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샤하트라 산맥 (1)
아이젠과 헤어진 헨리는 토벌군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텔레포트를 사용해 무슈로 향했다.
그리고 즉시 불카누스를 만나 두 백작에게 부탁받은 마법 편자의 제작을 의뢰했다.
이에 불카누스가 가슴을 두드리며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숫자가 많아 봤자 고작해야 편자입니다. 그러니 이쪽은 염려치 마시고 편하게 볼일 보고 오시지요.”
딱히 개수는 정해 두지 않았다.
하지만 두 백작이 요구한 숫자보다는 조금 더 많이 준비해 둘 생각이었다.
전쟁이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법이니까.
이에 헨리가 선금을 치르려 하자 불카누스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넣어 두십시오. 은인에게 돈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한두 개도 아니고 수천, 아니 수만 개에 달하는 편자입니다. 그리고 시장님을 구해 준 값은 저번에 기술 협약으로 마무리 짓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넣어 두십시오.”
“정말 괜찮습니다. 이번에도 돈을 받지 않으신다면 오히려 부담스러움을 느껴 다음부터 의뢰를 맡기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절한다고 해서 값을 치르지 않을 헨리가 아니었다.
한 번 보고 말 사이라면 모를까, 헨리에게 있어 불카누스는 앞으로도 쭉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가야 할 중요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헨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더욱 공사 구분을 철저히 했다.
이에 불카누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릿속에 겸손히 계산기를 두드린 후 대답했다.
“그럼 인건비는 제외하고 재료비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건 재료비로 쓰시고 이건 제 개인적인 성의입니다. 기술자분들과 회식이라도 한번 하시지요.”
“허허, 이거 참…….”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시장님만 믿고 다른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로써 무슈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볼일을 마친 헨리는 무슈를 벗어나자마자 다시금 텔레포트를 사용해 텐의 저택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음?”
헨리가 저택에 발을 들이자마자 텐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잽싸게 헨리를 맞이해 주었다.
그런데 간만에 방문한 저택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이에 주변을 둘러보던 헨리가 말했다.
“텐.”
“예, 헨리 공.”
“헨리 공?”
“그렇습니다. 이제는 예전처럼 헨리 공을 님이라고 부를 순 없습니다. 헨리 공은 이제 어엿한 쇼난가의 가신이시니까요. 그러니 더더욱 호칭에 유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쩐지 분위기가 바뀐 것 같더라니, 그렇다면 내 소식은 반에게서 들은 것이겠군.”
“그렇습니다. 아 참! 그리고 반 님의 얼굴이 바뀌신 사연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살게라에서 얼굴에 큰 상처를 입으셨는데 우연히 마음씨 좋은 마도사님을 만나 그분의 도움을 받으셨다지요? 참 부럽습니다. 저도 기회만 된다면 그분께 성형술을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로 성형이 너무 잘되신 것 같습니다.”
“……그래.”
안 본 사이에 심경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 듯했다.
그리고 텐의 심경만큼이나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 바로 집안의 인테리어였다.
예를 들자면 벽에 걸린 그림들을 포함하여 시종들이 입는 자질구레한 의복 같은 것들까지 말이다.
그것을 본 헨리가 생각했다.
‘뱁새가 황새 흉내를 내는군.’
평민 출신의 거부였던 그의 집 안에는 과시욕을 드러내기 위해 금붙이나 보석들로 치장된 가구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는 좀 더 고풍스럽고 깊이 있는, 이를테면 오래되어 보이고 이름 모를 골동품 같은 것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벼락부자가 귀족을 흉내 내는 꼴이었다.
물론 텐이 이런 식으로 호들갑을 떠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란 본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동경을 가지는 법이니까.
‘그래도 나쁘지는 않군.’
그렇기에 굳이 텐의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격식을 차리고 스스로의 가치를 드높이려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헨리에게는 유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그래, 뭐. 스스로 행동거지를 조심한다고 하는데 내가 뭐라고 할 순 없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반과 헤글러는 지금 어디에 있지?”
“지하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 알겠다.”
어울리지 않게 고상을 떠는 텐을 뒤로한 채 헨리는 두 사람을 찾아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더 빨리!”
“예!”
딱! 딱! 따악!
반의 호령에 헤글러는 초인적인 움직임을 선보이며 순식간에 세 번이나 목검을 휘둘렀다.
과연, 그 쟁쟁한 경쟁률을 뚫고 유일하게 고용된 사내다웠다.
그러나 그런 엄청난 움직임을, 반은 아이와 놀아 주듯이 한 손으로 뒷짐을 진 채로 반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 내고 있었다.
‘저놈도 얼른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야 할 텐데.’
그리고 헤글러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헨리가 짤막하게 감상평을 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헤글러는 분명히 뛰어난 검사였으나 반과 비교하자면 한참이나 모자란 실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글러를 고용한 까닭은 간단했다.
헤글러는 반과 같이 엄청난 검사로 성장할 수 있는 ‘천재의 싹’을 가진 유능한 사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헤글러는 가족이라는 절박함을 가진 남자.
입이 무겁고 충성스러운 인재가 필요했던 헨리가 그를 뽑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윽고 헨리의 방문을 확인한 반이 헤글러의 목검을 멀찍이 날려 보냈다.
따악!
저 멀리 날아가는 헤글러의 검.
이에 헤글러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항복을 선언했다.
“졌습니다.”
“맹한 놈, 그렇게 해서 언제 마스터가 될래?”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일할 때는 동료 관계였지만 이럴 때만큼은 확실한 사제지간이었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제가 없는 사이에 많은 변화가 생겼더군요.”
“흠흠, 그건 미안하게 됐다. 실은 쇼난가의 배지를 빼고 들어온다는 걸 그만 깜빡했지 뭐냐, 그래서 뭐, 하하…….”
어색하게 웃는 반.
이에 헨리가 대수롭잖다는 듯이 화제를 전환시켰다.
“뭐, 언젠간 말했어야 할 일이니 별로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보다 드디어 토벌 날짜가 잡혔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잡혔군. 그래서, 토벌은 언제지?”
“사흘 뒤입니다. 그동안 반란군의 수장과도 만나 봤고 수도의 상황도 대충 살펴보고 왔습니다.”
“수장이 누군데?”
“군부대신이었던 베네딕 칼리프였습니다.”
“베네딕 그놈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나 참, 하고 많은 이들 중에 하필이면 베네딕이라니……”
난색을 표하는 반을 보며 헤글러가 물었다.
“베네딕 칼리프라는 자가 그렇게 대단한 자입니까?”
“사막의 무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놈이야. 실력 자체는 나보다 한 수 아래지만 놈이 사용하는 종교적인 힘이 좀 까다로워.”
반은 과거에 헨리를 따라서 샤하트라 정복 전쟁에 참여하였으니 베네딕의 성가심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현재 칸 왕족은 쇼난가에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반란군의 배후에 아서스 공작이 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뭐? 그게 사실이야?”
“칸과 제가 따로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목하는 인물이 같았습니다. 그러니 확실한 정보입니다.”
엄청난 사실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말했기에 그 충격은 배가되었다.
그러나 헨리는 계속해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아서스가 배후로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저희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입니다. 그것도 저와 칸 왕족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죠.”
“근데 그런 기밀을 우리한테 알려 줘도 되는 거야?”
“백작 놈들이라면 모를까, 앞으로 함께 움직여야 할 여러분들이라면 이 정도 비밀쯤은 공유해 둬야죠. 그리고 토벌이 시작되면 분명히 한 번 이상은 아서스 측 사람과 조우하게 될 텐데, 그때 가서 우왕좌왕할 순 없잖아요?”
“음, 그것도 일리가 있군.”
“그래서 말인데, 이번 토벌은 평범한 토벌로 안 끝날 것 같아서요. 분명히 정석대로 밀고 들어가면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결국엔 항복을 받아 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아서스가 변수로 개입되어 있으니 다른 방법을 좀 구사해 볼까 해요.”
“다른 방법? 하지만 샤하트라는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역이라 북동쪽의 샤하트라 협곡 외엔 들어갈 수 있는 입구도 없잖아?”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저희는 샤하트라 산맥을 한번 넘어 볼 생각입니다.”
“산맥을 넘는다고?”
“그렇습니다.”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는 말에 잠시간 눈을 반짝였지만 산맥을 넘는다는 말에 그는 다시금 실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현역이었던 시절에도 샤하트라 산맥은 절대로 넘지 못할 난공불락의 산맥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이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서라, 거긴 못 넘어.”
“왜 못 넘습니까?”
“거긴 다른 곳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산세가 험하고 산맥 특유의 마물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샤하트라의 제사장 놈들이 환술 결계까지 복잡하게 쳐 놔서 절대로 못 뚫고 들어가.”
“그래서 가는 겁니다.”
“뭐?”
“다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더더욱 산맥을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이라 여겼던 산맥을 이용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허를 찌를 수 있으니까요.”
“산맥을 넘으면? 정말 운이 좋아서 산맥을 넘었다 쳐도 겨우 우리 셋이서 무얼 할 수 있는데?”
“동쪽 오아시스인 샤하와 접촉해 볼 생각입니다.”
“샤하? 샤하라면 환술사들이 가장 많다는? 왜 하필 거기지?”
“칸의 말에 따르면 샤하는 아직까지 베네딕에 의해 함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샤하를 전초기지로 내세워 조금이라도 지리적인 이점을 취해야만 합니다.”
“좋다, 그럼 샤하와 접촉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다 치고 무슨 방법으로 산맥을 타 넘을 생각인데? 샤하트라 산맥은 돌아가신 대공조차도 어찌하지 못했던 곳인데?”
반의 말은 사실이었다.
환술은 마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
그렇기 때문에 전생의 헨리조차도 어찌할 수 없었던 거대한 장벽이 바로 제사장들의 환술 결계였다.
이에 헨리가 조용히 입꼬리를 당겨 올리며 말했다.
“해결책은 이미 구상해 두었습니다. 그러니 얼른 나갈 채비나 하시지요.”
이미 해결책을 구상해 두었다고 하니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헨리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 * *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쇼난 지방이었다.
헨리는 이번에도 텔레포트를 이용하여 며칠이나 걸릴 거리를 단숨에 도착해 내는 엄청난 기염을 토해 냈다.
그러나 오늘만 벌서 세 번째 텔레포트였다.
헨리는 급격하게 소모된 마력량에 어지러움을 느껴 잠시 동안 이마를 짚어 보였다.
‘이런 식으로 마력을 낭비하다간 평생 6서클은커녕 그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하겠군.’
물론 마도사 혼자서 여러 명을 이동시키는, 그것도 하루에 몇 번이나 텔레포트를 사용하는 경우는 이동학파 내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였다.
이 모든 것은 헨리였기에 가능했던 일.
하지만 아무리 헨리라고 한들 이런 식으로 마력을 낭비했다간 치명적이었다.
그렇기에 헨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명상을 통해 여분의 마력들을 모아 두었다.
헨리가 저택의 입구에 나타나자 경비단장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제는 완전히 위치가 역전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헨리는 자신의 힘으로 정당하게 가신이 된 것이었고, 그가 가신이 됨으로써 아이젠의 지독했던 히스테리 또한 막을 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헨리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베디칸에게 말했다.
“백작님께는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리지 마라. 금방 볼일만 보고 나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가시는 곳까지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마차는 곧 귀빈들을 모시는 귀빈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귀빈관에 도착한 헨리는 귀빈관의 위용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역시 쇼난가로군.’
과시를 좋아하는 아이젠답게 귀빈을 모시는 귀빈관은 응접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고 화려했다.
이윽고 헨리 일행이 귀빈관으로 들어서자 거실에 앉아 있던 헤라리온이 헨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헨리 공이 아닙니까? 여긴 어쩐 일입니까?”
“긴히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백작님 몰래 전하를 찾아왔습니다.”
“부탁요?”
“그렇습니다, 전하.”
“무슨 부탁인진 모르겠지만 헨리 공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감사합니다, 전하. 그래서 말인데…… 혹시 등산 좋아하십니까?”
“등산…… 말입니까?”
“예, 혹시 괜찮으시다면 비람 대제사장님도 저희와 같이 등산이나 좀 갔다 왔으면 싶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갑자기 등산은 무슨 일로?”
“가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갑작스레 등산을 제안하자 헤라리온은 조금은 당황하였으나 이내 거절하지 않고 동행키로 했다.
헨리의 제안을 거절하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순수하고 떳떳해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