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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클 마법사의 환생-50화 (50/522)

# 50

반 (1)

상황은 완전히 헨리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납치범도 증인도, 그리고 억울하게 누명을 쓴 가해자조차 철저하게 헨리의 입맛대로 조작되어 버렸으니까.

하즈는 혈압이 올라 쓰러질 뻔하려다가 초인적인 힘으로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지금 쓰러지면 모든 것을 뒤집어쓰게 된다.’

상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한 일이었다.

간신히 정신 줄을 붙잡은 하즈가 웰의 부축을 받고 일어서며 힘겹게 말했다.

“……모두들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시오.”

사태 파악을 마친 하즈가 헨리와의 독대를 에둘러 요청했다.

하지만 헨리는 여전히 단호한 표정과 함께 팔짱을 끼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하즈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부탁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것입니다.”

드디어 원하는 모습이 나왔다. 주위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는 모습 말이다.

“물러나 있어.”

헨리는 그제야 주변인들에게 턱짓을 해 물러날 것을 명령했다.

이윽고 사람들이 응접실을 빠져나가자 방 안에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털썩.

사람들이 사라지자 하즈는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살려 주십시오, 헨리 경.”

“사실을 인정하는 건가?”

“그게 지금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잘못을 벌하시기 전에 제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먹먹한 목소리와 붉게 충혈된 눈.

그의 두 눈에는 간절함과 공포가 뒤섞여 두려움이 우물처럼 고여 있었다.

“하루만, 제게 하룻밤만 시간을 주십시오.”

“내 귀에는 도망갈 시간을 달라고 하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제 마지막을 정리할 시간을 주십시오. 이대로 갑자기 떠나 버리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가 감정을 실어 짙은 목소리로 호소했다.

하지만 헨리의 귀에는 그저 핑계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살며시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하즈에게 말했다.

“그사이에 반한테 도움을 요청하려고?”

움찔.

반. 그 누구도 몰라야 할 단어가 처음 보는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하즈는 자기도 모르게 동공을 수축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동시에 하즈의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하즈를 보며 헨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맞네.”

완벽한 외통수였다.

반이 여기 있음을 확신하게 되자 헨리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반은 똑똑한 놈이었고 고집 또한 강했다.

하지만 반은 근본적으로는 앙켈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애국자다. 그렇기에 그는 도망을 치고도 앙켈만에 몸을 숨긴 것이었다.

“반은 어디 있지?”

“그, 그걸 어떻게……!”

“내 질문은 그게 아닐 텐데?”

쫓던 토끼가 굴속에 있음을 알았으니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헨리는 전보다 더욱 차가워진 얼굴로 하즈를 재촉했다.

“반은 어디 있지?”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똑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게 하지 마라.”

헨리의 마지막 경고에 하즈는 오한에 걸린 사람처럼 손을 떨었다. 그리고 품속을 더듬어 조그마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건?’

손바닥만 한 종이. 그리고 그 위에는 익숙한 주문들이 그려져 있었다.

‘호출권?’

그것은 헨리가 만든 ‘호출권’이었다.

* * *

집행관의 말이 계속되었다.

“반역을 도모한 자는 일족을 멸하고 관련된 자를 모두 잡아들여야 하나,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넓은 아량으로 그 죄를 헨리 모리스 하나에게…….”

그 순간, 헨리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분명히 맹독으로 몸이 망가졌을 텐데도 매서운 안광이 사위를 가로질렀다.

그 기세에 눌린 것은 집행관뿐만이 아니었다. 형을 구경하던 황제와 나머지 귀족들까지 모두 창백하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듣자 하니 내 귀가 썩을 것 같군. 같잖은 소리는 그만하고 그냥 죽여라!”

헨리는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거친 일갈을 날렸다.

그러자…….

“저, 저, 저놈을 죽여! 당장! 어, 어, 어서!”

황제는 덜덜 떨리는 손길로 헨리를 가리키며 괴성을 질러 댔다.

헨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언제나 자신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노현자의 눈빛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황제는 그 눈빛이 참 두려웠다.

그의 눈빛 속에는 먼저 죽은 아버지를 닮은 강렬한 경멸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 경, 미안하오.”

제국 십검 중 제일검이자 기사왕이라고 불리는 바할드의 검이 하늘로 치솟았다…….

“헉!”

헨리의 목에서 피가 솟구치는 순간, 반은 짧은 신음 소리와 함께 상체를 일으켰다.

“또 그 꿈인가…….”

제국의 대마법사이자 자신이 모시던 헨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던 날의 꿈이었다.

모든 귀족들이 참석하여 헨리의 죽음을 구경할 때, 반 또한 사형장 한구석에서 이를 악물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끔찍한 순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그다.

그랬던 그가 이런 허망한 말로를 맞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은 현실이 되었고, 황실에 남은 ‘마지막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반은 헨리가 자신에게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나는 이제 너희들을 지켜 줄 힘이 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겨라. 내가 죽고 나면 다음은 너희들 차례일 테니.

그는 대륙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사내였다.

하지만 결국엔 그 또한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인정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마음 약한 인간.

“후…….”

그가 죽고 나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반은 헨리에게 그렇게 묻고 싶었다.

왜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느냐고, 왜 끝까지 인간 같지도 않은 귀족 놈들을 사람처럼 대해 주었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한들 헨리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헨리의 마지막을 지켜본 반은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황급히 수도를 떠나야만 했다.

헨리를 겨누었던 칼날이 그다음엔 자기들을 향해 뻗힐 것이란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반은 자신의 고향인 앙켈만으로 내려왔다.

앙켈만은 제국에서 가장 큰 무역도시이자 제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세금을 거두는 곳. 그렇기 때문에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가장 탐내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지켜야만 했다.

자신을 위해 앙켈만을 귀족의 자치령이 아닌 자유도시로 만들어 준 헨리의 마지막 선물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반은 자신이 직접 뽑은 하즈를 어둠 속에서 감시하며 조금이라도 흠 잡히지 않게 최선을 다해 앙켈만을 운영해 왔다.

앙켈만에 문제가 생기는 즉시, 앙켈만을 노리고 있는 다른 귀족들이 하이에나처럼 물어뜯을 게 뻔했으니까.

그때였다.

파스슷.

“음?”

손으로 식은땀을 훔치며 악몽에서 헤어 나올 때쯤, 품 안에 넣어 두었던 호출권이 조금씩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앙켈만에서 이 호출권을 사용하는 이는 자신과 하즈, 두 사람뿐이었다. 이 호출권은 헨리에게서 만드는 법을 배워 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즈?”

품 밖으로 꺼내 든 지 얼마 되지 않아 호출권은 완전히 불타서 사라져 버렸다.

“음?”

이상했다. 호출권이 많이 타들어 갈수록 상대방이 긴급한 상황이란 뜻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앙켈만으로 내려온 직후, 호출권은 단 한 번도 전부 불타 사라진 적이 없었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반은 서둘러 나갈 채비를 마친 후 시청으로 향했다.

* * *

꾸벅.

시청에 도착하자 입구의 문지기들이 꾸벅 머리를 숙였다.

반은 응접실을 지나 하즈의 집무실에 당도하자마자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하즈의 집무실에는 하즈가 없었다. 대신 그곳에는 하즈가 아닌 처음 보는 남자가 하즈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셨습니까, 반 경?”

헨리가 오랜만에 만난 측근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반의 태도는 심히 냉랭했다.

“넌 누구지?”

헨리는 씁쓸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헨리는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담담한 말투로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헨리 모리스라고 합니다.”

“뭐……?”

헨리의 소개에 반의 미간이 급격히 찌그러졌다. 그러나 헨리는 태연하게 다시 한 번 인사말을 건넸다.

“그쪽이 소드 마스터 반 경이 맞으시죠?”

“너 누구야?”

순식간에 뿜어지는 살기.

앙켈만 왕국의 젊은, 그리고 유일한 소드 마스터였던 그는 제국이 건설되고 다시 앙켈만으로 돌아올 때까지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살벌한 건 여전하네.’

살기가 금방 집무실을 가득 메웠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졸도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헨리에겐 그저 시원한 소름이 돋는 것이 전부였다. 살기에 대한 내성은 육체의 단단함이 아닌 정신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헨리는 엄청난 살기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혹시 아직 못 들으셨습니까? 어제 악성 포자를 제거해 드린 사람인데.”

“악성 포자?”

악성 포자라는 말에 반은 그제야 기억이 났다. 죽은 대마법사와 똑같은 이름을 쓰는 자가 나타났다고 하즈가 보고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저놈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알고 하즈의 호출권을 사용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궁금하신 점이 많으실 텐데, 계속 그렇게 복도에 서 계실 겁니까?”

“하즈는 어디 있지?”

“침실에 있습니다.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지라고 했죠.”

“뭐라고?”

하즈는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즈를 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앙켈만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화가 치솟았지만, 태연하기 짝이 없는 헨리의 태도가 오히려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맹수마저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자신의 살기를, 저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멀쩡하게 받고 있었다.

반이 호기심을 갖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끼이익- 덜컥.

살기를 거둔 반이 문을 닫고 집무실 의자에 앉았다. 앙켈만으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한 놈이었다.

반은 놈을 죽이는 것은 호기심을 충족시킨 뒤에 해도 전혀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가운 녹차 좋아하시죠?”

“……하즈가 말해 주던가?”

“아뇨, 그냥 감입니다.”

과거에 두 사람이 티타임을 가질 때면 반은 항상 차가운 녹차만을 고집했다.

전생에 그랬던 것처럼 헨리는 반에게 직접 차를 대접했다.

호록.

찻잔을 나눠 가진 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차만 홀짝였다.

그러던 중 헨리가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이곳에서의 생활은 만족하고 계십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그냥 뭐…… 유명하잖습니까? 반 경이 대마법사 헨리 모리스의 검이었다는 사실은 온 제국민이 다 아는 사실인데 말이죠.”

“나를 우롱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농담이 통하지 않는 상대란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헨리는 부활한 이후 단 한 번도 꺼내 든 적이 없던 비장의 수를 그에게 사용키로 했다.

“스승님께서 알려 주셨으니까요.”

“……뭐?”

“제 스승님 말입니다. 8서클 대마법사, 헨리 모리스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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