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변수 (5)
투둑, 뚝.
팔뚝을 그어 내자 곧 헨리의 붉은 피가 팔뚝을 따라 떨어지며 그릇 안으로 고이기 시작했다.
이독제독을 위한 독과 해독제로 쓰일 피까지 뽑아내야 하니 제법 많은 양의 피가 필요했다.
‘이만하면 됐겠지.’
충분한 양의 피가 그릇에 잔뜩 고였다.
헨리는 이윽고 그것을 2개의 그릇에 나누어 담은 뒤 그것들을 들고 불카누스의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무죽죽하게 죽어 가는 불카누스.
그는 열흘간 음식도 채 제대로 먹지 못해 앙상하게 여위어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의심은 없다.
이독제독의 치료법은 마탑에서도 이미 충분히 검증된 치료법.
더불어 그 치료법의 최종 승인을 마친 사람이 바로 헨리였기 때문에 실패란 있을 수가 없었다.
다만 헨리의 피가 가지는 독성은 다른 맹독들에 비해 차원이 다른 강력함을 가지고 있었기에, 얼마만큼 시간을 잘 맞추어 해독하는지가 관건이었다.
헨리가 불카누스에게 자신의 피를 먹이기 전, 먼저 피가 담긴 2개의 그릇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웅.
마력을 이용한 염력.
쉬워 보이지만 액체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시키며 깔끔하게 허공에 띄워 내는 꽤나 고난이도의 마법이었다.
이윽고 그릇에 담겨 있는 두 그릇의 핏물이 허공으로 떠올라 매끈한 구체의 형상을 띄웠다.
“가열.”
푸스스…….
이윽고 헨리는 한쪽 핏물을 가열하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가열되는 핏물 한 덩이.
헨리는 뜨끈뜨끈하게 가열되기 시작하는 해독제를 뒤로하고, 우선 가열되지 않은 핏물부터 불카누스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우브읍…….”
“고통스러울 겁니다.”
아프다고 해서 눈과 귀가 닫힌 것이 아니었다.
헨리는 작은 경고와 함께 퉁퉁 부은 불카누스의 입술을 벌려 그 사이로 자신의 피를 조금씩 흘려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허공에 떠오른 핏물 한 덩이를 입안에 모두 밀어 넣자 시름시름 앓고만 있던 불카누스가 전에 없던 격렬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크헉! 크허어억!”
무려 최상위급 독 마족, 베놈의 맹독이었다.
인간계의 독과는 차원이 다른 맹독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이미 기력이 쇠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비틀며 괴로움을 표하기 시작했다.
“크악! 크아아아!”
몹시 고통스러울 것이다.
초인의 경지에 다다른 중상급 소드 마스터도 순식간에 사망했던 독이니까.
불카누스의 온몸이 뒤틀릴수록 그것을 지켜보던 반과 헤글러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헨리만큼은 인내심을 가지고 불카누스의 고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불카누스의 모든 구멍에서 조금씩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 순간, 헨리는 허공에서 뜨겁게 가열 중이던 자신의 혈액을 불카누스의 입안으로 곧장 밀어 넣었다.
치이익……!
“크아아라라락!”
목구멍에 강제로 넘어가는 소리.
화상을 입을 만큼 뜨겁게 가열된 혈액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베놈의 맹독은 어떠한 방법이든지 섭취자에게 고통을 주게끔 만들어진 것이니까.
“크아…… 크어어…… 크허어억…….”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신음이 조금씩 줄어들어 갔다. 베놈의 독이 중화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한참 뒤, 마침내 불카누스의 입에서 신음이 멎어들었을 때쯤이었다.
“기절했군.”
열흘이 넘도록 합성 독과 사투를 벌였다. 거기에다 마지막에는 지상 최악의 독과 마주하고 끓는 혈액을 통째로 삼켜야만 했으니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이어서 헨리는 품속에서 비상용으로 들고 다니는 최상급 힐링 포션을 꺼내 마개를 열었다.
“힐링 포션?”
“적어도 화상 자국은 지워야 하니까요.”
몰래 치료를 감행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질책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몹시 끔찍했으니 질책을 덜기 위해서라도 화상 자국을 지워야만 했다.
헨리는 그릇에 담긴 핏물에게 그랬던 것처럼 힐링 포션 또한 똑같은 방법으로 불카누스의 입에 흘려 넣기 시작했다.
스스스슷…….
포션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화상이 치유되면서 새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숨을 죽이고 불카누스가 회복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과연 최상급 힐링 포션이었다.
화상으로 번진 피부가 아물고 벌겋게 익은 구강 내부와 식도 등이 말끔히 치료되었기 때문이다.
“단장님, 피부가……!”
“알고 있어.”
그리고 동시에 거멓게 죽어 있던 불카누스의 피부 또한 원래의 색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됐다……!’
중화에 완전히 성공했다는 증거였다.
헨리는 한참이나 더 경과를 지켜본 후 불카누스의 몸속에 독이 완전히 제거된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릇을 포함한 잡기구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클린.”
반짝!
그리고 피가 묻은 시트지를 포함하여 이불과 의복을 말끔하게 세탁하는 것으로, 헨리는 치료 과정을 완전히 끝마쳤다.
“끝난 거냐?”
“거의요.”
그러나 치료가 끝났다고 해서 완전히 마무리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헨리는 이윽고 품속에서 처음 보는 종류의 물약 한 병을 꺼내 들었다.
“그건 뭐냐?”
“제가 만든 특제 기력 회복 포션입니다.”
“기력 회복 포션?”
“좀 잔인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희들은 곧 토벌을 떠나야 할 몸. 그런데 불카누스가 체력 회복을 위한 요양을 시작한다면, 어쩌면 토벌이 끝날 때까지 콜트아이언제 장비는 꿈도 못 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먹여서 강제로 기력을 회복시키겠다고?”
“그렇습니다.”
“그건 너무 잔인한 선택 아니냐?”
“스승님의 제조법으로 만든 것이니 부작용도 없고 효과도 확실합니다. 더불어 이 한 병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재료를 소비했는지 모릅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 알겠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은 곧 고개를 내저으며 포기한다는 듯이 양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리고 헨리는 옅은 미소와 함께 기력 회복 포션을 불카누스의 입으로 흘려 넣기 시작했다.
“이제 됐습니다. 헤글러, 가서 비훔 비서관님 좀 모셔 와.”
“알겠습니다.”
치료는 이것으로 완전히 끝났다.
그리고 얼마 뒤, 치료가 끝났다는 말을 들은 비훔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의사들과 함께 병실로 들어왔다.
“헨리 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치료가 끝났다니요?”
“죄송합니다, 비서관님. 제가 시장님을 진찰하는 과정에서 시장님이 갑작스레 발작을 일으키시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희 동의도 없이 멋대로 그런 시도를 하시면 어떡합니까? 그러다가 시장님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요?”
나름대로 화를 절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헨리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불카누스의 상태를 살피던 무슈의 의사들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동요하기 시작했다.
“어, 어? 이럴 리가 없는데?”
“내 눈이 잘못된 건가?”
“맞지? 이거 분명히…….”
의사들의 놀란 기색에 뒤늦게 비훔 비서관도 사태 파악을 위해 불카누스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순간, 쥐 죽은 듯이 잠자고 있던 불카누스가 눈을 번쩍 떴다.
“어, 어!”
“시, 시장님!”
“시장님께서 깨어나셨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나는 사람들.
이에 불카누스는 눈을 뜬 것도 모자라 상체를 벌떡 일으켜 병실 안의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여긴 헤임인가?”
“아, 아닙니다. 시장님. 여긴 무슈입니다.”
“헤임이 아니라고……?”
헤임.
무슈인들이 믿는 일종의 사후 세계였다.
무슈인들은 자신들이 죽으면 축복의 땅, 헤임으로 간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멍한 표정의 불카누스.
이윽고 그가 침대에서 벗어나려 하자 의사들과 비서관이 달려들어 그의 거동을 막아 세웠다.
“시, 시장님!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기력을 좀 더 회복하신 뒤에……!”
“아냐,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마치 겨울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이토록 몸이 가뿐했던 적이 없어.”
“시, 시장님!”
말리거나 말거나, 불카누스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곧 침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헨리에게 다가가 말했다.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제 목숨을 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 잠이 좀 깨셨나 보군요.”
“아까는 잠시 추태를 보였습니다. 며칠이나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다 보니 보이는 게 보이는 것이 아니고 들리는 게 들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제 은인이란 것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시장님 같은 인재를 잃는 것이야말로 제국에게는 큰 손실입니다. 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제국? 실례지만 성함이……?”
“헨리 모리스라고 합니다. 지금은 쇼난 대가문의 가신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헨리 모리스!”
헨리라는 이름과 쇼난 대가문. 각자 상반된 의미가 하나의 사람에게 담겨 있자 그의 눈에 잠시 동안 놀라움이 어렸다.
하지만 이내 곧 불카누스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굽히며 예를 갖추었다.
“……이거 쇼난 대가문에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헨리 공.”
“아닙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시지요.”
고르바 불카누스 시장의 깍듯한 태도.
그 압도적인 감사의 태도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헨리에게 이견을 붙일 수가 없었다.
* * *
의사들과 비서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불카누스는 한사코 추가 치료를 거절했다.
그리고 헨리와 불카누스는 헨리의 요청대로 집무실에서 은밀한 독대를 이룰 수 있었다.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시장님.”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생명의 은인의 부탁인데 어찌 모른 척할 수가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본론을 언급하기에 앞서, 헨리는 눈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 다음 천천히 용건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먼저, 지금부터 드릴 말씀 전부는 철저하게 비밀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심지어 백작님에게도 말입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으시겠지요.”
“감사합니다.”
그는 입이 무거운 무슈인들답게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그 덕분에 헨리는 한결 더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사실 제가 오늘 무슈에 방문한 이유는 개인적인 의뢰 때문입니다.”
“의뢰라면 혹시……?”
“그렇습니다. 저에겐 지금 3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순수한 콜트아이언이 있습니다.”
“으음, 3백 킬로그램이라……. 혹시 쇼난 가문의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무도 모르는 저만의 것입니다.”
“허허, 콜트아이언이라……. 알겠습니다. 그럼 콜트아이언 3백 킬로그램으로 저에게 무엇을 의뢰하고 싶으신 겁니까?”
“검사 세 사람분의 모든 장비를 원합니다.”
“검사 세 사람요?”
“그렇습니다. 곧 있으면 쇼난가에서 거사를 치러야 하는데 그때 운용될 별동대의 장비가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아,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순전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함이니까요.”
“……제가 앓아누운 사이에 시국이 많이 혼란스러워졌군요.”
“어차피 시장님께선 입이 무거우신 것을 알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은인이라고는 하나, 시장님 같은 분은 마땅한 명분이 없다면 이러한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는 분이시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존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무튼, 세 명분의 풀 세트라면 빠른 시일 내에 제작이 가능합니다.”
“역시 마스터피스 5회 연속 우승자다우시군요. 든든합니다.”
“이 정도는 기본이죠. 그럼 용건은 이것으로 끝입니까?”
“원래는 이것으로 끝내려고 하였으나 우연찮게 시장님의 사정을 듣게 되어서 사적인 용건을 좀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제 사정에 따른 용건의 추가라……. 이거 좀, 흥미가 당기는군요.”
“분명히 흥미로운 제안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장님, 전에 만드시다가 실패하신 독금. 완벽하게 성공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당연히 성공하고 싶습니다. 그것만 완성되면 이번 연도 마스터피스는 제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가만……. 헨리 님, 설마?”
“그렇습니다. 그 독금, 제가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게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독금의 완성.
그 한마디에 불카누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