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살게라 (3)
푸슈슉!
머리가 잘린 도적단원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그 덕분에 빌레이는 핏물을 뒤집어써야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도적의 머리를 참수했는가였다.
범인은 바로 헨리였다.
놀랍게도 말 위에 올라탄 채로 대검을 던져 일격에 도적의 머리를 잘라 내는 신기에 가까운 투척술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도적들의 시선이 헨리에게로 집중되었다.
“헤글러.”
“예, 단장님.”
“준비해.”
“예,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려 전투를 준비했다.
건방진 빌레이가 죽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지만, 빌레이까지 죽게 된다면 대신 일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부분은 좀 곤란했다.
힐끗.
헨리는 검을 뽑음과 동시에 문케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미소가 사라진 그의 표정은 어느새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뭔가 있긴 있네.’
정확한 추궁은 나중에 해 보면 될 일.
그러니 우선은 한통속일지도 모를 도적단 놈들부터 베어 넘기기로 했다.
“죽여라.”
이윽고 두령으로 보이는 자가 척살을 명령했다.
두그닥! 두그닥! 두그닥!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스무 마리의 말 떼.
이에 헤글러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헨리가 말했다.
“물러서.”
헤글러는 헨리가 두 번 명령하게 하지 않았다.
헨리는 명령과 동시에 오른발을 들어 세게 굴렀다.
퉁-!
그러자 무형의 마력이 연기처럼 치솟아 두 사람 앞에 뻗힌 길목으로 스며들었다.
시전된 마법의 이름은 ‘그리스’.
특정 지역을 아주 미끄럽게 만드는 기초적인 마법들 중의 하나였다.
헨리는 마법을 시전한 후 여유롭게 팔짱을 꼈다.
꿀꺽.
마력을 보지 못하는 헤글러로선 헨리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헨리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단장님을 믿어 보자.’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무슨 묘책이라도 있겠거니 했다.
그리고 잠시 뒤, 도적들과 헨리 사이의 거리가 십몇 걸음도 남지 않았을 때였다.
푸히히힝!
“어, 어, 어?”
쿠당탕탕! 쾅! 콰당! 콰지직!
가장 먼저 넘어진 것은 선두에서 달려오던 세 놈이었다.
놈들은 마찰력이 사라진 바닥에 속절없이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놈들을 기점으로 뒤에서 바짝 쫓아오던 놈들 전부가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연쇄 작용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무 명에 달하는 도적단원 모두가 땅바닥에 처박히자, 헨리는 그제야 팔짱을 풀고서 헤글러에게 명령했다.
“전부 죽여.”
“예!”
헤글러의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비록 원리는 알 수 없었지만 주인인 헨리는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역시 대단한 남자야…….’
시험장에서부터 느꼈지만 헤글러는 살면서 헨리만큼 비범한 기운을 풍기는 남자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더욱 충성하고픈 욕구가 샘솟았다.
헨리는 헤글러와 함께 낙마 사고에서 살아남은 놈들의 목덜미에 대검을 찔러 넣었다.
푹!
뒷굽에 차이고 목뼈가 부러지는 등 워낙에 위험한 것이 바로 낙마 사고였다. 그렇다 보니 생존자의 수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윽고 마지막 생존자의 숨통을 끊은 헨리는 시체의 산을 넘어 빌레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대, 대체 어떻게…….”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빌레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기에 가까운 헨리의 행동들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빌레이가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두 눈을 끔뻑이며 헨리를 올려다보았다.
이에 헤글러가 물었다.
“어떡할까요?”
“말했잖아, 일할 놈이 필요하다고. 마차로 데리고 가.”
“저놈은요?”
헤글러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도적단의 우두머리, 즉 두령을 턱으로 가리켜 보이며 물었다.
“저놈은 내가 처리하지.”
두령 역시 다른 조무래기들처럼 복면을 착용하고 눈만 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노출된 2개의 눈동자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이에 두 사람을 후방으로 보낸 헨리가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네가 대장이지?”
헨리의 물음에 두령은 대답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츠즈즈즛!
‘음?’
분노와 함께 치솟는 검기.
그런데 검기의 상태가 다른 도적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소드 마스터?’
익스퍼트 유저에 비해 월등하게 길쭉한 검기. 그리고 몸 전체에 둘린 얇고 일정한 오러.
저것은 소드 마스터만이 다룰 수 있는 세밀한 오러 통제술이 분명했다.
‘이거…… 나 혼자 상대하길 잘한 것 같은데?’
헤글러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아직은 익스퍼트급 유저에 불과했다.
더불어 어렵게 얻은 인재를 한낱 도적 잡기 따위에 쓸 수는 없는 법.
헨리는 두령의 검기에 답하기 위해 다시금 바닥에 발을 굴렀다.
퉁-!
스스슷!
헨리는 상대가 소드 마스터였기에 평소보다 몇 배는 두꺼운 마법 무장을 시전했다.
사실, 소드 마스터는 헨리도 장담할 수 없는 상대였다.
마도사가 아무리 강인한 존재라 해도 아직 마도사 수준의 마력으로는 소드 마스터의 오러를 압도하진 못하기 때문이다.
‘구경꾼들만 없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말이야.’
물론 여기서 말하는 마력은 육탄전을 위해 두르는 순수한 마력을 뜻했다.
마법사는 생각하고 준비하는 자.
마력의 경도가 좀 부족할 뿐이지, 헨리가 작정하고 살상용 마법을 사용한다면 저까짓 소드 마스터쯤은 요깃거리도 되지 못했다.
‘쯧, 내 오러는 언제쯤 발현될는지.’
아쉬웠다.
계획했던 대로 칼리번 요새에서 오러가 발현됐다면 진작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이루고도 남았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장은 좀 다르겠지.”
가벼운 도발.
그러나 효과는 굉장했다.
두령은 헨리의 도발에 반응하여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크고 거대한 검기를 검날에 맺었다.
이에 헨리 또한 살짝 상체를 숙인 후 가속 주문을 겹쳐서 시전하기 시작했다.
‘헤이스트, 헤이스트, 헤이스트.’
후우웅!
곧 바람의 기운이 헨리의 전신을 엄습하며 머리카락을 살랑이게 했다.
그리고 두령의 발이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헨리가 먼저 땅을 박차고 나가 순식간에 두령과의 거리를 좁혔다.
촤아악! 깡!
헨리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대각선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헨리의 검은 두령의 검기에 막혀 끝까지 휘둘리지 못했다.
푸르르……!
그 대신 말의 목 근육이 사선을 그리며 찢겼다. 찢긴 성대에서 말의 신음이 애처롭게 흘러나왔다.
털썩.
빌레이의 말이 그랬던 것처럼 두령의 말 또한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비록 두령의 살갗은 베지 못하였으나 그의 말을 쓰러뜨렸으니 아주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보병이 말을 타는 순간, 그 힘은 수배로 늘어나는 것이 보통이니까.
헨리는 검날에 묻은 말의 피를 훌훌 털어 내며 씨익 웃었다.
“이제야 공평하네.”
“이 개자식이……!”
두령의 입에서 처음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가 어릴 적부터 길러 꽤나 애지중지해 오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츠즈즈즛!
오러는 사용자의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바로 분노였다.
헨리는 처음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거대해진 두령의 오러를 보고 대략적인 거리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거리를 벌리면 내가 위험하겠어.’
오러가 폭주할수록 검기 또한 더욱 길어진다.
두령의 검기는 이제 마치 자그마한 스몰 스피어를 연상케 할 만큼 엄청나게 길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헨리는 다시 한 번 가속 주문을 끌어 올렸다.
‘헤이스트, 헤이스트, 헤이스트…….’
아무리 마력을 덧씌워도 넘을 수 없는 것이 경도 차이라면 결국 승부는 다른 것으로 보아야만 했다.
헨리는 그 와일드 카드로 ‘속도’를 택했다. 그러자 바람의 기운이 다시 한 번 헨리의 전신을 엄습했다.
헨리는 활시위를 당기듯 짧게 숨을 들이켠 뒤 호흡을 멈추었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두령은 위에서 아래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헨리를 두 동강 낼 생각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바람의 기운을 입은 헨리는 육체적인 움직임만 빨라진 것이 아니었다. 동체 시력과 순발력, 가속시킬 수 있는 대부분의 것을 가속시킨 상태였다.
‘세로!’
그 결과, 평소였다면 결코 알아채지 못했을 미세한 움직임까지 포착하여 두령보다 한발 빠르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슈우욱- 콰앙!
두령의 검기가 헨리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검흔을 남겼다.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단순한 롱 소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검흔은 투핸디드 소드 그 이상의 것 같았다.
헨리는 가볍게 몸을 틀었다. 그런 다음 왼손으로 검을 역수로 쥐고, 검 손잡이의 밑바닥을 아래쪽 손으로 받쳐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샤프, 샤프, 샤프!’
베기로는 결코 두령의 오러를 뚫지 못한다. 그래서 헨리는 검 끝에 모든 힘을 싣기로 했다.
슈욱!
헨리의 검이 마치 화살처럼 빠른 속도로 두령의 어깨를 향해 쏘아졌다.
콰지지직!
마치 강철을 찌르는 듯한 단단함이 검 끝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아주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헨리의 작전대로 찌르기에 집중된 힘은 상상 이상의 파괴력을 발휘했다.
그 덕분에 절대 뚫리지 않을 것 같았던 두령의 오러가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끄아아악!”
강렬한 고통.
두령은 어깨에 마치 벼락이 내려친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하자 비명을 질렀다.
‘지금!’
두령의 오러가 벗겨진 지금, 지금이 바로 기회였다!
헨리는 장도리로 못을 뽑아내듯이 검을 뽑아낸 다음 역수로 쥐었던 검을 두 손으로 바로 쥐었다.
그리고 검날에 실을 수 있는 최대치의 마력을 실었다.
부우웅!
정확도는 좀 떨어져도 확실하게 끝내기 위해선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벨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잽싸게 검을 휘두른 순간, 검 끝에 고깃덩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 순간, 두령의 몸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앙!
“크윽!”
화약이 아니었다. 아마도 체내에 담아 두었던 여분의 오러를 폭발시킨 것 같았다.
그 덕에 헨리는 십수 걸음도 더 되는 거리만큼 뒤로 튕겨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
재빨리 두 팔로 얼굴을 가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얼굴이 날아갈 뻔했다.
헨리는 불꽃에 덴 것처럼 쓰라린 두 팔을 축 늘어뜨리며 연기 속을 주시했다.
그러나 연기가 걷힌 직후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두령이 보이지 않았다.
“도망을 쳐?”
타기팅까지 사용해 가며 예의 주시하고 있었는데 놓치고 말다니.
‘주제에 소드 마스터라는 건가.’
대신 두령이 있던 자리에는 두령의 것으로 추정되는 팔 한 짝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목이 아니라 어깨를 베었던 모양이군.’
칼끝에 느껴졌던 감촉은 목덜미가 아닌 어깨였다.
녀석은 마치 도마뱀처럼 꼬리 대신 자신의 팔을 남기고 줄행랑을 친 모양이었다.
헨리는 바닥에 떨어진 팔을 주워 들면서 아쉬움을 표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두령은 도망쳤고 그 부하들은 궤멸됐다. 그것도 아주 수상한 정황들을 잔뜩 남기고서.
그렇다면 이제 헨리가 해야 할 일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