늘리는 것이었다.
“근데 갓 터득한 오러의 출력량이 그 정도라면 최상급이 되었을 때쯤엔 대체 얼마나 커진다는 거야?”
로난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런 것이 보통은 이제 막 오러를 터득한 수준이라면 검기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맺히는 게 고작이니까.
그러나 헨리의 것은 달랐다.
이제 막 오러를 터득한 주제에 마스터급 유저만큼이나 풍부한 출력량을 자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로난의 감탄에서 헨리는 한 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음? 그러고 보니 내 오러의 출력량은 가진 마력량에 비례하는 것 같던데, 그렇다면 오러의 출력량으로 익스퍼트의 급수를 나누는 현재의 기준은 나에게 무의미하지 않나?’
갑작스러운 깨달음이었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그 기준점이 정말로 나에게 무의미한 것이라면 나는 오러를 갓 터득한 상태에서도 마스터의 경지를 노려 볼 수도 있다는 건가?’
생각의 줄기가 여기까지 미치는 순간, 헨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번 시도해 볼 만하다!’
어차피 대륙 역사상 그 누구도 개척한 적이 없는 마검사의 길이었다.
그렇기에 헨리는 혼자서 모든 것을 도전하고 확인해야 할 운명이었다.
이에 헨리는 마스터 경지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필요했다.
그리고 때마침, 헨리의 눈앞에는 중급 소드 마스터인 로난이 있었다.
“로난, 넌 언제 마스터가 됐냐?”
“나? 난 네가 전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이었나?”
“그게 언젠데? 혹시 임무 중에 각성했냐?”
“응, 근데 나 같은 경우엔 좀 허무하게 각성했어.”
“허무하게?”
“응, 5급 구역에 임무가 있어서 부대원들과 출정을 나갔는데, 하필이면 나 혼자 있을 때 위험 마물로 지정된 녀석과 마주친 거야.”
“그래서?”
“규정대로라면 도망쳐야겠지만 왠지 모르게 난 그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그래서 규정을 어기고 칼을 뽑았지.”
“그래서?”
“그런데 웬걸, 내가 막연하게 그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니까 거칠게 출력되던 오러가 갑자기 알아서 정돈되던데?”
“그렇게 마스터가 됐다고?”
“응, 그렇게 됐어.”
“……그래.”
이 녀석이 천재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보통 오러의 습득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 본능이 육체를 살리기 위해 저절로 오러를 개방시키면서 이루어지고, 마스터로의 각성은 자그마한 깨우침으로 인해 강해진다고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반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헤글러가 아직까지 마스터가 되지 못한 이유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어떠한 불안감 때문인 것 같다고.’
그래서 헨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젠에게 면죄부를 발행받아 반에게 헤글러와 디알로 백작의 조우를 부탁했다.
‘마음속의 불안이라…….’
헨리는 한동안 마음이라는 말을 오랫동안 곱씹었다.
마음. 그리고 깨달음.
깨달음을 통해 각성하는 건 마법사와 검사 또한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마법사 또한 자그마한 깨달음을 통해 다음 단계로 각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건가?’
확신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마스터로 각성하는 열쇠라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어.’
멀리 나갈 필요도 없었다.
결심을 마친 헨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로난에게 말했다.
“로난, 문 좀 잠가 줄래?”
“뭐? 갑자기?”
“응, 확인해 볼 게 있어서. 좀 부탁할게.”
“그래, 뭐…….”
헨리의 부탁에 로난은 별 의심 없이 순순히 문을 잠갔다.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한 헨리는 이윽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반과 로난의 말대로라면 나는 반드시 마스터가 될 수 있다.’
감정을 절제하고 마음의 평화를 다스린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명상의 최정상 경지에 오른 헨리에게 있어 마음먹기란 누워서 떡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츠즈즈즈즛!
생각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
이에 로난은 갑작스러운 오러의 방출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곧 숨을 죽이고 가만히 헨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
헨리를 지켜보던 로난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기 시작했다.
‘설마?’
헨리가 무엇을 하기 위해 갑자기 문을 잠그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뜬금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러를 꺼내더니 이제는 놀라운 변화를 보여 주기 시작했다.
츠즈즈즈즛.
놀라운 변화.
그것은 불꽃처럼 이글거리던 헨리의 오러가 소드 마스터의 그것처럼 차분하게 진정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설마 지금 여기서, 그것도 갑자기 마스터로 각성한다고?’
이런 게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애초에 이 자리에서 마스터가 되기 위해 시도한다는 것 자체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러는 갈수록 잦아들었다.
헨리의 덩치만큼이나 거대했던 오러는 어느새 헨리의 피부 결을 따라 매끈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피부에 펴 발라진 오러는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 넣은 것처럼 잔잔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그 출렁임이 잦아드는 순간 헨리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이어서 헨리는 두 손을 들어 올린 다음 가만히 자신의 몸을 살폈다.
두 손을 기점으로 옷깃은 물론이고 전신에 코팅된 매끈한 녹색 빛 오러.
보기에는 얼핏 성공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걸로 된 건가?’
하지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힘이었기에 뚜렷한 확신이 없었다.
이에 헨리는 눈동자를 옮겨 로난과 시선을 마주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로난.
익스퍼트 유저가 마스터로 각성하는 경우가 좀처럼 드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수가 적을 뿐.
그렇기에 헨리의 각성은 결코 낯선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늘 보아 오던 푸른색 결이 아닌 신비로운 에메랄드빛이 헨리의 녹색 빛 눈동자와 어우러지자, 로난은 감히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압도감을 느꼈다.
“어때?”
“뭐, 뭐가?”
흠칫 놀라는 로난.
그러나 헨리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뭐긴,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으니 대충 알 것 아냐? 마스터로 각성한 것 같아?”
“……그, 글쎄? 얼핏 보기엔 성공한 것 같긴 한데.”
“그래?”
단지 상상했을 뿐이었다.
여태까진 파도처럼 넘치는 힘을 제동을 걸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면, 이번엔 잔잔한 호수를 연상하며 의도적으로 힘을 절제했다.
그 결과, 긴장을 풀고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잔잔한 형태의 오러가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헨리는 이내 곧 오러를 거두었다.
그런 다음 다시 한 번 오러를 출력했다.
“음.”
전과 같이 그대로 출력되는 오러.
문제는 없어 보였다.
이에 다시 오러를 거둔 헨리가 말했다.
“가자.”
“어딜 가?”
“정말 각성됐는지 한번 실험해 봐야지.”
“또 대련하자고?”
“그럼 여기서 너 말고 날 상대해 줄 사람이 또 누가 있겠냐?”
“……알겠다.”
그렇게 로난은 온종일 헨리의 대련 상대를 해 주어야만 했다.
* * *
반나절.
헨리와 로난의 실험 대련은 무려 반나절 동안이나 진행되었다.
그리고 반나절이 조금 넘은 직후에야 헨리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거두었다.
“이제 됐어.”
“으하!”
짤막한 비명과 함께 수련장 바닥에 드러눕는 로난.
체력이 부족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헨리의 요구대로 움직이다 보니 누적되는 피로가 무지막지했다.
그러나 헨리는 그런 로난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확실해. 일반적인 검사라면 모를까, 나의 경우엔 오러의 정돈이 마스터의 척도가 될 순 없어.’
실험 끝에 도출된 결론이었다.
헨리의 오러는 일반적인 기준의 급수 나누기는 무의미한 것이라는 것을.
허무했다. 그리고 좀 실망스럽기도 했다.
만약 예상대로 실험이 진행되었다면 자신은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새로운 종류의 힘은 역시나 일반적인 기준으론 감히 판단할 수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바닥에 드러누워 쉬던 로난이 물었다.
“왜? 확인해 보니 아닌 것 같아?”
“응. 확실히 아니야. 그냥 단지 내가 마스터의 오러를 흉내 낸 것뿐이더라고.”
“어휴, 난 잘 모르겠다. 색깔만 다른 줄 알았더니 근본까지 다르다니, 너도 꽤 힘든 길을 걷는구나.”
“어쩔 수 없지, 뭐. 어차피 급한 건 아니니까 일단은 본업에 충실할 수밖에.”
“본업?”
“그런 게 있어.”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다. 하지만 소득이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딱히 불만스럽지도 않았다.
‘그럼 슬슬 장소를 옮겨야겠군.’
실험을 마친 헨리는 슬슬 떠날 준비를 하기로 했다.
오래간만의 재회는 이 정도면 족했다. 어차피 이제부턴 정기적으로 요새를 방문하게 되었으니까.
이에 헨리가 로난에게 말했다.
“슬슬 가 봐야겠어. 배웅은 필요 없으니 그냥 쉬어라.”
“뭐? 벌써 간다고? 하루 종일 대련만 하다가 끝났는데 술이라도 한잔하고 가지?”
“다음에. 어차피 이젠 정기적으로 이곳에 올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
“정기적으로 온다고? 왜?”
“그건 부사령관님께 한번 물어봐.”
“그래, 뭐. 바쁜 사람을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의외로 로난은 섭섭해하지 않았다. 이에 헨리는 특임대와의 만남도 생략한 채 유유히 요새를 벗어났다.
“텔레포트.”
우우웅!
할 일이 많았다.
오러의 비밀을 한 꺼풀 벗겨 내긴 하였으나 당장 급한 것은 오러가 아닌 ‘아크 메이지’로의 각성이었으니까.
휘이이잉!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쏟아졌다.
헨리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살게라였다.
“그럼 슬슬 작업을 시작해 볼까?”
직접 지은 살게라의 대저택에 도착한 헨리는 거주민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저택 한 켠에 마련해 둔 실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