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재림 (1)
“큭, 이젠 정말로 마력이 바닥난 모양이군.”
이용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젠 말보다는 텔레포트에 익숙해진 헨리는 여느 때와 같이 샤하트로로 이동하는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그러자 그렇잖아도 부족하던 마력이 단숨에 줄어들며 다시 한 번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헨리가 도착한 곳은 태양의 계단 입구였다.
원래대로라면 환술 결계로 인해 샤하트라 내부로 텔레포트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토벌이 끝난 직후, 헨리는 비람 대제사장에게 환술 결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라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제국에서 유일하게 샤하트라로 텔레포트할 수 있는 마법사가 되었다.
태양의 입구 앞에 도착한 헨리.
헨리는 샤하트라에 도착하자마자 모랫바닥 깊은 곳까지 퍼져 있는 진한 사막의 마력들을 루미놀의 발찌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역시 질이 다르구먼.’
제국의 땅도 결코 나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라의 축복을 머금은 샤하트라의 대지는 제국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력이 농후했다.
‘한결 낫군.’
그 덕분에 금세 통이 가라앉은 헨리는 천천히 태양의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겨 칸의 왕궁으로 향했다.
“어서 오시지요, 헨리 공.”
토벌이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그사이에 헤라리온은 되찾은 왕권의 강화에 힘을 쏟았고 빈틈투성이였던 체계들을 재편성했다.
헤라리온과 마주 앉은 헨리가 웃으며 인사치레를 했다.
“역시 폐하께선 카마트라가 어울리십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헨리 공이 아니었다면 이 카마트라를 두 번 다시 입지 못할 뻔했습니다.”
카마트라는 샤하트라의 왕이 입는 어의였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수트라의 기능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신성한 왕의 옷이라는 이유로 종교적인 의미가 더 강했다.
이어서 헨리가 말했다.
“숙청은 끝내셨습니까?”
“잡아들이는 족족 목을 치고 있긴 합니다.”
“잘하셨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본보기를 제대로 보여야 두 번 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하하…… 어째, 본보기라는 말을 사용하니 제가 폭군이 된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겠지요. 아무튼 저번에 말씀하신 것 때문에 찾아오신 거지요?”
“그렇습니다. 들으셨을지는 모르겠지만 폐하의 추천서 덕분에 아이젠 백작은 후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던 개인 상단을 쇼난가에 편입시키면서 정식으로 교역이 가능하게 손써 두었습니다.”
“잘된 일이네요. 그럼 교역 품목은 생각해 오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저희 밀리언 상단은 샤하트라의 공물들을 수입할 생각입니다.”
“……공물,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샤하트라의 향수나 향신료, 사막 소금, 그리고 사막 광석이나 융단 같은 것들을 사들일 예정입니다.”
“하지만 헨리 공, 아무리 표면적인 거래라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제국 황실에 보낼 공물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물로 보낼 분량을 제하고 나면 사실 거래할 수 있는 수량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는 공물의 양이 적은 이유는 공물로 보내는 양이 너무 많아 적자를 보기 때문에 더 이상 만들지 않으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
“그 적자, 제가 메워 드리겠습니다. 물론 한 번에 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에 생산되던 공물들의 단가보다 세 배를 더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조금씩 생산성을 높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 세 배나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어차피 공물로 받아 오던 샤하트라의 사치품들은 오로지 샤하트라에서만 수급할 수 있는 것. 샤하트라의 사치품은 황실에서도 소비되긴 하지만 그중 일부는 공로를 치하할 때 쓰이는 하사품으로도 쓰이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뿌려진 하사품들이 귀족 아녀자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좋습니다.”
“저희 물건들이 그렇게나 인기가 좋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 판매는 걱정하지 마시고 높아진 이윤으로 물품 생산에만 더 힘써 주신다면 제가 그 사이에서 더더욱 샤하트라의 재정을 부강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도매가를 세 배나 높였으니 소매가는 그보다 훨씬 더 부풀릴 예정이었다.
물론 굳이 헤라리온에게 유통 마진을 얼마나 부풀릴 것인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말해 봤자 좋을 게 없었으니까.
이에 헤라리온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표면적인 거래라고 하기엔 조건이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진짜 목적을 감추기 위한 위장용 거래라고는 하나, 어찌 됐든 독점 교역을 맺기로 하였으니 이왕이면 능률을 높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역시 헨리 공은 대단하십니다.”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에게 베푸신 은혜가 있는데 제가 어찌 그에 보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치품 거래는 진짜 목적을 감추기 위한 위장용 교역에 불과했다.
헨리가 정식적인 교역을 통해 진정으로 얻고자 한 것은 다름 아닌 ‘힘’이었다.
‘힘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 그중에서 첫 번째가 바로…….’
마법의 전수였다.
샤하트라에는 크게 두 가지의 힘이 존재한다.
제국의 검사들과 같이 검술을 단련하여 오러를 연마하는 물리적인 힘.
그리고 라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종교적인 힘을 갖는 환술의 힘.
이 두 가지가 전부였다.
물론 세부적인 사항으로는 궁술이나 창술도 존재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것들은 전부 무력적인 힘에 해당했다.
‘이런 시대에 마법을 배우지 않는 것은 죄악이나 마찬가지다.’
마법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 준 유일한 전지전능함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전지전능함은 마법사의 숙련도에 따른 차이를 보이겠지만 발전하는 시대 속에서 마법을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국력의 낭비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마법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샤하트라에 전직 대마법사로서 손수 마법을 전파해 제2의 마법문명을 샤하트라에 이뤄 낼 생각이었다.
‘마탑보다야 다방면에서 부족하겠지만 오리지널 미라클 블루가 내 손안에 있고 내가 스승으로 있을 테니 발전 속도만큼은 금방 따라잡을 것이다.’
현재의 마탑은 과거에 펼쳐진 제국 정책 때문에 생활용 마법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가 원하는 것은 생활용 마법이 아닌 살상용 마법.
이유는 미래에 있을 제국군과의 교전에서 마법사들을 상대하기 위한 마법 부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해 볼 만하다. 생활용 마법은 마법을 창조해야 하는 수준이지만 살상용 마법은 단순히 익히고 쓸 줄만 알면 될 테니까. 게다가 마법 포격대를 비밀리에 조직하기엔 샤하트라만한 곳도 없다.’
살게라만큼이나 외부와 단절된 곳, 그곳이 바로 샤하트라였다.
헨리는 그런 샤하트라에 유일하게 출입할 수 있는 교역 상인으로서 제국의 눈을 피해 자신만의 마법 사병대를 조직할 생각이었다.
“전에 말하셨던 대로 마법사로 육성할 인재들은 끊임없이 물색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리 급한 것이 아니니 공무를 수행하시면서 천천히 진행하셔도 좋습니다.”
“그럼 슬슬 전에 약속했던 것부터 이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앞서 걸어 나가는 헤라리온.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과 신하들 또한 모두 헤라리온을 뒤쫓기 시작했다.
‘왕은 왕이군.’
왕은 혼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웬만한 권력가들 또한 절대로 혼자서 다니는 법이 없다.
헨리는 혼자가 편한 사람이었다. 귀찮은 일 대부분은 마법으로 해결하면 되었고 자신의 사생활을 남에게 보여 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전생의 헨리가 작위를 받지 않겠다고 한 것이었다.
‘얼른 그때로 되돌아가야 할 텐데.’
지금은 복수를 위하여 자신의 편의를 철저하게 절제하고 있었지만 헨리는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모든 일들을 해결하고 다시 마법 연구에만 몰두하던 그때가 오기를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9서클을 이뤄 내리라.’
이윽고 헤라리온은 꾸밈새가 웅장한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다.
이에 헤라리온이 뒤따라온 신하들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턴 헨리 공과 나만 가도록 하겠소.”
“알겠습니다, 폐하.”
신하들이 물러났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신하들조차 출입할 수 없는 곳인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런 곳임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은 외부인인 헨리의 출입에 대한 어떠한 반대의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그것은 헤라리온이 왕권을 확실하게 강화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가시지요.”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헨리는 그렇게 세 개 정도의 문을 더 거친 후에야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깊은 계단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지하 벽면에 수백 개의 불꽃들이 횃불처럼 일렁이고 있어 어둡지는 않았다.
‘등유인가?’
원리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수백 개의 불꽃들이 안내하는 지하 계단의 끝에 도달할 때쯤, 헨리는 왜 이곳을 외부와 철저하게 격리시켜 놓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야누스의 신전이었군.’
계단을 내려갈수록 드러나는 신전의 구조물들.
그것은 익숙하게 보아 오던 라의 것이 아니었다.
쇠사슬과 각종 날카로운 무기들이 삼엄하게 걸려 있는 이곳은, 숭배를 금기시하는 야누스의 하나뿐인 신전이었다.
헨리가 말했다.
“전하, 여기가 혹시 야누스의 신전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준비는 모두 끝마쳤습니다. 그러니 헨리 공만 준비가 되셨다면 언제든지 의식을 시작해도 좋습니다.”
“저야 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만. 그럼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전에 말씀드렸던 망자의 물건은 챙겨 오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저에게 주시지요.”
헤라리온의 요구에 헨리는 선뜻 손가락에 끼고 있던 헥터의 약혼반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반지를 건네받은 헤라리온은 그것을 신전의 중앙 제단 위에 올린 후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다.
“그럼 의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헨리가 헤라리온에게 동맹의 조건으로 내건 것.
그것은 다름 아닌 ‘검왕 헥터의 부활’이었다.
‘죽음을 관장하는 야누스의 힘이라면 굳이 흑마법이 아니라도 망자를 되살릴 수 있겠지.’
그것이 야누스의 힘을 접한 헨리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
헨리가 처음 이것을 조건으로 내걸었을 때, 헤라리온과 비람의 표정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망자의 부활.
생사의 규율대로라면 절대로 해선 안 될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윤리적인 관념에 의해서 해선 안 될 행동이었지 야누스의 딸인 헤라리온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뒤집어엎을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헥터의 부활을 위해 치열하게 헤라리온을 설득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단 한 번뿐인 부활의 기회.
하지만 헨리는 그 부활의 기회를 막상 획득하고 나자 한동안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이대로 골든 잭슨 그놈을 부활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텐데 말이야.’
마왕의 저주와 병마로 단명해 버린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초대 황제.
그리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헨리의 오랜 동료들.
헨리는 보고 싶은 수많은 얼굴들을 떠올렸지만 차마 그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적인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헥터와의 의리를 저버릴 생각도 없었다.
‘나는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헨리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와 삼대가문 놈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복수하고 싶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쯤, 헤라리온이 의식을 거행하기 시작했다.
“먼저 망자를 소환하기 위해 달을 불러들이도록 하겠습니다. wlrma tlrkrdms duejfq tl tktlqdh qns. rPthr dnjsrhfmf wlqvlf wnddlqslek. dmddnjsgo wntpdy!”
우우웅!
헤라리온이 주문을 외운 순간, 어두컴컴하던 신전의 천장 위가 일렁이더니 정말로 보름달이 뜬 밤하늘처럼 천장이 뒤바뀌었다.
‘밤과 죽음을 지배한다더니, 이 정도일 줄이야!’
마법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던 보름달이 나타났다.
이제 사후 세계라고도 불리는 명계에서 망자를 불러내기 위한 준비는 끝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어서 헤라리온은 환하게 밝혀진 달빛 아래에서 두 팔을 벌리고 연달아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ak! dnflrk skadlrk! qufwja gka tlq wja Wlrdj ekffk dks zksk!”
우우우웅!
거대한 진동.
짧은 주문 끝에 찾아온 것은 신전 전체를 울리게 하는 거대한 진동이었다.
쿠구구구구.
먼지가 떨어지고 벽에 붙은 불꽃들이 일렁였다.
그리고.
“……!”
보름달이 뜬 밤하늘 사이에 갈라진 거대한 틈.
그리고 헨리는 그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하고 신비로운, 그리고 감히 말문을 틀어막는 압도적인 존재를 보았다.
‘저게 바로……!’
야누스였다.
그 헨리조차도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위압감을 가진 존재.
헨리는 그 초월적이고 압도적인 힘 앞에서 망부석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붉은 눈을 번뜩이는 야누스를 우두커니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헤라리온은 헥터의 약혼반지를 야누스에게 내밀었다.
허공에 떠올라 야누스의 틈으로 사라지는 약혼반지.
그리고 그때.
휘오오오!
거대한 돌풍이 신전 전체에 휘몰아쳤다.
“움직이지 마세요.”
돌풍이 불어닥침과 동시에 벽면에 일렁이던 모든 불꽃들이 꺼지고 말았다.
이에 헤라리온이 헨리에게 날이 선 목소리로 경고했다.
꿀꺽.
전신을 옭아매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유지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휘오오오오……!
천천히 불어닥치는 바람.
그리고 그 바람이 한데 어우러진 곳에 회색빛 돌풍이 뭉쳐지더니 이내 곧 한 사람의 형상을 빚어냈다.
‘저건…….’
붉은빛의 안광을 번뜩이는 존재.
그는 바로 ‘검왕 헥터 마이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