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39화 (39/522)

# 39

진짜가 나타났다 (3)

벤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니, 핏기가 빠져 탈색되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10만 골드라니요? 제, 제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 있다고……!”

“어차피 공식전에서 벤트 경을 꺾어도 10만 골드가 지급되지 않습니까?”

“그, 그건 제국에서 주는 겁니다! 저 같은 일개 체스 플레이어가 가질 수 있는 돈이 아닙니다.”

“그럼 돈이 없다는 겁니까?”

“그, 그런 셈이죠…….”

“알겠습니다. 그럼 거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돈도 없는 사람을 상대로 협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정식으로 도전장을 접수하겠습니다.”

돈이 없다는 이야기에 헨리는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짐을 챙겨 떠나려는 헨리를 보며 벤트는 아까 전보다 훨씬 더 창백해진 얼굴로 헨리를 붙잡았다.

“헤, 헨리 경! 자, 잠깐만요! 우리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왜 이러십니까? 저는 돈이 필요한데 벤트 경은 돈이 없잖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다른 방법?”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결국 최후의 카드까지 꺼내 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벤트는 현재 인생 최악의 궁지에 몰렸다.

“한번 들어나 보죠.”

마지못해 들어 준다는 듯이 헨리는 다시금 소파에 앉았다.

벤트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앞의 찻잔을 들어 올렸지만 손이 너무 떨리는 바람에 입까지 가져다 대지 못했다.

“그, 그게…….”

헨리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비발디의 황자라 해도 10만 골드나 되는 거액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그가 아무리 비발디 타운의 시장이라 할지라도 어찌 됐든 그는 한낱 공무원에 불과했으니까.

그리고 그가 꺼내 들 최후의 카드 또한 이미 헨리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그것을 노리고 온 것이니까.

“벤트 경.”

“예, 예!”

“제국에서 지급한다는 10만 골드의 상금. 그 돈, 지금 여기 비발디 타워에 있지 않습니까?”

“그, 그걸 어떻게……?”

“말했잖습니까, 저는 헨리 모리스 님의 두 번째 제자라고. 이것 역시 스승님께서 알려 주신 겁니다.”

“스, 스승님이 왜 하필…….”

그의 눈빛에는 원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헨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벤트 경이 돈을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그런 건 전혀 관심 없습니다. 저는 그저 벤트 경에게 돈만 받을 수 있으면 됩니다.”

상금이 보관된 위치의 언급과 다시 한 번의 강조.

동네 바보라도 모를 수 없는 힌트였다.

하지만 무려 10만 골드였다. 그런 거액의 횡령 사실이 들통나기라도 한다면 벤트의 목이 달아나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벤트는 저울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숨과, 공식전에서 패배하고 잃게 될 부귀영화의 가치를 말이다.

‘넌 절대 포기 못 해. 부귀영화를 한번 맛본 자들은 그 맛을 절대 잊지 못하거든.’

헨리는 갈등하는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조언을 건넸다.

“벤트 경, 상금은 상금으로만 존재하면 됩니다. 벤트 경이 패배하지만 않는다면 그 돈은 영원히 이곳 비발디 타워에서 눈먼 돈으로 있게 될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상금은 상금으로만 존재하면 될 일.

헨리의 궤변에 결국 벤트의 마음이 기울었다.

“알겠습니다…….”

벤트가 긴 한숨과 함께 결정을 내렸다.

공식전에서의 명예와 상금, 그리고 비발디 타운의 시장직까지 잃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렇기 때문에 벤트는 차라리 평생토록 도전자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게 훨씬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그럼 이제 가 볼까요, 돈이 있는 곳으로?”

헨리의 제안에 벤트가 무기력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시장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 그러니 가서 볼일들 봐.”

“……알겠습니다.”

유능한 비서는 시장이 지금 어떤 기분인지 재빨리 파악했다.

비서와 하인이 물러나자, 벤트는 직접 앞장서서 타워의 가장 꼭대기 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헨리를 안내했다.

“전망이 좋네요.”

“……비발디 타워의 자랑이죠.”

이젠 어느 정도 체념한 듯싶었다.

공범자가 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강단이 필요했으니까.

이곳은 비발디 타운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해는 저물었지만 향락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길거리는 여전히 대낮처럼 환했다.

벤트는 품에서 특이한 모양의 열쇠를 꺼내 들었다. 그런 다음 책이 가득한 벽장에서 두꺼운 사전을 찾아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곳엔 숨겨진 열쇠 구멍이 있었다.

철컥!

열쇠를 넣고 돌리자 곧 거대한 책장이 현관문처럼 열렸다.

안쪽에는 통로가 있었고 두 사람은 비밀의 방으로 들어섰다.

파앗!

버튼을 누르자 컴컴했던 방에 불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번쩍번쩍!

불빛을 받은 금화 더미가 거대한 자태를 뽐내며 찬란하게 번쩍거렸다.

“정확히 10만 골드입니다. 하지만 이 많은 금화를 어떻게 가져가실 작정입니까? 큼지막한 1백 골드짜리 금화가 무려 1천 개나 됩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죠.”

하나에 무려 1백 그램이나 되는 백금화였다.

그것이 1천 개나 모여 있으니 그 무게만 해도 무려 1백 킬로그램.

무게는 어떻게 들 수 있다 쳐도 혼자서 옮기기엔 부피가 너무 컸다.

‘클레버.’

-예, 주인님.

‘전부 챙겨.’

-예, 알겠습니다.

헨리는 벤트를 뒤로 물렸다.

그런 다음 오른쪽 손바닥 위에 개방된 체스트로 1천 개나 되는 백금화를 모조리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슈슈슉!

‘백금화 1천 개가 확실한가?’

-네, 확실해요!

확인 작업까지 끝마쳤다.

헨리는 산더미처럼 쌓인 백금화를 집어삼킨 뒤 가볍게 손을 털어 보였다.

“대, 대체 어떻게?”

“이 정도 준비성도 없이 왔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 참! 그리고 이건 선물입니다.”

벤트에게 내민 것은 조그마한 종이였다.

“이게 뭡니까?”

“저를 불러낼 수 있는 호출권입니다.”

“호출권요?”

“저 같은 사람이 또 나타나지 말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또 나타나면 이 종이를 찢으세요. 그럼 제가 나타나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벤트에게 내민 것은 일종의 보험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과거의 섭섭함을 용서하는 면죄부였다.

‘이것으로 너를 완전히 용서하마.’

헨리는 비발디 타운에서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벤트를 선택한 이유는, 과거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 때문이었다.

헨리는 맹독을 마시기 전,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벤트에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

벤트는 헨리의 비공식적인 체스 제자였기에 겉으로 보기엔 두 사람은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였고, 덕분에 벤트가 헨리의 사람들을 지원해도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벤트는 거절했다.

헨리의 사람들을 맡아 주기엔, 귀족들의 후환이 너무나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있던 헨리도 그를 깊게 미워하지 않았다. 다만 약간의 섭섭함이 남았을 뿐이다.

“아, 참! 그리고 당분간은 여기에 머무를 생각이니 한동안 제 말을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요?”

“사설 마구간은 비용이 좀 세서 말입니다. 제 말한테는 미리 말해 둘 테니 당분간만 좀 부탁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벤트 경에게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신세를 지다니요? 이 타워에서 머무르시겠다는 얘깁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겁니다.”

헨리는 앞으로 지게 될 신세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그의 힘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은 분명했다.

‘밑천은 이만하면 됐으니 슬슬 진짜 장사를 시작해 볼까?’

과거의 케케묵은 감정은 이만하면 말끔하게 해결한 셈이었다.

* * *

볼일을 마친 헨리는 비발디 타워를 벗어나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헨리가 도착한 곳은 비발디 타워에서 가장 큰 투기장인 ‘천만황금’이란 곳이었다.

“천만황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방문 목적이 어떻게 되시죠?”

헨리는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직원에게 블랙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검치기 선수로 참가하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됩니까?”

“귀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손님께서 직접 선수로 참가하시나요?”

“그렇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귀인에 대한 예를 보인 직원은 다른 직원을 불러 대신 입구를 보게 했다. 그런 다음 ‘검치기장’에 헨리를 데려다주었다.

“선수 등록은 여기서 하시면 됩니다. 혹시 또 다른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이 정도면 됐습니다.”

안내를 맡은 직원이 돌아갔고, 헨리는 선수 등록을 하기 위해 옆에 비치된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작성한 서류를 받아 든 직원이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저…… 손님? 실례지만 신분 패를 좀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직원의 요구에 기꺼이 신분 패를 건네주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분명히 서류에는 러너급 검사님이라고 기재하셨는데 신분 패에 붙은 별은 3개인데요?”

“그래서요?”

“그…… 신분 패 뒤에 각인된 마크가 칼리번 요새가 맞는다면, 어떻게 러너급 실력으로 별을 2개나 획득하신 건지 여쭙고 싶어서요.”

헨리의 신분 패에 박힌 3개의 푸른 별.

하나는 무공훈장에 의한 준남작 집안의 것, 하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제도를 이행한 명예를 상징하는 것, 그리고 하나는 군 복무 동안 엄청난 공을 세워 얻은 새로운 ‘무공훈장’의 것이었다.

예컨대 직원이 하고 싶은 말은, 오러도 없는 러너급 검사가 어떻게 최악의 사선에서 ‘무공훈장’을 인정받아 별을 획득했냐는 것이었다.

“설마 지금 나를 의심하는 겁니까?”

상식적으로 복무 1년 만에 무공훈장을 획득하기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직원이 의구심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한낱 창구 직원에게까지 속사정을 모두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헨리는 짜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블랙 카드를 꺼내 보였다.

“아, 아닙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결례를 범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쯧.”

과연 비발디의 프리 패스였다.

직원은 블랙 카드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머리를 조아렸다.

“선수 등록이 완료되셨습니다. 이건 선수증입니다.”

선수증을 받았으니 이제 대부분의 준비가 끝난 셈이다.

‘살아생전 검치기는 또 처음 해 보네.’

검치기.

동등한 등급을 가진 두 선수가 같은 검을 나눠 받은 뒤 검이 부러질 때까지 서로 합을 겨루는 것.

이때 상대방의 검을 먼저 부러뜨린 이가 승리자가 된다.

검치기는 검사들 사이에서 시작된 실력 겨루기에서 유래한 게임이었다.

그러나 경기 시간이 짧고 경기가 화끈하다 보니 어느덧 비발디를 대표하는 투기 경기들 중 하나가 되었다.

헨리가 받은 등급은 F등급.

한 번도 경기를 치르지 않은 무전적의 선수란 뜻이었다.

‘등급이 높아질수록 구경꾼들이 몰리고 파이트머니가 높아진다. 그리고 베팅할 수 있는 금액 또한 높아지지.’

모든 투기장의 기본적인 룰이었다.

그리고 가장 높은 등급이 바로 S등급.

헨리는 이 검치기를 통해 벤트에게서 받은 10만 골드를 최대한 늘려 볼 작정이었다.

“어서 오세요, 경기 매칭을 하러 오셨나요?”

“그렇습니다.”

“F등급이시네요. D등급이 되기 위해선 F등급 선수 세 명, 혹은 C등급 선수 한 명을 상대로 승리하시면 됩니다.”

“만약 B등급이나 A등급을 꺾으면 어떻게 됩니까?”

“규정상 등급의 상승은 한 등급씩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귀찮은 구조였다.

헨리는 창구 직원에게 백금화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베팅액은 필요 없습니다. 대신 저한테 파이트머니를 걸겠습니다. C등급 이상 선수들 중 아무나, 저를 상대로 승리한다면 1백 골드를 지급하겠습니다.”

“예, 예?”

“안 되나요?”

“아, 아닙니다! 그럼 당장 조건을 띄우겠습니다.”

헨리는 하수들을 상대로 오랫동안 시간을 투자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투기장이었다.

‘소드 마스터’와 같은 엄청난 힘을 가진 이들 대신 어중간한 강자들이 돈을 보고 몰리는 곳.

소드 마스터 같은 진짜들은 자신의 힘이 가진 명예를 알기 때문에 좀처럼 이런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접수 직원이 파격적인 조건이 내걸자 조건을 확인한 수많은 선수들이 벌 떼같이 접수처로 몰리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요!”

“어허! 내가 먼저 왔는데 무슨 소리야!”

“떨거지들은 빠져!”

무려 1백 골드였다.

B등급 선수가 한 번도 패하지 않고 한 달 내도록 경기에서 승리해도 결코 손에 쥘 수 없는 돈.

그렇기 때문에 한동안 돈맛을 보지 못한 이리들에겐 그야말로 먹음직스러운 고기였다.

“저, 저기, 헨리 선수! 도전장이 이만큼 몰렸는데 어떡하시겠어요?”

창구 직원이 난감해하며 헨리에게 묻자 도전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헨리에게로 몰렸다.

헨리는 산더미처럼 쌓인 접수증들 중에 무작위로 한 장을 뽑아 들었다.

접수증을 본 헨리가 말했다.

“다마엔이 누구지?”

“이야호!”

그러자 수많은 인파 속에서 한 사람이 뛸 듯이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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