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두 번째 각성 (2)
“어, 어머니!”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헤라리온이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를 꽥 질렀다.
칸 왕조의 유일한 왕족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
헤라리온의 친모인 비네스 칸과 하나뿐인 정실, 셀렌 칸이었다.
놀란 이는 헤라리온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했어야 할 쇼난가의 주인인 아이젠과 보호를 자처했던 헨리 또한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설마 아서스 그놈이?’
그 순간 헨리는 머릿속에 아서스가 떠올랐다.
이 말도 안 되는 인질극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베네딕의 배후에 있을 아서스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서스 그놈이 이제는 완전히 막나가는구나.’
아무리 그가 대공작이라고는 하나, 주인이 없는 집에 몰래 침입하여 토벌 중인 왕족을 납치해 오다니?
아서스는 상상을 뛰어넘는 미친놈이 분명했다.
두 사람을 무릎 꿇린 베네딕.
베네딕은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토벌군의 수장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세등등한 베네딕의 얼굴.
뿌득!
이에 헤라리온이 치아가 부서지도록 이를 갈았다.
‘……이거 야단났군.’
자신 있게 왕족을 지켜 주겠노라 다짐했건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차마 헤라리온을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젠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분들이 왜 저기에……?”
최악의 상황이었다.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는 상황.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베네딕이었다.
“헤라리온.”
베네딕은 헤라리온을 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미 샤하트라의 왕은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에 헤라리온은 대답 대신 매서운 눈빛으로 베네딕을 노려보았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왕의 증표들을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슬그렁.
허리춤에서 곡도 한 자루를 뽑아 드는 베네딕.
거절의 말로는 뻔했다.
‘……끈질긴 놈 같으니.’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끝까지 왕의 증표를 요구하는 것을 보면 라와 야누스의 증표가 그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증표들을 넘겨서는 안 됐다.
하지만 밀약까지 맺은 상황에서 뻔뻔하게 친족들을 포기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설득해야겠지.’
선택지가 달리 없었다.
이에 헨리는 미안한 기색을 담아 헤라리온에게 말했다.
“……전하, 잠시만 시간을 갖고 조금만 더 고민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더 고민해야 합니까……?”
“하지만…….”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안전하게 내 가족들을 지켜 주겠다고!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세상에 단 두 사람밖에 없는 혈육들이었다.
게다가 아직 슬하에 자식조차 두지 못했기에 헤라리온에게 있어 저들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
왕도 결국엔 인간이었다.
헤라리온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했다. 마치 톡 하고 건드리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은 그런 슬픔들이었다.
그렇기에 헨리는 차마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결국 협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진지는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그리고 그렇게 사막의 밤이 찾아왔고 헤라리온을 제외한 토벌군 수장들의 수뇌부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회의를 거쳐도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베네딕의 요구를 들어주어선 안 된다는 게 바로 회의의 결과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모두들 야누스가 가진 죽음의 힘과, 무신이 가진 라의 권능을 몸소 겪었기에 그 힘들이 가지는 공포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의견을 헤라리온에게 직접 전달할 순 없었다.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럼 자네만 믿겠네, 헨리.”
결국 그를 설득하는 것은 헨리의 몫이 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흩어졌다.
헨리는 헤라리온을 설득하기 전에 잠깐 동안 생각을 정리한 후 헤라리온이 머물고 있는 막사로 향했다.
“주무십니까?”
“……이 상황에 잠이 올 리가 있겠습니까?”
헨리를 대하는 말투가 몹시 퉁명스러워진 것이 신경이 예민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유리를 다루듯이 더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전하.”
“듣고 있습니다.”
“……선택하셔야 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겨우 참고 있던 먹먹함이 습자지를 적시듯이 다시금 천천히 베어 나왔다.
왕도 인간이었다.
하지만 왕은 하나뿐인 왕이었기 때문에 개인이 아닌 다수를 위한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것이 왕이 짊어져야 하는 왕관의 무게였다.
헨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가 스스로 대답할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어깨 위에 너무 많은 슬픔들을 짊어져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어렵사리 대답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내 가족을 택할 수밖에요…….”
“……알겠습니다.”
그가 아무리 라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근본은 인간이었다.
그것도 유약한 심성을 가진 헤라리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
그가 어렵사리 대답을 내놓자 헨리는 두 눈을 지긋이 감으며 천천히 그를 다독여 주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어찌 제가 감히 전하께 제국의 욕심을 강요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해해 줘서…… 이해해 줘서 고맙소…….”
“아닙니다. 전하의 선택은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으로서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일 뿐입니다. 하지만 전하, 대신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결국 헨리는 헤라리온의 선택을 존중해 줄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욕심을 강요하기에 그는 너무 유약한 사람이었으니까.
대신 포로와 증표의 교환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했다.
“……헨리 공에게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도 지금 당장 말입니다.”
“예……?”
덧붙여, 헨리는 베네딕과의 포로 교환을 지금 당장 해치우고 싶다고 말했다.
“날이 밝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교환식을 진행하면 여러모로 전하께도 토벌군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저에게 증표를 맡겨 주신다면 지금 바로 베네딕을 만나 두 분을 모셔 오도록 하겠습니다.”
방법은 묻지 않았다.
텔레포트도 사용하는 헨리였기에 수를 낸다면 얼마든지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헤라리온은 고민했다.
아무리 헨리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어찌 됐든 헨리는 제국인이었다.
헨리의 눈을 쳐다보는 헤라리온.
그 순간, 헤라리온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라의 눈동자가 일순간 번쩍였다.
화악!
물론 헨리는 그 빛을 보지 못했다. 그 빛은 오로지 라의 아들인 헤라리온에게만 허락된 것이었으니까.
이윽고 빛이 사라졌고 헨리의 진심을 확인한 헤라리온이 약간 놀란 눈초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음을 얻었다.
그 덕분에 헨리는 전생에서도 보지 못했던 왕의 증표들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품속에서 증표를 꺼내는 헤라리온.
증표는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반지였군.’
왕의 증표라기에 대단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증표의 정체는 단순한 반지였다.
“붉은 것이 라의 증표이고, 검은 것이 야누스의 증표입니다.”
“알겠습니다.”
반지를 받아 든 헨리는 헤라리온이 그랬던 것처럼 품속에 그것들을 집어넣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두 분 다 무사히 구출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절대로 실수가 없어야 한다. 그에 헨리는 마지막으로 목례를 해 보인 후 그의 막사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침투 준비를 마친 헨리는 칼리번에서 그랬듯이 마법으로 기척과 모습을 지운 다음 빠른 속도로 진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플라이.’
후우웅!
외견이 어둠과 동화된 데다가 제국의 성처럼 마법 장벽 같은 것이 없었으므로 수도로 침투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욱 쉬운 일이었다.
헨리는 계속해서 날았다.
날고 날아서 칸의 왕궁 뒤뜰에 안착했다.
목격자는 없었다. 그런데 헨리가 인기척이 없는 뒤뜰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야밤에 손님이 다 오셨군.”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베네딕이었다.
‘역시.’
사막의 눈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전시 상황이었으니만큼 당연히 베네딕의 감시망에 포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이 없는 뒤뜰을 고른 것이고.
이에 헨리가 마법을 거두어들이자 어둠 속에 동화되어 있던 헨리의 모습이 외부에 드러났다.
“넌 그때 아이젠 옆에 있던 그놈이로군. 근데 정체가 마법사인 줄은 몰랐는데?”
첫 번째 교섭에서 안면을 익혀 두었으니 두 사람은 구면이었다.
그러나 베네딕의 알은체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퉁명스럽게 용건만을 내놓았다.
“낮에 제안한 것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왔다.”
“어떤 대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밤중에 남의 집에 찾아오는 것이 제국의 예의였던가?”
“인질이나 붙잡고 있는 주제에 예의를 운운할 입장은 아니지 않나?”
“흐흐흐, 그래서? 그놈이 뭐라고 하든?”
“증표를 내주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증표는 지금 나에게 있다.”
“당돌한 놈이로군. 겨우 마법이나 조금 부린다고 해서 이 나를 상대로 혼자서 거래를 하러 왔다고?”
화르륵!
그때였다.
베네딕이 헨리를 얕잡아 보이는 듯한 태도를 취하자 헨리는 말없이 손바닥 위로 불꽃을 피어 올렸다.
“그 조금 부리는 마법으로 증표를 숨겨 두었다.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평생 왕의 증표는 구경도 못 할 것이다.”
진심이 묻어나는 살벌한 경고에 베네딕은 그제야 얼굴을 조금 굳혀 보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알겠다.”
대답을 마친 베네딕은 얼마 뒤, 헨리의 요구대로 비네스와 셀렌을 데리고 나타났다.
“증표는 두 사람의 안전을 먼저 확인하고 난 뒤다.”
“좋을 대로.”
인질들의 등을 떠미는 베네딕.
이윽고 두 사람의 안전을 확인한 헨리는 두 사람이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기 전에 서둘러 수면 마법을 시전했다.
“슬립.”
쓰러지는 두 사람.
잠든 두 사람을 들쳐 업은 헨리는 품속에서 증표들을 꺼내 베네딕에게 던져 주었다.
반지를 확인하는 베네딕.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확실하군.”
“플라이.”
거래가 종료되자마자 헨리는 두 사람을 안고 하늘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허공 위로 떠오르면서 나지막이 명령했다.
“클레버.”
-네, 주인님!
콰직!
헨리가 명령을 내린 순간, 대기 중에 흩어져 있던 클레버가 베네딕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늘 그렇듯이 기체 상태로 허공을 떠다니던 클레버가 헨리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보자기처럼 베네딕을 집어삼킨 것이었다.
“이런……!”
클레버의 근본은 미믹.
누군가를 집어삼키는 것이 바로 미믹의 근본적인 힘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속.
클레버의 배 속으로 집어삼켜진 베네딕은 뒤늦게 허리춤의 쌍검을 뽑아 들며 분노와 함께 소리쳤다.
“겨우 이따위 장난질로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냐!”
스캉!
베네딕의 쌍검으로부터 푸른색 불꽃들이 피어올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위이이잉!
몸 전체를 저릿하게 할 만큼 엄청난 크기의 진동이 전신을 엄습했다.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십 수백 개에 달하는 보랏빛 마법진들이 찬란한 광휘와 함께 일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히 아니지.”
짝!
베네딕의 고함에, 헨리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리고 가볍게 손뼉을 한 번 쳐 보이자 광휘를 내뿜던 마법진들이 동시에 폭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