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사막으로 (4)
‘전쟁의 기본은 정보전이지.’
왕궁을 벗어나기 직전, 헨리는 클레버를 허공으로 분사시켜 베네딕을 감시할 것을 명령했다.
물론 대화가 끝난 직후, 헨리는 쇼난군과 함께 곧바로 말을 몰아 왕궁에서 멀리 떨어졌다.
이유도 없이 괜히 왕궁 근처를 서성였다간 사막의 눈을 사용하는 베네딕에게 발각될 것이 뻔했으니까.
그래서 헨리는 물자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수도를 돌며 복귀하는 동안 사용할 이동 물자들을 보급받았다.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뿌려 두었던 첩자는 헨리의 예상대로 큼지막한 건더기 하나를 물고서 개선장군처럼 자신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클레버에게 헨리는 감각 공유를 사용해 클레버가 보고 들은 것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하, 이놈들 봐라?’
모드레드 하이랜더.
그는 제국에서 여섯 번째로 강하다는 제국 육검의 자리에 군림하고 있는 하이랜더 가문의 기사였다.
‘왜 갑자기 내란을 일으켰나 했더니 배후에 아서스 그놈이 있을 줄은 몰랐군.’
하이랜더가의 가주, 아서스 하이랜더 공작.
그는 제국 유일의 대공작이자 삼대가문을 조직하고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제국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런 대권력가의 기사가, 그것도 토벌군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몰래 토벌 지역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어떻게든 반란군과 연관이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아쉽군.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놔둘 걸 그랬어.’
혹시 모를 정보를 갈취하기 위해 클레버를 뿌려 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월척이 잡혀 버렸다.
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클레버를 침투시키기엔 이미 왕궁을 벗어나서 불가능에 가까웠다.
모든 왕궁에는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는 마법 결계가 작용하고 있었으니까.
헨리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어쩔 수 없이 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 *
지휘 본부.
임시로 터를 잡은 곳이긴 했지만 결국 전초기지가 될 곳은 북동쪽에 위치한 샤하트라 협곡의 입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샤하트라 사막은 특이하게도 분지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런 사막으로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 바로 북동쪽에 일직선으로 나 있는 샤하트라 협곡이었기 때문이다.
협곡을 벗어나자, 곧 모래투성이었던 바닥이 단단한 흙바닥으로 변하면서 제국 특유의 영토가 드러났다.
이윽고 지휘 본부로 진입한 순간이었다.
“아이고, 죽겠다…….”
“물, 물 있는 사람?”
“야, 야, 여기 말 좀 봐! 말 넘어간다!”
본부에는 이미 두 백작의 사병들이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재출정을 할 수 있는 쇼난군과는 달리 에이지군과 팔콘군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헉헉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병사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임시로 준비한 것들로는 샤하트라 사막의 지독함을 견뎌 낼 순 없었겠지.’
척 봐도 말들의 숫자가 줄어 있는 것이, 이동 중에 일사병으로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헨리는 고통받는 병사들을 보며 두 백작의 무능함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에 헨리가 아이젠에게 말했다.
“백작님, 죄송하지만 저녁 회의가 있기 전에 잠시만 병사들을 좀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우리 군을 말이더냐?”
“그냥 전체적으로 사기가 좋지 못한 것 같아 한번 둘러보려고 합니다.”
“편한 대로 하거라. 그럼 난 그동안 막사에서 쉬고 있겠다.”
“알겠습니다.”
임무도 무사히 완수했으니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에 헨리는 쇼난군을 비롯한 나머지 사병들 전체가 들을 수 있도록 목청껏 소리쳤다.
“모두들 주목!”
“주목!”
헨리의 부름에 대답한 것은 쇼난군뿐이었다. 나머지 두 군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약간의 관심을 보일 뿐, 주의 깊게 듣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이번뿐일 테니까.
이어서 헨리가 말했다.
“각 군의 십장들은 모두 내 앞으로 집합!”
“집하압!”
행동이 가장 빠른 것은 역시 쇼난군이었다.
쇼난군 십장들이 헨리에게 가지는 신뢰도가 마법 편자로 인해 이미 아이젠만큼이나 하늘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다른 군의 십장들은 조금 망설이는 듯 보였다.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제국군 소속이 아닌 백작의 사병대.
그렇다 보니 자신의 상관인 ‘가주’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명령을 들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부 똑똑한 십장들은 자신들의 주인과 아이젠의 권력 차이를 알았기에 뒤늦게나마 헨리 앞으로 집합했다.
그렇게 알음알음 눈치들이 작용하여 이윽고 모든 군의 십장들이 집합할 수 있었다.
이에 헨리는 정렬된 십장들 앞에서 아공간 주머니라고 속여 둔 큼지막한 자루 하나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모두 고생들 많았다. 곧 있으면 저녁 식사가 시작될 테니 오늘 하루는 편히 쉬도록 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나누어 줄 것은 아이젠 백작님께서 너희들에게 특별히 하사하시는 것이니 백작님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먹도록!”
외침과 동시에 헨리는 체스트 속에 저장해 두었던 깨끗하고 시원한 얼음물들과 각종 음식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물론 아이젠은 이러한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이것은 순전히 헨리가 사비를 들여 구매한 것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젠의 하사품이라 말한 까닭은 아이젠의 위신이 곧 자신의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며칠간 헨리와 함께했던 십장들은 이것이 아이젠의 하사품이 아닌 헨리의 은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젠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피로를 달래 준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이렇게 아이젠에게 공을 돌려도 결국 그 존경심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헨리 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헨리 님,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백작님께서 하사하신 것이다.”
“후후, 당연합죠. 감히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쇼난군의 십장들이 작은 목소리로 헨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할 때마다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한편, 익숙한 모양새로 하사품들을 받아 드는 쇼난군을 보며 다른 군의 십장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군의 백작이, 그것도 수백에 달하는 병사들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본 쇼난군의 십장 한 명이 멍청하게 보고만 있는 다른 군의 십장에게 충고하듯이 말했다.
“멍청아! 이건 전부 헨리 님께서 하사하시는 음식들이야. 얼른 가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린 뒤에 냉큼 받아 와.”
“뭐라고? 하지만 방금 전에는 분명히 아이젠 백작님께서 하사하신 거라고…….”
“멍청아, 당연히 백작님을 위해 헌신하시는 거지. 나도 처음엔 몰랐는데 이번 사막 출정을 위해 정말 많은 준비를 하셨더라. 그러니 그냥 아이젠 백작님 만세나 외치고 가서 헨리 님께 따로 감사 인사나 드려.”
“그, 그래? 알겠어, 그럼!”
경쟁 관계이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백작들만의 눈치싸움.
그렇기 때문에 아직 토벌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병대들끼리 사이가 좋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쇼난군 십장들에 의해 이번 하사품의 진실을 알게 된 다른 십장들은 뒤늦게 헨리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얼음물과 식량들을 배급받아 갔다.
“감사합니다, 헨리 님!”
“그래그래, 가서 조원들이랑 넉넉하게 나눠 먹고 편히 쉬도록 해. 다음 출정 전까지는 확실하게 준비하도록 하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헨리 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며칠간 최소한의 물, 그것도 미지근하기 짝이 없는 물들로 타는 목마름을 견뎌 온 이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가 나누어 준 얼음물은 그야말로 신의 은총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조원들의 건강을 책임져야 했던 십장들은 헨리의 호화로운 보급품들 덕분에 이제야 드디어 죄책감을 덜 수 있게 되었다.
순식간에 달아오른 분위기.
헨리의 보급품은 지친 병사들에게 있어 그야말로 꿀맛 같은 은혜였다.
‘역시 병사들 구슬리는 데에는 먹을 것만한 게 없지.’
수백에 달하는 병사들을 먹이기 위해 꽤 많은 얼음물과 음식들을 소모했다.
특히 귀한 얼음을 수백에 달하는 병사들에게 돌렸으니 지출 또한 막대했을 터.
하지만 헨리에겐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재능과 얼음을 다룰 줄 아는 엘라곤이 있었다.
그렇기에 실질적인 소비의 대부분은 음식을 사는 것에서 그쳤다.
‘이 정도면 됐겠지.’
당분간 함께 지내야 할 병사들의 신뢰를 얼마간의 음식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비싼 대가가 아니었다.
게다가 돈이라면 헨리에게 있어 썩어 넘치도록 있는 것.
특히 이번에 보급된 음식들의 대부분은 오베르의 은닉 재산으로 구입한 것들이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땡전 한 푼 들이지 않고 병사들의 사기와 신뢰를 얻어 낸 것이었다.
이윽고 백작과 함께 휴식을 취하던 헨리는 저녁 식사 이후에 모집된 수뇌부 회의에 참석했다.
* * *
각자 배정된 임무를 마치고 처음으로 소집된 회의.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모두들 각자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고 모인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딱딱함이 감도는 이유는 회의장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헤라리온 칸 3세입니다.”
새로이 회의에 참석한 인물은 칸의 눈에서 구출한 샤하트라의 도망친 왕이었다.
그는 구릿빛 피부와 찰랑거리는 흑발, 그리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금색 눈동자와 길쭉하고 탄탄한 체격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보통의 사막 남자들과 비교하자면 약간은 야리야리한 체격에 속해 있었다.
“쇼난가의 아이젠이라고 합니다.”
헤라리온의 말에, 아이젠은 그제야 자신을 소개했다.
이윽고 아이젠이 서기관이 작성한 보고서를 읽으며 말했다.
“친위대는 따로 없는 듯하고…… 도망친 왕족은 여기 있는 분들이 전부입니까?”
“그렇습니다.”
“하긴 친위대야 뭐, 시간을 끌었어야 했을 테니까 있으나 마나겠군. 그럼 사설은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젠은 경어를 사용하는 듯했지만 헤라리온을 완전히 존중하지는 않았다.
헤라리온 칸 3세는 어디까지나 속국의 왕. 위치만 놓고 보더라도 아이젠이 훨씬 위였다.
‘게다가 지금은 왕권을 찬탈당한, 힘없는 왕이기도 하고.’
헨리는 왠지 모르게 어깨가 처져 보이는 칸을 보며 혀를 찼다.
‘여전히 아비와는 영 딴판이로군. 베네딕이 내란을 일으킬 만도 해.’
헤라리온 칸 3세의 아버지 헤라볼라 칸 2세.
그는 베네딕이 무신이 되기 이전에 사막을 주름잡았던 바로 전대의 무신이었다.
그는 베네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인물로, 네 오아시스를 최초로 통일시키고 샤하트라를 건국한 인물이기도 했다.
태평성대였다.
절대적인 무신이었던 헤라볼라는 강력한 무력뿐만이 아니라 현명하고 어진 정치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이름 모를 병마로 명을 달리하고 말았고, 그의 외동아들이었던 헤라리온이 왕권을 승계받았는데, 그가 왕권을 쥐고 얼마 되지 않아 헨리의 통일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윽고 아이젠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테리온과 오스카 백작이 전하를 모시러 간 사이에 저는 반란군의 수장인 베네딕 칼리프를 만나고 왔습니다.”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베네딕이 말하길, 전하를 비롯한 현재의 왕조들만 온전히 넘겨준다면 베네딕은 평소보다 두 배 이상의 공물을 바치겠다고 저에게 약조하였습니다.”
“그렇군요.”
“생각보다 담담한 반응이시군요. 전하께선 별로 절박함이 없으신가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저는 베네딕이 거짓으로 백작을 현혹하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반응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거짓이라니요?”
“현재 샤하트라의 재정으로는 두 배는커녕 1.5배 이상의 공물도 보내기가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배의 공물을 제시했다는 것은 그게 백작을 우롱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그것보다 백작,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베네딕이 나를 넘겨 달라고 했는지 말입니다.”
‘허, 이놈 좀 보게?’
생각지도 못한 날카로운 모습.
유약했던 과거의 모습과는 달리, 제법 국왕다운 면모로 아이젠을 상대하는 헤라리온을 보며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녀석, 그동안 잔뼈가 좀 굵어졌나 보군. 그럼 어디,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한번 들어나 보실까?’
이에 원탁에 둘러앉은 모든 이의 이목이 헤라리온에게로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