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51화 (51/522)

# 51

반 (2)

헨리의 대답을 들은 반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 의심이 분노로 변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죽고 싶나?”

“그럴 리가요.”

“아량을 베푸는 건 이번 한 번만이다. 한 번만 더 그 간사한 혓바닥을 잘못 놀렸다간 맨손으로 네놈의 혀를 뽑아 앙켈만 광장에 걸어 둘 것이니 그리 알아라.”

등골이 서늘한 경고였다. 그리고 반 정도 되는 남자의 경고라면 정말로 혀를 뽑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저것은 헨리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에 가지는 분노였다.

의심은 해소시켜 주기만 한다면 강력한 믿음이 된다는 것을 헨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제 말은 사실입니다.”

“대공께선 한평생 제자를 두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분 곁에는 항상 내가 붙어 있었지. 그런 내 앞에서 감히 그따위 거짓말을 한다고?”

“거짓말이 아닙니다. 저는 오로지 사실만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허튼소리!”

쾅!

결국 화를 참지 못한 반이 들고 있던 찻잔으로 탁자를 두 동강 내었다. 엄청난 괴력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그런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이렇게까지 화를 내시는 걸 보면…… 반 경께선 아직까지 제 스승님에 대한 신의를 버리지 못하셨나 보군요.”

“네놈 따위가 감히 논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아뇨, 저에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 때문에 제가 반 경을 찾아온 것이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지?”

“자세한 이야기는 대답을 들은 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반 경, 경께는 아직도 스승님에 대한 신의가 남아 있습니까?”

질문을 건넨 후 헨리는 반과 눈을 똑바로 맞추었다. 대담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반의 눈동자에는 엄청난 살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만약 헨리가 아니라 하즈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반의 기세에 눌려 금방 기절해 버렸을 게 분명했다.

‘다짜고짜 헨리와의 신의를 묻다니, 설마 저놈이 진짜 대공의 제자라고?’

하지만 하즈 뒤에 숨어 있던 자신을 끄집어내면서까지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그만한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리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런데 순간, 반은 혹시 저놈이 황궁에서 보낸 귀족들의 첩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숨어 있는 잔존 세력의 처치를 위해 귀족 놈들이 보낸 자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저놈은 자신이 내뿜는 살기 따위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반은 자신의 위치까지 발각된 이상, 더 이상 숨을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생각을 마친 반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으로 손을 올리며 말했다.

“지금 네놈이 묻고 있는 것이 감히 어떤 것인지는 알고 묻는 것이더냐?”

“물론입니다.”

만약 정말로 귀족이 자신의 위치를 알아낸 상황이라면 헨리와의 신의를 부정해 가면서까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반의 마지막 자존심이었기 때문이다.

결심을 마친 그가 비장한 눈빛으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평생 단 한 번도 대공에 대한 은혜를 잊어 본 적이 없다. 그분은 내 목숨을 포함해 이곳 앙켈만 시민들의 목숨과 안녕을 보존해 주신 아주 고마우신 분이다.”

슬그렁.

대답과 함께 반이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연극은 끝났다. 그러니 이제 그만 순순히 정체를 밝혀라.”

칼날을 겨눈 반의 얼굴에는 짐짓 비장함까지 감돌았다.

“푸흡.”

“……웃어?”

“푸하하! 죄송합니다, 반 경. 웃음을 참기가 너무 힘들어서 말입니다. 설마 지금 제가 귀족들이 보낸 자객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제야 정체를 드러내는구나!”

“진정하십시오. 저는 정말로 스승님의 제자가 맞습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지금부터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을 증명한다는 말에 반의 얼굴에 호기심이 감돌았다.

대답을 마친 헨리가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잘 보십시오.”

헨리는 내민 오른손을 가만히 쥐었다. 그런 다음 꽃이 개화하듯 천천히 손가락을 펼쳤다.

화르륵!

“이건……!”

헨리가 손안에서 펼친 것은 마력 패였다.

그것도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고 알려진 드래곤 형상의 마력 패 말이다.

“이, 이걸 어떻게……!”

푸른빛으로 일렁이는 블루 드래곤을 보며 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스승님의 마력 패도 드래곤이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드래곤이지요.”

마력 패의 종류는 마법사의 재능과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드래곤 형상의 마력 패는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마법의 근원이자 마법에 대해선 절대적인 존재들!’

헨리가 반에게 해 주었던 말이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뭐라?”

“제게는 스승님께서 남기신 수많은 유산이 묻힌 보물 지도가 있습니다.”

“유산이라고?”

“이걸 보시겠습니까?”

헨리는 이어서 아티팩트들이 묻힌 보물 지도를 꺼냈다.

그것들은 모두 모리스 영지에서 헨리 자신이 직접 제작한 아티팩트들이었다.

“또한 저는 마탑에서 오로지 스승님만이 만들 수 있는 미러클 블루의 제조법을 알고 있을뿐더러, 스승님만이 다룰 수 있는 특수한 마법들까지 모두 전수받았습니다.”

차고 넘치는 증명들이었다.

그리고 증명이 이어질수록 반은 어안이 벙벙해져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반 경.”

놀라움에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반을 향해 헨리가 말했다.

“돌아가신 스승님을 대신해 제가 감사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스승님과의 신의를 잊지 않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꾸벅.

증명을 마친 헨리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반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대공께서 나에게 어떤 분이셨는데.”

감사 인사를 거절하지 않는 걸 보니 적당히 대화가 통할 듯싶었다.

헨리는 기세를 몰아 반에게 앙켈만에 온 목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반 경, 저는 복수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수…… 말이냐.”

“스승님의 억울한 죽음, 그리고 스승님이 이루지 못하신 것들. 저는 그것을 위해 세상에 나왔습니다.”

복수.

반 또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복수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복수는 감정적으로 움직여선 안 되며, 단 한 번이라도 실패할 경우 다음 기회를 장담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더군다나 상대는 황궁을 점령하고 있는 귀족 전체와 아둔한 황제 그 자체였다.

헨리가 복수에 대해 언급하자 반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겁이 나겠지. 머리로는 복수하고 싶어도 혼자서는 무리였을 테니까. 게다가 앙켈만 문제도 있을 테고.’

적어도 헨리가 예상하는 반의 생각은 이러했다.

하지만 아무리 반이 겁을 내며 뒤로 물러선다 해도, 헨리는 상관하지 않았다. 헨리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반을 포섭하기 위해서였으니까.

“반 경, 지금 반 경께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반 경께선 지금 스승님에 대한 복수와 앙켈만,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갈등하고 계시는 게 아닙니까?”

정곡을 찔린 표정이었다. 반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물론 반 경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두셔야 합니다. 당장의 평화를 위해 계속해서 그놈들을 방치해 두었다간, 언젠가는 이곳 앙켈만 또한 그놈들의 손아귀에 넘어갈 것이란 걸 말입니다.”

이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앙켈만 같은 자유도시들은 수익성이 좋기 때문에 귀족들이 노리는 가장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으니까.

실제로 이따금씩 귀족 놈들이 내려와 도시를 둘러보고 가는 등, 놈들은 호시탐탐 앙켈만을 차지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사실 도시의 운영이란 게 그렇지 않습니까. 당장 포자 사건만 하더라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해 저에게 휘둘리지 않으셨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운영을 투명하게 하고 수익성을 최대로 끌어올린다고 한들, 포자 사건 때처럼 예상치 못한 변수에는 취약한 것이 지금 앙켈만의 현주소였다.

반은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는 헨리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변수에 대한 약함은 반이 걱정하고 있는 사실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뭐……?”

“지금의 앙켈만은 더없이 훌륭해 보이지만 변수에 의한 대책 마련에는 한없이 무기력합니다. 그래서 제가 도와드리겠다는 겁니다. 적어도 귀족 놈들이 건덕지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항상 최선의 운영 성적을 낼 수 있게끔 말입니다.”

꿈 같은 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신용할 수 없었다.

“네가 무슨 재주로?”

“저는 이미 비발디 타운을 제 손안에 넣었습니다.”

“뭐, 뭐라고?”

비발디 타운을 손에 넣었다는 말에 반이 두 눈을 끔뻑였다.

비발디 타운이라면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앙켈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세금을 내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증명은 저와 함께 비발디 타운으로 가신다면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 아니…… 그건 됐고, 대체 어떻게 손에 넣었단 말이냐?”

“체스입니다.”

“체스?”

“비공식전이긴 하지만…… 저는 벤트 시장을 상대로 체스 게임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그 무패의 챔피언을 상대로 말이냐?”

“그렇습니다.”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무패의 체스 플레이어, 벤트 라르센.

그런 벤트 시장을 체스로 꺾었다는 말에 반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는 건 저와 벤트 시장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미끼로 벤트 시장을 제 휘하에 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그놈은 한낱 공무원에 불과한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발디 타운의 공식적인 검 치기 챔피언 자리는 물론이고 타운의 최대 투기장인 천만황금까지 제 휘하로 만들었습니다.”

반 또한 종종 비발디 타운에서 유흥을 즐겼기에 검 치기가 어떤 종목이고 천만황금이 어떤 곳인지 잘 알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제패했다는 것은, 직접 듣고도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 전력이면 앙켈만을 뒤에서 돕는 것쯤은 손쉬운 일일 것 같은데 말이죠.”

“과연…… 지금까지 한 말이 사실이라면 가능하겠군.”

든든한 배경을 자처해 주겠다고 하니 반으로서는 그저 환영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저 배경을 얻기 위해 반은 헨리가 제안한 ‘복수’를 함께해야만 했다.

‘끄응…….’

달콤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런 달콤한 제안도 단 한 번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은 분명했다.

헨리는 자신의 제안을 듣고도 머뭇거리는 반을 보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경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더니……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군.’

현명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대담하기도 했던 남자가 바로 반이었다. 그런 반이 이렇게까지 겁을 내는 걸 보자 헨리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보듬어 주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반 경, 그리고 저는 스승님의 제자로서 마법을 익히긴 했지만 검술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뭐라? 지금 설마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익혔단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허…… 그건 또 무슨…….”

마법을 익힌 자는 검을 익히지 않는다. 그리고 검을 익힌 자는 마법을 익히지 않는다. 그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그렇담 수준은 얼마나 되느냐?”

“마법은 3서클, 검술은 러너급에 불과합니다.”

‘하찮구나!’

마법은 그럭저럭 인정해 줄 만했다. 헨리의 나이를 가늠해 보았을 때 3서클은 그 나이 또래와 비교해 뛰어난 수준이니까.

하지만 검술은 그렇지 않았다.

“듣기로는 칼리번 요새에서 복무했다던데…… 그런데도 아직 러너 수준이란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갑자기 신뢰가 떨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복수라는 대업을 가슴에 품고 있는 놈이 한 가지에만 몰두해도 모자랄 판에 어설프게 두 가지 흉내를 내고 있으니 그게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면 무엇이지?”

“그렇다면 그 또한 증명하면 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증명이라고?”

“지금 즉시 반 경에게 대련을 신청하겠습니다. 판단은 저와 검을 나누어 보신 뒤에 해도 늦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헨리의 말에 반이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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