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재림 (2)
‘헥터……!’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위엄 넘치는 존재. 그는 검왕 헥터 마이어가 확실했다.
반가운 마음에 하마터면 입을 열 뻔했다. 하지만 헨리는 헤라리온의 경고대로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다시 한 번 일어나는 진동.
망자를 이승으로 되돌려 놓았으니 야누스의 역할은 거기서 끝이었다.
닫히는 하늘.
신전의 천장은 이윽고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털썩.
“전하!”
쓰러지는 헤라리온.
이에 깜짝 놀란 헨리가 헤라리온을 부축했다.
‘이런!’
두 눈과 입에서 피를 흘리는 그.
야누스의 신비로운 힘에 매료되어 그에게 이러한 피해가 생겼으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저는, 저는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힘겹게 말을 잇는 헤라리온에게, 헨리는 혹시 몰라 챙겨 온 최상급 힐링 포션을 꺼내 마개를 열었다.
퐁!
신전에서 취급하는 최상급 힐링 포션은 대사제가 몇 날 며칠을 기도하여 만든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 효과는 다른 의약품들에 비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났다.
꼴꼴꼴.
헨리는 그것을 천천히 헤라리온의 입에 흘려 넣었다.
점차 생기를 되찾는 헤라리온.
그의 숨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휴…….”
얼마간 더 휴식을 취한 그는 드디어 말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윽고 제단 앞 계단에 걸터앉은 헤라리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의식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전하.”
“아닙니다. 애초에 약속한 것이었으니 이 정도 고생쯤이야 당연히 감수해야겠지요. 하지만 보신 바와 같이 망자를 이승으로 불러내는 일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얼굴에 흐르는 피가 헤라리온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이에 헨리가 가볍게 응수하며 질문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데 전하…… 저 녀석은 계속 저렇게 두어도 괜찮은 것입니까?”
헨리는 헤라리온을 간호하는 내내 우두커니 서 있는 헥터를 주시했다.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동상처럼 서 있는 헥터.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망자를 이세계로 불러내긴 하였지만 아직 그 절차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직 몇 가지 의식이 더 남았긴 한데 제 몸이 허약한지라…… 그 과정을 한 번에 수행할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전하의 안위가 저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니 괘념치 마시고 옥체부터 챙기십시오.”
“배려해 줘서 고맙습니다.”
말을 마친 헤라리온은 다시금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헨리 공.”
“예?”
“제가 일전에 비록 야누스의 힘을 백작들에게 선보이긴 하였으나 이 힘은 사실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되는 힘입니다.”
“그 점은 항상 명심하고 있습니다.”
“물론 헨리 공은 언제나 진실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정말 저를 존중해 주신다면 저와 묵언의 맹약을 맺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묵언의 맹약,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묵언의 맹약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추정컨대 단순히 비밀 유지를 위한 모종의 장치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애초에 부활한 헥터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어떠한 대가든지 모두 치르겠다고 명심하였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쯤이야 당연히 들어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묵언의 맹약.
칸 왕족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비술로, 비술에 참여한 사람들의 암묵을 강제한다.
헨리는 헤라리온의 설명을 충분히 들은 뒤 서로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따 핏방울이 맺히게 했다.
그런 다음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맞건 뒤 암묵을 원하는 서로의 비밀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늘 보고 들었던 야누스 신에 대한 모든 것과 부활한 망자에 대한 비밀을 평생 동안 지켜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헤라리온의 물음에 헨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맹세했다.
“전하, 그럼 저도 맹약 앞에 비밀을 털어놓아도 되겠습니까?”
“먼저 들어 보고 난 후 결정토록 하겠습니다.”
“저 또한 간단한 것입니다. 앞으로 전하께서 저와 제 주변에 대한 ‘진짜 모습’을 알게 되더라도 전하 역시 끝까지 비밀을 지켜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맹세컨대 전하를 속여 넘기는 행위 따위는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 비밀을 지키고 싶은 저의 조그마한 바람일 뿐입니다.”
헤라리온은 이번에도 라의 눈동자로 헨리의 진심을 살폈다.
이번에 건의한 부탁 또한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이에 헤라리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맹세하겠습니다.”
맹약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핏방울이 맺힌 엄지손가락을 맞붙였다.
화아아악!
두 개의 엄지가 맞닿자, 두 사람의 맹세가 핏방울을 통해 교환되며 서로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헨리는 잠깐 동안 몸이 뜨거워짐을 느꼈으나 이내 다시 진정된 것을 확인하고 헤라리온에게 물었다.
“이걸로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맹약을 어길 시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묵언의 맹약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비밀의 교환이었다.
헨리는 이번 맹약을 통해 헥터는 물론이고 차후에 혹시라도 들킬지 모를 자신의 진짜 정체에 대한 비밀 유지를 약속받을 수 있었으니까.
이에 충분히 휴식을 취한 헤라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의식을 계속해서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힐링 포션의 효과는 뛰어났다.
어느새 기력을 모두 되찾은 그는 의욕적인 모습으로 망부석처럼 굳어 있는 헥터 앞에 다가가 섰다.
여전히 안광을 번뜩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헥터.
헥터는 마치 성불하지 못한 귀신처럼 실체는 없지만 흐릿하게 눈에 보이는, 꼭 유령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헥터 앞에 선 헤라리온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Wkrsusdp dhkTejs rkrtjfdl wnrwleh dksgrh Eh dhkTsp.”
파아앗!
주문을 외우자 헥터의 붉은 안광이 더욱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은 점점 더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우득, 우드득.
망부석처럼 서 있던 헥터가 목 관절을 우드득거리며 목을 휘휘 돌려 보였다.
“하아아…… 이 얼마나 그립던 공기인가.”
유령의 껍데기를 하고서 목관절을 우드득거리는 게 어찌 보면 우스운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헥터의 목소리였다.
“성공했군요.”
털썩!
그리고 헥터의 강림을 완벽하게 이끌어 낸 헤라리온은 진이 빠진 나머지 다시금 자리에 주저앉았다.
헨리와 눈을 마주친 헥터.
이에 헥터가 입꼬리를 올려 보이며 말했다.
“헨리 모리스, 정말로 약속을 지켰군.”
“당연한 소릴.”
간만의 재회에 두 사람은 악수를 하려고 습관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손을 마주 잡으려던 순간, 헨리의 손은 허공을 휘저을 수밖에 없었다.
“음?”
그것을 본 헤라리온이 말했다.
“아 참, 말씀드린다는 것을 깜빡했군요. 현재 헥터 경은 저승에서 ‘영혼’만을 이승으로 불러들인 상태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육체도 함께 되살리고 싶지만 그의 육체는 이미 오래전에 소실되어 복구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랬군.”
물리적인 접촉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헥터는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헤라리온이 말했다.
“헨리 공, 전에 말씀드린 것은 가지고 오셨습니까?”
“물론입니다. 특별힌 신경 써서 준비해 왔습니다.”
헤라리온의 물음에 헨리는 얼른 체스트 속에서 준비해 온 것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절그럭, 절그럭.
그것은 갑옷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 도배된, 그 어떤 각인도 심벌도 새겨지지 않는 시커멓기 짝이 없는 전신 갑옷.
헨리는 황궁에나 장식될 법한 거대한 크기의 흑갑옷 세트 한 벌을 꺼내 차례대로 바닥에 늘어놓았다.
이에 갑옷을 본 헤라리온이 말했다.
“일부러 큰 걸 준비하신 겁니까?”
“크기나 무게에 상관없다고 하셔서 일부러 신경 써서 준비했습니다.”
“흠, 덕분에 주문을 그려 넣기에는 편할 것 같군요.”
대답과 함께 헤라리온은 품속에서 자그마한 붓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런 다음 상어 지느러미처럼 이마에 외뿔이 돋아난 투구를 집어 들려고 했다.
그런데.
“어어?”
생각 없이 투구를 집으려다 헤라리온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였다.
생각보다 투구가 몹시 무거웠기 때문이다.
“……헨리 공? 이거 대체 무게가 얼마나 되는 겁니까?”
“전부 합해서 700킬로그램이 조금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헥터의 몸체가 될 갑옷들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특별히 불카누스에게 최고로 질 좋은 금속들만을 골라 합금 제작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전체 무게가 무려 7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대륙에서 가장 큰 갑옷이 탄생하였다.
이에 대화를 듣던 헥터가 물었다.
“저게 그렇게 무겁나?”
“꽤 나가지. 무게로만 따지자면 오우거 정도는 될 테니까.”
“크기도 오우거들이나 입을 법한 크기인데?”
“확실히 인간이 입기엔 무리가 있지. 하지만 너라면 가능해.”
“그렇다면야 상관없지.”
이윽고 헨리의 도움하에 헤라리온은 갑옷의 안쪽 부분에 샤하트라어로 쓰인 주문들을 붓글씨로 새겨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뒤, 모든 작업이 끝날 때쯤 헤라리온은 이마에 흐르는 땀들을 훔쳐 낸 후 합장을 시작했다.
“Gkqcp!”
파지직!
명령어를 외치자 작고 푸른 정전기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갑옷들 사이를 휘저었다.
준비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헥터 경.”
“음?”
“이제부터 이 갑옷들은 헥터 경에게 귀속되었습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귀속되었다고?”
헤라리온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단순히 귀속되었다고만 했을 뿐.
이에 헥터는 바닥에 널브러진 갑옷들을 한동안 응시했다. 그러자.
끼기기긱, 후웅!
절그럭, 절그럭, 절그럭.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갑옷들이 마치 자석처럼 헥터의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철걱! 철걱! 철걱!
멋진 광경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합체가 끝나자 야누스의 신전 앞에 도저히 인간 기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거대한 크기의 흑기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거대하고 묵직한, 그리고 흑갑옷 특유의 스산함이 헥터의 붉은 안광을 더더욱 돋보이게 했다.
헥터는 갑옷들을 장착한 뒤 관절 이곳저곳을 돌리며 낯선 육체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좋군.”
흡족하게 웃는 헥터.
이어서 헥터는 거대해진 손바닥을 들어 올려 헤라리온에게 악수를 청했다.
“헤라리온이라고 했던가? 나를 지옥에서 꺼내 주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혹시라도 나중에 내 힘이 필요하거든 언제든지 나를 부르도록 해라. 한달음에 달려와 그대의 힘이 되어 줄 테니.”
“전 그저 헨리 공과 약속한 것을 지켰을 뿐입니다. 그러니 감사 인사는 헨리 공에게 하시면 됩니다.”
“겸손하군.”
헥터는 통일 전쟁 시대 때의 인물. 그리고 수십 년 전에 죽었던 사람이므로 굳이 헤라리온에게 예를 갖출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헤라리온 또한 딱히 그런 부분에 대해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헤라리온과 악수를 나눈 헥터는 이어서 헨리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약속을 지켜 줘서 고맙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그나저나 한번 확인해 보지, 그래?”
“무얼?”
“힘 말일세.”
“아아, 그렇지.”
악수를 나눈 직후 헥터는 헨리의 권유대로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스스스슷!
선명하고 푸른, 마치 사파이어를 연상케 하는 청아한 오러가 헥터의 전신을 강물처럼 뒤덮었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갑옷 위로 덧씌워진 푸른색 오러는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헤라리온이 말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흑기사는 난생처음 보는군요.”
“흑기사라……. 그것도 꽤나 괜찮은 이름이군요.”
두 사람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윽고 힘을 거둔 헥터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물론 거대한 흑색 투구에 가려져 미소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헥터가 말했다.
“그런데 이 몸으로 음식은 못 먹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