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덤 (2)
간만에 귀빈이 찾아왔다는 이유로 번트는 그동안 아껴 왔던 술들의 마개를 마음껏 개봉했다.
안주는 필요 없었다. 같은 계파에 속했던 두 사람은 과거의 영광을 안주 삼아 끊임없이 술잔을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 사람은 두 명이 먹었다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의 양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혓바닥이 얼얼해진 상태였다.
“흐흐흐, 반 경. 이번에 개봉할 술은 그 유명한 주조 장인, 막거스가 만든 위스키입니다.”
“오오, 혹시 그 폭발하는 위스키입니까?”
“후후, 폭발하는 위스키도 좋긴 하지만 이 술은 그보다 한 단계는 더 위에 있는 놈입니다.”
“한 단계 위라면…… 설마?”
“그렇습니다! 바로 화산 폭발 위스키입니다!”
“우오오오!”
헨리의 검과 수문장이라고 불리던 남자들이지만 사석에서 술과 함께라면 이토록 어린아이처럼 변하는 게 바로 사내놈들이었다.
번트가 야심차게 준비한 화산 폭발 위스키의 마개를 개봉하자 청아한 소리와 함께 코르크 마개가 떨어져 나갔다.
뽕!
“키아아아!”
“크으으으!”
화산 폭발 위스키는 보통의 위스키와는 차원이 다른 술이었다.
그 예로 술잔에 위스키를 따라 보이자 부어진 술이 잔 속에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마치 용암처럼 말이다.
“평소에는 차갑게 보관하다가 마개를 여는 순간 끓어넘친다. 캬! 어떻게 이런 발상을 술에 적용시킬 생각을 다 했는지? 기특해 죽겠습니다.”
“하하, 그럼 다시 한 번 건배할까요?”
“그래요, 그래!”
두 사람은 곧 과거의 영광을 되풀이하기 전, 한 번 더 목구멍에 기름칠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건배를 하려던 순간, 반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음? 왜 그러십니까, 반 경?”
“……이거 아무래도 건배는 잠시 미뤄야 할 것 같군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손님이 온 것 같습니다.”
“손님요?”
대답과 함께 반은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건배는 잠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예? 손님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털썩.
반을 붙잡으려던 번트는 그만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를 본 반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고 계시지요.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잔 속에 담긴 위스키는 여전히 부글거리고 있었다.
그 부글거림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반은 번트에게 금방 돌아와 함께 위스키를 마시겠다고 약속했다.
이윽고 반은 자신의 검을 허리춤에 차고서 검문소 밖으로 나섰다.
‘역시.’
술잔을 들어 올린 순간, 평온했던 공기가 가시라도 돋힌 것처럼 한없이 따갑게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한 살기였다. 살기는 제법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고 번트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번트의 실력이 녹슨 것이 아니었다.
그가 취한 것이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반의 감각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월등하게 뛰어난 점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이 먼저 살기를 알아차리고 손님 접대에 나선 것이었다.
‘대충 스무 명 정도인가?’
반은 석양이 지는 초원 너머에서 말과 함께 푸른색 오러가 맺힌 검을 든 스무 명의 검사들을 바라보았다.
독기와 분노가 가득히 느껴지는, 절정에 치달은 살기였다.
난생처음 보는 이들이, 무슨 이유로 저토록 분노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그 분노의 끝이 검문소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반은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 다음 살게라 특유의 시린 공기로 입안을 가득히 헹구어 내며 취기를 씻어 냈다.
“스으으읍…….”
폐 속에 냉기가 순환되자 순식간에 정신이 맑아졌다.
일반인들에 비해 많이 마시긴 했지만 몸속에 피보다 오러가 더 많이 흐르게 된 이후론 아무리 마셔도 잘 취하지가 않았다.
두그닥! 두그닥! 두그닥!
성난 말발굽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놈들은 모두 전신이 거멓게 뒤덮여 있는 것이 마치 잘 훈련된 한 부대의 자객 무리를 연상케 했다.
‘이 타이밍에 기습이라면…… 틀림없이 그놈들이겠군.’
자초지종은 이미 술을 마시면서 번트에게 모두 들었다. 그러므로 반은 높은 확률로 저들이 바이퍼 기사단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이퍼 기사단.
단장이 살모라로 있으며 과거에 자신들과 대척점에 서 있던 기사단.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반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이윽고 반이 느긋하게 검을 뽑아 들어 보였다.
부웅! 부웅!
그런 다음 어린아이가 나뭇가지를 휘둘러 보듯 손에 쥔 검을 허공에 몇 번 휘둘러 보았다.
‘됐어.’
이로써 모든 준비는 끝났다.
반은 자신의 전신을 찌르는 살기가 몇 배는 더 강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상황.
반은 축 늘어뜨린 오른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려 보였다.
고오오오오……!
단순히 검을 치켜들었을 뿐인데도 반의 어깨 위로 대기가 모여드는 듯했다.
‘어디 실력이나 한번 보자.’
이윽고 반이 검을 휘둘렀다.
부웅!
서그작!
“……모, 모두 넓게 흩어져!”
“이히히히힝!”
한 번의 칼질로 돌격 대형의 왼쪽 날개가 무너졌다.
아니, 무너진 게 아니라 갈려 나갔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선봉에 서서 달리던 부대장은 똑똑히 보았다.
눈앞의 남자가 검을 한 번 휘두르자 왼쪽 날개의 축을 담당하던 네 명의 대원이 말과 함께 통째로 두 동강이 나는 것을.
‘바, 방금 뭐였지? 검격? 아, 아냐. 분명히 오러는 없었는데?’
평범한 칼질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도 그리 크지 않았고, 잠깐이나마 살기가 느껴지긴 했지만 자신들의 위용이 더 강하다고 판단하여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부대장은 말과 대원들을 썰다 못해 바닥까지 움푹 파이게 한 남자의 검흔을 보고, 카니에는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동요하지 마라! 놈은 한 명이다! 나선 포위진으로 놈을 압박해!”
스무 명이었던 부대원이 순식간에 열여섯 명이 되었다.
단 일격에 힘의 차이를 깨달은 부대원들은 부대장의 명령 하에 힘의 격돌이 아닌 기술적 압박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이윽고 소용돌이 속에 상어 떼가 빨려 들어가듯 제3 부대원들이 조금씩 거리 차이를 두고 반을 감싸고 돌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힘의 차이를 알았다면 당연히 기술적으로 접근해야지.’
이에 반 또한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적 지휘관의 판단력을 칭찬해 주었다.
‘하지만 기술은 기술일 뿐!’
반이 감상을 마친 순간이었다.
“죽여!”
부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검날에 짙은 오러를 맺은 부대원들이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반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날카로운 칼날의 아가리가 점점 더 포위망을 좁혀 냈다.
그 순간, 반은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며 거대한 원을 그렸다.
살각!
짧은 파열음. 하지만 검날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베였다는 느낌이 강했다.
반이 순식간에 검을 휘두르자, 포위망을 좁혀 오던 제3 부대원 전체가 일순간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반은 다시 허리춤에 찬 검집으로 천천히 검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츠즈즈즈즛…….
검집과 검날이 맞물려 부드러운 파열음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칼자루가 검집 끝에 닿은 순간.
철컥.
푸콰하학!
털썩!
털썩!
제자리에 멈춰 섰던 부대원들의 허리가 말 모가지와 함께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쿠궁!
쿠구웅!
그리고 동시에 부대원 근처에 있던 거목들 또한 한 박자 늦게 허리가 잘려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저, 저게…… 발검술이라고……?”
그리고 멀찍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니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의 그것은 발검술이 분명했다.
발검술.
검집에서 검을 빠르게 뽑아 상대를 기습하는 검술의 일종.
하지만 카니에가 아는 발검술의 리치는 고작해야 코앞의 사람이 한계라고 들었다.
하지만 반의 발검술은 척 보기에도 ‘어마 무시’한 범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카니에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오러? 아냐, 오러라고 할 만한 위압적인 힘은 안 느껴졌다. 그렇다면 대체 뭐지? 검? 검에 혹시 비밀이 있는 건가?’
카니에는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젊은 세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검술은 선대 황제가 일구어 놓은 효율적인 제국 검술이었으며 그가 알고 있는 무력의 상식은 검술 아카데미에서 가르친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건 대체…….’
그렇기 때문에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괴한 현상에 카니에는 표정이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저벅저벅.
‘온다……!’
처음에는 한 번의 휘두름으로 네 명의 부하들이 갈려 나갔다. 그리고 두 번째 휘두름에는 나머지 부하들 전체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오러도, 살기도, 그 어떤 눈속임도 없었다.
반은 단순히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사람이 잘리고 산천초목이 베였다.
그런 그가 이제는 산천초목을 베어 넘긴 검을 들고서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꿀꺽!’
반은 허리춤에 찬 검집에 검을 집어넣고서 천천히 카니에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반은 아무런 행위도 보이지 않았다. 딱히 살기를 풀지도, 오러를 방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니에는 천천히 다가오는 반에게서 압도적인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싸, 싸워야 한다……!’
평생을 천재 검사라고 불렸던 자신이다. 항상 닦인 길과 같이 거리낄 것 없는 패도적인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고작해야 중년 늙은이에 불과한 저런 놈에게 겁을 먹다니?
게다가 지금 여기서 도망치는 것은 자신이 정한 기사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카니에는 검을 뽑아 들고 겨눔세를 취했다. 그리고 떨리는 숨소리를 고르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어떻게 해서든지 상대의 눈동자를 노려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의 거리가 다섯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도망치지 않다니, 제법이구나.”
카니에와 마주 선 반은 우선 도망치지 않은 카니에의 용기부터 칭찬해 주었다.
“닥쳐라!”
겨우 다섯 걸음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카니에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상대는 웃고 있었다. 옆집 아저씨 같은 얼굴을 하고서 허허 웃는 것이 전부였는데 카니에는 맹수를 눈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두려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쯧쯧, 떨고 있구나.’
그리고 그 두려움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훤한 것이었다.
반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디며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엉터리로 가르쳐 놓았더군. 그렇게 대놓고 살기를 드러내는데 어느 둔치가 눈치를 못 챌까?”
카니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 반이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내디디며 말했다.
“바이퍼 소속일 테니 네놈을 가르친 것 또한 뱀 대가리일 테지.”
뱀 대가리라는 말은 자신의 단장이자 스승인 살모라를 뜻하는 말이 분명했다.
카니에는 미칠 듯이 분했지만 한 걸음 더 가까워진 만큼 한층 더 강렬해진 압박감에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이윽고 반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자랑스러울 테지. 모시는 주인이 제국 십검이라 불리는 뱀 대가리니까.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아나?”
반은 말과 함께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뱀 대가리는 결국 용이 될 수 없다는 거지.”
“웃기지 마아아!”
서걱!
카니에는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검도 휘둘러 보지 못하고 죽으면 천추의 한이 되어 살게라의 망령으로 남을 테니까.
그래서 카니에는 화약이 폭발하듯 일순간에 자신의 힘을 쏟아부어 기합과 함께 검을 내질렀다. 자신의 평생이 담긴 마지막 검을 말이다.
하지만 결국 카니에는 반의 옷자락 끝에도 닿지 못했다.
푸슉! 푸슈슉!
투둑.
잘린 목덜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카니에의 수급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까지 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카니에의 목이 잘리고 난 직후, 찰나의 순간.
카니에는 볼 수 있었다. 반의 검에 맺힌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오러를 말이다.
그것은 자신의 단장인 살모라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종류의 것이었다.
“이만하면 안 늦었겠지?”
손님 접대를 마친 반은 이윽고 잔에 부어 두었던 술을 마시기 위해 다시 검문소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