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96화 (96/522)

# 96

밀약 (1)

헤라리온에게 이목이 쏠렸다.

하지만 헤라리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듯, 그 막대한 시선들을 모두 태연스럽게 받아 내며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혹시, 라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라……라면 샤하트라 국민들이 믿는 유일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유일신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샤하트라에는 두 명의 신이 존재합니다. 태양과 함께 사막의 모든 것들 위로 군림하는 ‘라’와 죽음을 비롯한 사후 세계의 모든 것들을 관장하는 ‘야누스’가 있습니다.”

‘야누스?’

나름대로 샤하트라에 대해서는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야누스의 존재는 헨리도 난생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헤라리온의 말이 계속되었다.

“저희 샤하트라 민족은 라에게 선택받은 민족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저희 민족만이 지엄한 ‘라의 권능’을 빌려 올 수 있는데 이것을 달리 이야기하자면 태양신인 라뿐만이 아니라 죽음의 신인 야누스의 힘까지 빌려 올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뜬금없는 샤하트라 종교에 대한 이야기에 아이젠이 살짝 짜증을 내며 논점을 되짚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라리온은 살짝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혹시 베네딕이 왕의 증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왕의 증표…… 언급하긴 했지요. 하지만 왕의 증표라기보다는 라의 증표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말입니다. 하지만 샤하트라의 통치자는 왕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서 라의 증표뿐만이 아니라 야누스의 증표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야누스의 증표?”

“그렇습니다. 무신인 베네딕의 또 다른 이름은 ‘라의 검’. 그리고 저는 통치자로서 ‘라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야누스의 딸’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지요.”

“야누스의 딸? 그렇단 말씀은 전하께선 죽음의 신인 야누스의 권능까지 빌려 올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이 또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에 궁금함을 참지 못한 헨리가 아이젠을 대신하여 질문했다.

“야누스의 권능은 정확히 어떤 것들입니까?”

“왕가의 비밀이기에 모든 것을 말씀드릴 순 없지만 단적인 예를 한 가지 알려 드리자면 생물에 대한 ‘죽음의 박탈’이 가능합니다.”

“죽음의 박탈?”

“말 그대로입니다. 상대로부터 죽음의 권리를 빼앗아 영원히 죽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까? 달리 해석하자면 불사의 힘을 얻는 것인데요?”

“백 번 말씀드리는 것보다는 직접 한 번 보여 드리는 것이 낫겠군요. 혹시 남는 가축이 있다면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헤라리온의 요구에 오스카가 턱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회의장을 지키던 병사 하나가 식량조로 데리고 온 닭 한 마리의 모가지를 붙들고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꼬꼬꼬꼬!

파닥거리는 암탉.

그러나 병사의 강인한 완력에 깃털만 퍼덕거릴 뿐, 병사의 손아귀를 벗어날 순 없었다.

이에 헤라리온은 퍼덕거리는 닭의 모가지를 넘겨받은 후 조그마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Vudwja wha dhffuwntpdy.”

스스슷.

그때였다.

헤라리온이 주문을 외운 직후, 닭 모가지를 붙잡고 있던 손에서부터 어두컴컴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헨리의 동공이 보물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환희로 가득 찼다.

‘흑마법……!’

그것은 흑마법이 확실했다. 헨리는 갑작스러운 흑마법의 등장에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윽고 손에서 뿜어져 나온 시커먼 기운이 닭 모가지를 중심으로 닭 전체를 휘감아 삼키기 시작했다.

마치 꽃이 시드는 과정을 연상케 했다.

시커먼 기운에 잠식된 닭은 꽃이 시들듯이 몸을 축 늘어뜨렸고, 동시에 온몸의 깃털이 빠진 뒤 분홍빛이 감돌던 육신마저 미라가 된 것처럼 거무튀튀하게 쪼그라들었다.

툭.

그리고 그런 닭을, 헤라리온은 천천히 원탁 위에 올려 두었다.

꼬꼬꼬…….

그러나 놀랍게도 닭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숨이 붙어 있었다.

하나 말 그대로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이에 헤라리온이 말했다.

“이 닭은 이제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목이 잘려도, 불에 태워져도, 끓는 기름에 튀겨져도, 닭은 평생 동안 숨이 붙어 울음을 흘릴 것이며 오감이 살아 있는 채로 죽지도 못하고 고통 속에 몸부림칠 것입니다.”

꿀꺽.

모든 것을 잃은 채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

암탉의 비참한 최후를 확인한 모두가 끔찍한 야누스의 힘에 무거운 신음을 삼켰다.

“이것이 바로 야누스가 가진 권능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저희 칸 왕족은 이 야누스의 힘이 그릇된 곳에 쓰이지 못하게끔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이젠을 비롯한 헨리는 그제야 왜 베네딕이 칸 왕족 전체를 넘겨 달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라의 증표는 핑계였다.

베네딕은 라의 증표가 아닌 야누스의 권능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확실히 이런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제국군과도 붙어 볼 만하겠군.’

야누스의 권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아이젠은 헨리와 한번 시선을 교환한 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거…… 라의 증표는 순전한 핑계였군요.”

“베네딕은 저희 샤하트라가 제국의 속국이 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독립 전쟁을 주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의 의견은 빈번히 묵살되어 왔고 반대를 참지 못한 베네딕은 마침내 내란을 일으켜 왕권을 찬탈하였습니다.”

“혹시 그 과정에서 야누스의 권능을 이용하자고 주장하던가요?”

“그것에 대해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이로써 헤라리온은 베네딕처럼 공물의 양을 늘리겠다는 비굴한 조건 없이도 당당하게 토벌의 명분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동안 허송세월만 보낸 건 아니었군.’

그리고 그런 헤라리온을 보며 헨리는 기특함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흑마법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줄줄이 엮이는군.’

한동안 잊고 있었던 흑마법의 등장과 반란군의 배후로 짐작되는 아서스 공작의 등장.

이 정도라면 아이젠의 승작전은 이젠 거의 메인 디시가 아닌 디저트나 애피타이저 정도로 치부해도 될 정도였다.

‘한동안 바빠지겠어.’

헨리의 머릿속에 우선순위가 재배치되는 동안 회의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젠 베네딕이 감추고 있던 속내를 알게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토벌에 대한 가속도를 붙일 수 있게 되었다.

오스카 백작이 말했다.

“그럼 이제는 좋든 싫든 반란군을 토벌하는 쪽으로 일을 진행시켜야겠군요.”

“차라리 잘됐군. 그렇잖아도 베네딕 그놈이 건방 떠는 꼴을 보기 싫었는데 말이야. 그럼 사족은 이쯤에서 멈추기로 하고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토벌에 대한 방향을 짜 보도록 하지. 서기관은 오늘 내용을 정리해서 황궁에 올릴 보고서부터 작성하도록 하고.”

토벌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굳이 제국의 뜻을 베네딕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다.

괜히 쓸데없이 선전포고만 날렸다간 급습의 기회를 놓치게 될 테니까.

그리고 이제는 뜻을 완전히 굳혔으니 지금까지의 상황과 앞으로의 대략적인 계획들을 황궁에 보고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물론 그것은 내부에 첩자가 없을 때에나 취해야 하는 정석적인 일 처리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서스 공작이 반란군의 배후로 있을지도 모를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앞으로의 계획 같은 것들을 보고서로 올렸다간 전략을 노출시키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보고서에 올릴 양식이나 계획들은 제가 잘 정리하여 서기관에게 넘겨주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토벌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 모르니 최대한 유연하게 계획들을 짜 보겠습니다.”

“그럼 자네만 믿도록 하겠네.”

헨리는 서기관 대신 대답하며 펜을 놀리고 있던 서기관의 회의록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이윽고 아이젠이 말했다.

“밤이 깊었군.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오전 회의에서 결정하도록 하지.”

제법 진척이 있는 회의였다.

헨리는 혹시라도 병사들 사이에 나뉜 자신의 보급품에 대한 언급이 있을까 싶었으나, 역시나 백작들은 그에 대해선 조금도 알지 못하는 듯했다.

‘쯧쯧, 이런 놈들을 총사령관이라고.’

자신의 병사들이 무엇을 입고 먹는지도 모르는 지휘관들.

헨리는 그런 지휘관들의 무능함에 혀를 차며 막사를 벗어났다.

‘내일 있을 회의라고 해 봤자 황궁으로 보낼 보고서를 검토하는 것과 군의 재정비 기간을 정하는 것이 전부일 테지.’

그렇게 된다면 남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바로 토벌이 끝날 때까지 누가 왕족들을 보살피느냐는 것.

‘그런 귀찮은 일 따위,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겠지. 하지만 오히려 잘됐어. 다른 놈들이 데리고 있는 것보다 내가 데리고 있으면서 친분을 쌓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

다른 가문이라면 몰라도 전생의 헨리와는 인연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굳이 과거의 인연 때문이 아니더라도 야누스의 권능이 헨리의 흥미를 충분히 자극시켰다.

그 점만 놓고 보더라도 헨리가 칸을 돌보아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럼 이제 아이젠이나 구워삶으러 가 보실까?’

해야 할 일이 정해지자 헨리는 즉시 아이젠에게 왕족의 보호를 제안했다.

그러자 아이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왕족의 보호? 그 귀찮은 짓을 왜 우리가 해야 한단 말이냐?”

“단순한 문제입니다. 얼핏 보면 왕족의 보호 자체는 그리 득이 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으나 토벌이 끝난 후에 칸의 입김이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친절을 베풀어서 환심을 사자는 것이더냐?”

“그렇습니다.”

“흠, 내 성격상 내키지는 않지만 네가 그리하자니 그리하도록 하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족을 보살피는 것 또한 제가 전담하도록 하겠습니다. 백작님께선 그저 곧 벌어질 토벌에만 신경 써 주십시오.”

“이번에는 내가 무엇을 준비하면 되겠느냐?”

“그것 또한 이미 계획을 마쳤습니다. 제가 방법을 알려 드릴 테니 그대로만 준비해 주십시오.”

“역시 한 점 나무랄 데가 없구나. 그동안 나와 함께 움직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텐데 어찌 이리 기특한 건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백작님, 내일 회의 후에 군을 재정비해야 할 텐데 그동안 저는 다른 것들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또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단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다른 군에게 지급해야 할 마법 편자도 추가로 확보해야 하고, 토벌이 장기전이 될지도 모르니 그에 대한 준비도 해야 해서 그렇습니다.”

“다른 놈들 건 굳이 준비할 필요가 있느냐? 어차피 경쟁해야 할 사이라면 편자 같은 작은 격차라도 늘려야 하지 않겠느냐?”

“결국 토벌에 성공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백작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번 한 번만 헤아려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백작님은 곧 다른 두 백작들을 호령해야 할 후작이 되실 분이 아닙니까?”

“네 말이 맞다. 나 같은 사람이 아랫놈들한테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흠흠, 그건 그렇고 편잣값은 있느냐?”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실 이번에 사용된 편자 또한 쇼난가의 이름으로 외상을 달아 두었습니다.”

“잘하였다. 너는 쇼난가의 하나뿐인 가신이다. 그러니 언제든지 쇼난의 이름을 내세워 가지고 싶은 것들을 취하면 된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하지만 제가 백작님의 재산을 사용한 만큼 반드시 그만한 것들로 빈자리를 메꾸어 놓도록 하겠습니다.”

“크크크, 역시 너다운 대답이구나. 부담가지지 않아도 되니 네 마음대로 뜻을 펼치거라.”

“감사합니다, 백작님.”

사실 무슈에서 제작한 마법 편자들은 은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며 불카누스가 선물로 준 것들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쇼난가의 이름으로 외상을 달아 둔 것은 없는 셈.

하지만 외상이 있다고 보고하였으니 불카누스와 입을 맞추어 중간에서 차익을 챙기면 될 일이었다.

또한 이번 기회에 마법 편자에 대한 중요성을 다른 군에게 제대로 홍보해 두었으니 추가로 마법 편자를 확보하여 그 사이에서 폭리를 취할 생각이었다.

‘다들 공적에 혈안이 되어 있을 테니 이 정도 소비는 투자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돈을 내겠지.’

이밖에도 헨리는 소모한 얼음물을 보충하고 장기전이 될지도 모를 토벌에 대비하여 각종 대비책들을 준비하여야만 했다.

* * *

밤이 깊었다.

아이젠과의 개인 회의를 마친 헨리가 아이젠의 막사에서 나온 순간이었다.

‘음?’

휘오오오.

협곡 사이를 파고드는 거친 바람 소리가 귓속을 후벼 팠다.

하지만 귓전에 들리는 바람 소리에 비해 눈앞의 것들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부자연스러운 조화였다.

그러나 그 순간, 헨리는 눈앞의 풍경들이 소용돌이치듯 회전하는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건…….”

풍경이 일그러지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헨리는 이러한 현상을 과거에도 본 적이 있었다.

‘환술이군.’

쇼난군의 천막으로 가득했던 눈앞이 어느새 샤하트라 협곡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암벽으로 뒤바뀌었다.

휘오오오오.

다시금 휘몰아치는 바람.

바람은 협곡 사이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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