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덤 (3)
“이놈들도 바이퍼 기사단이군요.”
다음 날, 시체들의 몸에 새겨진 더블 스네이크를 확인한 번트가 말했다.
전날, 반은 약속했던 대로 술이 식기 전에 돌아와 마저 잔을 나누었고 반의 위용을 확인한 병사들은 조용히 시체들을 거두어 한쪽 구석에 모아 두었다.
“맞습니다. 헨리가 그때 한 놈을 놓쳤다고 했으니 아마도 이놈들은 그 후발대, 그러니까 수습하기 위한 수습대 정도로 보입니다.”
반은 다음 날 아침에 번트가 술에서 깰 때쯤, 그제야 어제저녁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시체의 그려진 심벌을 확인한 번트가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반 경,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단지 제가 술이 깨어 있었으니 다행인 게지요.”
수문장이라는 별명이 무색하리만치 부끄러운 추태를 보였다.
번트가 부끄러움에 고개를 쉬이 들지 못하자 반이 그의 민망함을 덜어 주기 위해 얼른 화제를 전환시켰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나 빨리 수습대가 도착했다는 건 아직 아이젠 백작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겠군요.”
이에 번트가 헛기침을 해 보이며 대답했다.
“흠흠, 시간을 대충 계산해 보면 아직 아이젠 백작이 고발령을 소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오히려 초조하게 될 쪽은 오베르 쪽일 테지요.”
“오베르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만약 아이젠이 바이퍼 기사단의 시체와 문케를 내세워 오베르를 겁박하더라도 이번 수습대를 통해 살게라 자체를 지워 버리기만 한다면 그까짓 증거쯤은 얼마든지 부정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오베르 후작이 이놈들의 보고를 받지 못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겠군요.”
“가장 이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보고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무모한 도박을 할 리는 없을 테니까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객기를 부렸다간 오히려 더 큰 역풍을 맞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살모라는 ‘반’이라는 변수를 예상하지 못해 고발령이 소집되기 직전까지 끝끝내 오베르에게 보고서를 올리지 못했다.
“그럼 이놈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일 것 같습니까?”
이에 반이 질문하자 번트가 얼마간 고민했다. 그리고 금방 대답을 내놓았다.
“제 생각엔 이놈들도 아이젠 백작한테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놈들도 말입니까?”
“몸뚱아리에 뱀 문신이 이렇게 떡하니 박혀 있는 데다가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제가 증언까지 확실하게 해 준다면 오베르 후작을 한 번 더 공격할 수 있는 완벽한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럼 번트 경이 말씀하신 대로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뜻하지 않게 반이 살모라의 수습대를 쓸어 준 덕분에 오베르를 한 번 더 저격할 수 있는 여분의 화살이 생겼다.
그런데 이때, 사소한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음…… 그런데 말입니다, 번트 경. 그럼 이놈들은 번트 경께서 직접 아이젠 백작한테 인계하시는 겁니까? 아시다시피 저는 아이젠에게 얼굴을 내밀기가 좀 그래서…….”
“아! 제가 미처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했군요. 근데 사실 제가 인계해도 되긴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수도에 보조 인력을 요청한 다음에야 움직일 수가 있어서 시간이 꽤 걸릴 것입니다.”
수도에서 살게라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다.
게다가 보조 인력을 요청하고 그들을 살게라까지 불러들인 후, 다시 아이젠 백작에게까지 가는 거리를 가정한다면 상상 이상의 시간들이 낭비되었다.
이에 반이 얼마간 고민하던 끝에 말했다.
“그럼 말입니다, 번트 경. 번트 경께서 직접 인계하시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차라리 제가 이놈들을 데리고 가서 헨리에게 맡기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번에도 헨리 경에게 맡기자고요?”
“그렇습니다. 번트 경이 직접 하시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제가 나서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그래도 한 번쯤은 안면을 튼 헨리가 진행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편이 시간도 훨씬 절약될 것 같고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선택지가 달리 없군요. 지금쯤이면 헨리 경도 아이젠 백작을 만나 인계를 끝마쳤을 겁니다. 그럼 빈 마차 한 대를 내드릴 테니 거기에 저놈들을 싣고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참, 그런데 말입니다. 반 경.”
“예?”
“추방민들은…… 정말 보고 가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가 간다고 한들 해 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그저 잘 있다는 소식 한 줄이면 저는 만족합니다.”
“알겠습니다…….”
반은 헨리를 모시던 기사였고 남은 추방민들은 헨리가 마지막까지 보살피던 사람들이었기에 물은 것이었다.
하지만 반의 괜찮다는 말에 번트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이에 반이 약간의 미소를 띠며 번트의 이름을 불렀다.
“번트 경.”
“예?”
“우리, 조금만 더 힘냅시다.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겁니다.”
헨리가 죽고 난 뒤, 두 사람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하늘을 쳐다보며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이제는 희망이 조금 생긴 것 같기도 했다. 반이 번트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진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반의 얼굴에 희망이 깃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두 번째 증거를 실은 마차가 비발디 타운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황제는 미안한 마음에 황궁에서 제일가는 사제를 불러다가 오베르를 치료해 주었다.
그 덕분에 겨드랑이까지 찢어진 상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완치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베르의 자존심은 그렇지 못했다.
‘으득, 이 건방진 새끼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던가?
능력이 부족하여 후작 자리에도 못 오른 주제에 이런 식으로 망신살을 뻗치게 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거지?’
황제가 추방민들에게 보급품을 내리라고 명령한 건 국정 회의 때의 명령이니 아이젠 또한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잠자코 있다가 갑작스럽게 이리 뒤통수를 치니 미처 대피할 틈도 없이 당하고 말았다.
분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황제에게 칼을 찔리고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보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그 멍청한 아이젠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후작님.”
이에 살모라가 허리를 숙여 가며 머리를 조아렸다.
제국 십검쯤이나 되는 인물이었지만 오베르 후작이 가지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발령 소집이 해제된 직후, 끝끝내 수습대에 대한 소식을 전하지 못한 살모라는 오베르 앞에서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방 안이 싸늘했다. 마치 뱀의 아가리 속에 있는 것처럼 등골이 오싹하고 마른침이 삼켜졌다.
이에 오베르는 말없이 독기가 잔뜩 어린 눈빛으로 고개 숙인 살모라를 내려다보았다.
‘무능력한 놈.’
고위사제가 말끔하게 치료해 주긴 하였지만 아직도 겨드랑이 부분이 시큰거리는 것만 같았다.
오베르는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독한 양주 한 잔을 자신의 잔에 부었다. 그리고.
“스읍, 후우우우…….”
애연가인 오베르는 자신의 전용 담배인 궐련을 말아 피우며 허공에 자신의 한숨을 흐트려 놓았다.
‘꿀꺽.’
이에 살모라가 다시 한 번 마른침을 삼켰다.
오베르는 살모라 같은 인물을 혼낼 때 결단코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평생토록 책만 보아 온 자신이 무인호걸을 때려 봤자 자신의 손만 아프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스럽게 욕설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살모라가 더더욱 긴장하는 것이었다.
“후우우우…….”
오베르가 다시 한 번 연기를 내뿜었다.
방 안에는 어느새 오베르가 내뱉은 궐련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궐련은 어느새 엄지손톱보다 짧아져 있었다.
오베르는 그런 궐련의 마지막까지 빨아 당긴 다음 옥으로 된 큼지막한 재떨이에 남은 궐련을 비벼 보이며 말했다.
“재떨이를…… 갈아야겠군.”
재떨이 안에는 오베르가 피다 만 궐련들과 담뱃재로 가득했다.
살모라는 다시 한 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윽고 오베르가 말했다.
“살모라.”
“예, 후작님.”
“한 잔 받지.”
“예, 후작님!”
침묵하던 오베르가 술을 권하자 고개 숙이고 있던 살모라가 황급히 술잔을 찾았다.
그러나 책상 위의 술잔은 오베르의 것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살모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만 갔다.
칙- 치익, 파스스슷…….
굳은 표정의 살모라를 앞에 두고 오베르는 새 궐련 하나를 입에 물어보였다.
그런 다음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재떨이에 재를 털어 보였다.
이윽고 오베르가 말했다.
“뭐 해? 잔 안 들고.”
오베르가 가리킨 잔은 다름 아닌 자신이 재를 털 때나 사용하는 옥으로 된 재떨이였다.
옥으로 된 재떨이는 크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무리 크고 아름답다고 한들 안에 든 것은 차마 입에 대기 힘든, 죽은 담배의 흔적들뿐이었다.
살모라는 맥주잔보다 더 큼지막한 재떨이를 보고 눈 아래의 근육을 꿈틀거렸다.
“받지.”
그러나 받아야만 했다. 살모라는 애써 표정 변화를 감추며 묵직한 옥잔을 두 손으로 떠받들었다.
콸콸콸콸…….
샷으로 먹어도 쓰디쓴 양주가 재떨이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오베르는 엄지 손가락만한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워 보였다.
얼굴에 짙은 그늘이 진 살모라. 그것을 본 오베르가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왜? 설마 축배라도 기대한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다음번엔 축배를 들 수 있었으면 좋겠군.”
대답과 함께 오베르가 먼저 잔을 비워 보였다.
그리고 그 직후, 살모라 또한 안면근육을 꿈틀거리며 거대한 옥잔을 입술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
꿀꺽, 꿀꺽.
방 안에는 살모라의 울대 소리만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살모라는 결국 옥잔을 모두 비워내고 말았다.
끔찍했다.
살모라는 잔을 말끔하게 비워낸 후 이를 꽉 깨문 채 책상 위에 재떨이를 내려놓았다.
“좋군.”
오베르는 말끔하게 비워진 옥잔 위로 다시 한 번 재를 털어 보였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3부대는 아직도 무소식인가?”
“……그렇습니다.”
“5부대를 궤멸시킨 것도 모자라 이제는
수습대로 보낸 3부대까지 궤멸시키다니…….”
이 일은 철저하게 오베르와 살모라밖에 모르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개의 부대가 소리 소문 없이 궤멸당하고 말았다.
오베르는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두 가지의 가능성을 내놓았다.
‘오랫동안 우리를 감시해 왔거나, 혹은 내통자가 있거나.’
그러나 후자는 가능성이 적어 보였다.
내통자라고 해 봤자 바이퍼 기사단이 전부일 텐데 동료들을 궤멸시켜 가면서까지 이번 일을 들춘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베르는 전자에 가능성을 두었다.
‘만약 전자라면 아이젠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놈은 이 순간을 위해 자그마치 1년이나 준비해 온 것일 테니까.’
지금으로썬 아이젠이 그 가능성이 제일 컸다.
게다가 히람의 팔을 자르고 수습대까지 궤멸시키기 위해선 무지막지한 무력이 필요했는데 아이젠을 제외한다면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도 없었기 때문이다.
“살모라.”
“예, 후작님.”
“당분간 살게라 보급 문제에 대한 건 손을 떼도록 한다.”
“예, 알겠습니다.”
“대신 지금부턴 아이젠 백작을 암살할 만한 바이퍼 기사단 이외의 전력들을 소집해 봐.”
아이젠 백작의 암살을 준비하라는 말에 살모라의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다른 이도 아닌 대가문주를 죽이라니?
아무리 아이젠이 오베르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지만 이것은 분명히 큰 문제였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의 주인이 얼마나 큰 분노를 품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에 살모라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분노와 독기는 아래로 흐르는 법이다. 살모라의 눈빛에도 어느새 오베르만큼이나 뜨거운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