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밀약 (3)
다음 날 아침.
간단한 아침 식사 이후 예정대로 다시 한 번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
헤라리온은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세 백작들에게 ‘샤하트라의 전력’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이로써 백작들은 헤라리온에게서 얻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각 군의 부족한 점들에 대한 보완에 나설 것이었다.
물론 그 정비 속에는 첫 임무 전에는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사막 기후에 대한 대비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헨리의 예상대로 아무도 칸 왕조를 돌보려 하지 않자 칸이 무안해하지 않도록 아이젠이 먼저 왕족들을 돌보겠다고 선언했다.
반대 의견은 없었다.
고작해야 도망친 왕족을 돌보는 일 따위는 공적으로 쳐주지도 않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계산적인 관계, 하지만 기존에 왕래가 없던 사이였던 만큼 섭섭해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났다.
회의가 끝난 직후 아이젠이 먼저 막사를 벗어났다.
그리고 헨리가 막사를 막 벗어나려던 순간,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던 오스카와 테리온이 막사를 벗어나려던 헨리를 불러세웠다.
“헨리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오스카 백작님?”
갑작스러운 부름, 이에 아이젠이 오지 않고 뭐 하고 있냐는 질문에 대충 핑계를 대고 완전히 몸을 돌려 오스카 앞에 섰다.
“듣자 하니 어제저녁에 우리를 대신하여 각 군의 병사들에게 얼음물과 음식들을 보급해 주었다고 들었다. 그게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라도 있는 것이더냐?”
“저는 백작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시치미 떼지 마라. 단순한 호의로 그만한 것들을 베풀기에는 그 양이 너무나도 많았다. 게다가 얼음은 귀한 것, 너는 대체 무슨 돈으로 그것들을 준비한 것이며, 무슨 생각으로 병사들에게 그것들을 지급한 것이지?”
하룻밤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 소식을 접한 듯싶었다.
게다가 분명히 아이젠의 이름으로 음식들을 배급했음에도 불구하고 헨리를 추궁한다는 것은 소문의 진위 여부까지 파악했다는 말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어쭙잖은 거짓말은 역효과를 일으키지.’
단언컨대 이들 또한 헤라리온만큼이나 아이젠에 대한 신뢰가 없는 듯했다.
그래서 헨리는 그냥 정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약간의 거짓을 첨가해서 말이다.
“처음부터 각 군의 병사들에게 지급할 생각으로 챙겨 온 것들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고? 대체 무엇 때문에?”
“사막을 처음 접하게 될 병사들의 고초를 달래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내 병사들의 사기를 왜 네가 신경 쓰느냔 말이다.”
“그것은 제가 용병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용병 출신이라고?”
“그렇습니다. 저는 아이젠 백작님의 가신이 되기 이전부터 밀리언 용병단이라는 작은 용병단을 운영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병사들의 기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막의 기후를 처음 접하게 될 병사들을 생각하여 보급품들을 미리 준비해 온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단순한 호의였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아무리 병사들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막대한 금액이 들었을 텐데 작은 용병단을 운영하면서 그만한 돈이 어디서 났다는 말이더냐?”
“그동안 모은 돈으로 얼추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저는 이제 쇼난가의 가신이 된 몸. 그러니 앞으로 먹고살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사비를 긁어모은 것뿐입니다.”
“너는 꼭 재물 욕심이 없는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그렇습니다. 저는 재물보다 명예와 충을 더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저번 회의 때도 저희 쇼난군이 베네딕을 만나고 오겠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재물 욕심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맞는 이야기였다.
헨리에게 있어 궁극적인 목적은 제국 최고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황제와 삼대가문에 대한 복수였으니까.
헨리가 자신의 가치관을 근거로 들며 논리정연하게 설명해 보이자 두 백작들의 얼굴에 복잡 미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욕심이 없는 놈이라니? 이걸 믿어야 하나, 흐음…….’
고민하는 두 백작.
이에 헨리가 말했다.
“그리고 좀 전의 회의에선 미처 말씀드리지 못하였으나 저는 이번에 주어진 재정비의 기간 동안 각 군의 군마들이 사용할 마법 편자들을 준비해 올 생각이었습니다.”
“마법 편자라면…… 그 쇼난군의 군마들이 착용했던 그 편자를 말하는 것이더냐?”
“그렇습니다.”
“됐다! 네가 아무리 병사들을 생각해도 그렇지 얼음보다 더 비싼 마법 편자를 그냥 받을 수는 없다. 이번에는 제대로 값을 치를 터이니 그 돈으로 편자를 마련하도록 해라.”
“정말 괜찮습니다. 저는 단지 정말 순수하게 이번 토벌이 성공하는 마음에서…….”
“어허, 되었대도!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를 고려한 것은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어제 보급한 얼음과 음식 값도 치러 줄 터이니 그리 알거라.”
‘그럼 나야 고맙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값을 지불하겠다고 하니 헨리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로 그냥 넙죽넙죽 받아먹는다면 그것 전부가 아이젠의 공적이 될 것이니까.
“두 분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필요하신 편자의 개수를 말씀해 주시면 다음 집결 때까지 물건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막사에서 조금만 기다리거라, 내 금방 군마의 수를 파악하여 사람을 보낼 터이니.”
“알겠습니다.”
일석이조였다. 중간에서 편마를 유통시켜 폭리를 취함은 물론이고, 주문받은 편자의 개수로 각 군의 전력들을 가늠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것을 지켜보던 칸이 소매로 입을 가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대단한 남자야.’
헨리의 영특함을 알았기에 칸의 눈에는 헨리의 술수가 훤히 보였다.
이윽고 두 백작과의 볼일을 마친 헨리는 칸과 함께 쇼난군의 막사로 복귀했다.
이윽고 쇼난군 막사에 도착했을 무렵, 아이젠이 물었다.
“뭐 하다 왔기에 이리 늦었느냐?”
“황궁으로 보낼 보고서를 서기관과 함께 수정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그래서, 보고서는 제대로 넘겨주었느냐?”
“그렇습니다.”
“잘하였다.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하자꾸나.”
“예, 알겠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아이젠은 여전히 쇼난군을 비롯한 각 군의 병사들이 얼음물과 식량을 배급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아직 소식을 접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관심이 없는 것이었다.
‘무능한 놈 같으니.’
그놈이 그놈이었지만 굳이 우열을 가리자면 다른 두 백작이 아이젠보다는 한참이나 나았다.
하지만 그만큼 아이젠이 무능했기에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윽고 각 군의 심부름꾼들이 헨리에게 쪽지를 전해 주었고 헨리는 아이젠과 약속했던 대로 쇼난 지방이 아닌 무슈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각자의 영지로 돌아간 두 백작은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엉덩이도 붙이지 않고 곧바로 사병 충원에 나섰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두 번 다시 대후작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제국군 사이에선 유래 없는 인사이동 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창병대와 궁병대의 사령관 직을 맡고 있는 두 백작들이 각자가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부당한 방법으로 사병들을 충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임슨, 넌 어떡할 셈이냐?”
“글쎄, 제국군 자리도 안전한 밥그릇이긴 한데 이번에 모집된 사병대 모집 요강을 보니까 조건들이 엄청나던데?”
“이번에 대백작 나리들께서 사활을 걸었다고 하잖아. 이번 토벌에서 가장 큰 공적을 세운 백작이 후작으로 승작한다면서?”
“그 정도라면 확실히 돈을 쏟아부을 만하네.”
“하긴, 대후작만 되면 그까짓 돈이 대수냐? 다른 작위도 아니고 무려 삼대가문의 일원이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도 삼대가문 소속 사병대가 되는 건가?”
“그렇지 않겠어? 이번에 게시된 모집 요강들을 보니까 정년 보장은 물론이고 자식들 교육도 시켜 준다던데?”
“기한이 사흘이랬지?”
“응, 기간이 짧은 만큼 정예 중의 정예만 뽑는다더라.”
“그럼 한번 지원이나 해 볼까?”
원래대로라면 제국군의 전력을 이탈시키고 병사들의 사기를 혼란시킨 죄를 물어야 했지만 확실히 권력의 힘은 거대했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대가문의 가주들임과 동시에 창병대와 궁병대의 최고 지휘권자가 지시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이젠은 다른 두 백작들과는 달리 추가적으로 병사들을 모집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헨리가 그러지 말라고 했으니까.
‘뭐, 이유가 다 있겠지.’
헨리의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는 아이젠이었다.
특히 이번 경우엔 헨리가 무슈로 떠나기 전에 다른 때보다도 훨씬 더 신신당부하고 간 일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손을 놓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병사의 수를 늘리지 않는 대신 기존의 병사들이 가진 장비를 교체해 주는 방향으로 전투력을 증강시키기로 했다.
그렇게 각 군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대대적인 전력 충원을 시작했다.
* * *
그리고 그날 밤.
하루 종일 직접 모집된 사병들의 심사를 행하던 오스카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택으로 돌아온 직후의 일이었다.
“백작님, 저택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이 시간에 손님이라니? 호든, 너는 내 허락도 없이 이 시간에 손님을 들인 것인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감히 제가 가진 권한으로는 그분의 방문을 거절키가 힘들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거절이 힘들었다고? 대체 누가 방문했기에?”
“아서스 대공작님이십니다.”
“……뭐?”
오스카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집사장인 호든이 거절하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웠는데 그 방문객이 다름 아닌 아서스 대공작이라니?
오스카가 놀란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물었다.
“호든, 난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니야.”
“……사실입니다. 조금 전에 도착하셔서 응접실에서 차를 드시고 계십니다.”
“……서두르도록 하지.”
생각지도 못한 귀빈의 방문에 오스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응접실에 도착했을 무렵, 호든이 말한 대로 정말로 아서스 대공작이 자신의 응접실에서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것도 모든 불을 끈 채, 달빛에 의존해서 말이다.
이에 오스카를 발견한 아서스가 말했다.
“이제 오시나요?”
“죄, 죄송합니다! 공작님께서 오시는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저택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것인데……!”
“아니에요. 아무런 기별도 없이 멋대로 찾아온 나의 잘못이지요. 아무튼 야밤에 소식도 없이 방문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언제든지 방문하셔도 됩니다!”
아서스 대공작.
하이랜더가의 가주이자 제국의 그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제국 최고의 권력자.
아서스는 하이랜더가 특유의 새하얀 피부와 눈부신 은빛 머리칼을 찰랑이며 오스카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였다.
분명히 생물학적 나이로는 진작에 쉰 살을 넘겼을 텐데도 아서스는 이십 대와 같은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조상 중에 엘프가 있다더니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군…….’
회의 때마다 보는 얼굴이었지만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미모였다.
게다가 저 젊은 외모는 각성 같은 환골탈태의 힘으로 얻어 낸 외모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하이랜더가의 핏줄이 칭송받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흡사 엘프를 연상케 하는 외모.
그 외모는 비단 아서스뿐만이 아니라 모드레드 경처럼 하이랜더의 성을 가진 집안 사람들 모두가 아서스처럼 눈부신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단독으로 아서스 공작을 마주한 것은 오스카 백작 또한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랬기에 오늘따라 더더욱 아서스 공작과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어색한 침묵.
이에 아서스가 봄처럼 따뜻한 미소와 함께 오스카에게 물었다.
“어떻게, 토벌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보고서에도 기재되어 있겠지만 예정대로 반란군을 토벌하고 칸에게 왕권을 되찾아 줄 생각입니다.”
“좋은 패기예요. 오스카 공 같은 사람이 있어서 제국민들은 오늘도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과찬이십니다!”
“후후, 겸손하기는. 그나저나 참 아쉽네요. 오스카 공 같은 사람이 내 곁에서 일해 준다면 참으로 좋을 텐데 말이죠.”
“……예에? 저는 지금도 자랑스러운 제국의 대가주로서 회의 때마다 최선을 다해 국정 운영에 힘을 쏟고 있는…….”
“후훗, 아니에요. 제 말은 대가문주가 아닌 ‘삼대가문주’로서의 제 옆자리를 말하는 거예요.”
“예? 그, 그게 무슨……?”
“후후,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해 본 말이었으니까. 사실 같은 대가문주의 등에 칼을 꽂은 사람이 삼대가문주가 된다는 건…… 보기가 좀 그렇잖아요?”
노골적인 메세지.
자신이 대백작이 된 이후, 단 한 번도 사적인 만남을 가지지 않았던 아서스가 저런 말을 한다. 그것도 야밤에 불쑥 찾아와서 자신을 앞에 두고서!
오스카는 지금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고, 공작님……!”
“후후, 내가 그만 실없는 소리를 했군요. 오늘은 그냥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얼굴이니 인사 차 방문해 본 것입니다. 그럼 종종 티타임이나 가지도록 하죠. 이 차, 처음 마셔 보는데 제법 맛있네요.”
환하게 내리쬐는 달빛 아래, 오스카를 바라보는 아서스의 미소는 한없이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