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출가 (1)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저주와 약속을 교환한 그날 헥터의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뭐? 낮에는 제국 검술을, 밤에는 나의 검술을 익히겠다고?
“그럴 수밖에 없네.”
-힘들 텐데. 검술이란 건 익히면 익힐수록 버릇처럼 몸에 길들여지는 것이거든.
“처음부터 두 가지 버릇을 들이면 되네.”
-크크크, 백날 말해 봤자 직접 한번 겪어 보는 것이 훨씬 낫겠지. 그럼 날 따라 자세를 취해 봐.
헥터는 손수 시범을 보여 가며 자신의 보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인가?”
-폼은 그럴싸하군. 하지만 이미 서클 스텝이란 것에 익숙해져 있으니 쉽지만은 않을 거야.
“노력하면 되네. 아, 참! 이 보법은 이름이 뭔가?”
-보법이 그냥 보법이면 되지, 굳이 이름이 있어야 하나?
“그럼 자네의 이름을 따 헥터 스텝이라고 부르도록 하지.”
-좋을 대로.
자기의 보법에 붙일 이름인데도 정작 당사자인 헥터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교육은 계속되었다. 확실히 헥터 스텝은 익히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미 서클 스텝에 버릇이 길들여진 것도 이유였지만, 방어를 중점으로 하는 서클 스텝과는 달리 헥터 스텝은 매우 변칙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
춤을 연상케 하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결코 부드럽지 않고 절도 있는, 몹시 날카롭고 예리한 춤이었다.
-어떤 놈들은 보법이 고고해야 한다고 말하지. 동작이 간결해야 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고. 맞는 말이야. 하지만 결국 검술의 밑받침에나 쓸 보법인데 겉치레 따위를 신경 써서 뭐해?
붕!
헥터가 자신의 주먹을 창처럼 내지르자 망자의 시린 한기가 헨리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나의 검술은 오로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래서 수비적인 골든의 검술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게지.
제국 검술과 헥터 검술의 극명한 차이점.
헥터는 그 차이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헨리를 가르쳤다.
그렇기 때문에 헥터의 무예만 제대로 익힌다면 제국의 그 어떤 검사도 두렵지 않을 게 분명했다.
* * *
새벽이 깊도록 수업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힘든 줄도 모른 채 헨리는 헥터의 가르침에 빠져들었다.
이것만 익히면 베른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부터!
벌써 수십 번이나 다시 헥터 스텝을 놀리는 헨리를 보며 검왕은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지루한 명계의 어둠에서 소일거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헨리의 수업을 오락거리 정도로 여기지 않고 진심을 다해 가르쳤다.
그가 빨리 성장해야만 자신의 부활이 하루라도 앞당겨지리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 뒤의 일이었다.
-잠시 쉬었다가 하지.
“후.”
털썩.
허벅지가 당기고 발끝이 아렸다.
원 안에서 제한적으로 움직이는 서클 스텝과는 달리 움직임의 대부분이 속임수로 이루어진 헥터 스텝은 정해진 범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클린.”
휴식이 주어지자 헨리는 클린을 사용해 비 오듯이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정말 황제를 죽이고 싶은 모양이로군.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헨리를 보며 헥터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크크크, 노력은 절대 배반하지 않지. 마법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검술은 갈고닦을수록 강해지는 것이니까.
“마법도 마찬가지야.”
-그래…… 그건 그렇고, 그럼 자네가 목표로 하는 그 베른이라는 꼬맹이를 쓰러뜨리고 나면 그 후에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앞으로의 행보를 묻는 헥터의 질문에 헨리가 가볍게 대답했다.
“당연히 오러를 익혀야겠지.”
검술에 관심을 가진 까닭, 동시에 자신의 유일한 약점이었던 나약한 육체를 보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
바로 오러였다.
-크크크, 이제 겨우 걸음마를 떼는 주제에 오러라니. 역시 자네는 사람을 웃기는 것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
“쓸데없는 소리.”
헥터가 괄괄하게 웃으며 헨리를 놀렸다. 어린 제자의 귀여운 야망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러를 깨칠 때쯤이면 나는 마검사가 되어 있겠지.”
헨리는 마법과 오러를 동시에 익힌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다.
-오, 그러고 보니 말이 그렇게 되는군. 이야, 이거! 그럼 나는 대륙 최초의 마검사의 스승이 되는 건가?
마검사.
이따금씩 소설 속에나 등장하는, 대륙 역사상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전설 속의 존재였다.
그만큼 마법과 검술의 길은 극명하게 갈렸으니까.
하지만 어느 어리석은 흑마술사 덕분에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소드 마스터가 마도사급의 마법을 다룬다니. 놈들에겐 엄청난 재앙이겠어.
“말은 바로 해야지. 마도사급이 아니라 대마법사를 능가할 텐데.”
-입만 살아 가지고선, 이제 그만 일어나서 다시 자세 잡아!
미래에 대한 상상은 헨리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헨리는 잠 한숨 자지 못한 채 아침 식사를 하러 가야 했다.
* * *
“하하, 이럴 수가…… 제가 졌습니다.”
멀찍이 날아간 베른의 검.
그 검을 보고 베른이 못 당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이긴 건가요?”
“그렇습니다. 도련님의 완벽한 압승입니다.”
베른이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자 헨리는 그제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 달.
베른을 완벽하게 압도하기까지 딱 세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목검을 거둔 헨리가 베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승자가 패자에게 청하는 악수.
하지만 헨리에게는 존경과 감사의 의미를 둔 악수였다.
악수의 의미를 알아챈 베른 또한 기분 좋게 헨리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도련님도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지난 세 달간, 헨리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펼치며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다.
낮에는 제국의 검술을 익히고 밤에는 헥터의 검술을 익혔다. 그리고 틈만 나면 체력 단련을 하며 찢어진 근육을 회복시켰다.
그야말로 기계 같은 삶이었다.
하지만 노력이 배신하지 않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헨리의 노력은 빛을 발했다.
헥터를 만난 지 딱 세 달이 되었을 때, 헨리는 제국 검술과 헥터의 검술 두 가지 모두를 버릇처럼 익히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영지를 벗어날 때가 됐군.’
목표로 하던 베른을 무너뜨렸다.
그는 소드 익스퍼트 유저였지만 베테랑 검사였고 전쟁에 참여했던 전쟁 영웅이었다.
그런 그를 검술로써 제압했으니 더 이상 영지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악수를 나눈 직후였다.
“하하, 이거 패자의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예?”
“몇 달 전의 보법 때도 그렇고 이제는 완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도련님은 천재가 분명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제까짓 게 천재라니요.”
“아닙니다. 자부하건대 도련님은 천재가 분명합니다. 분명히 제가 가르쳐 드린 것은 제국 검술이 고작인데 도련님은 그것을 변형시켜 새로운 스타일의 검술을 만들어 내지 않으셨습니까?”
아마도 헥터의 검술을 말하는 것이리라.
헨리는 베른에게 제국 검술을 배우는 동안 그와 대련을 나눌 때마다 헥터의 무예를 섞어 사용했는데,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헨리도 보법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헥터 검술을 사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 가지 검술은 하나의 버릇이 되어 새로운 스타일의 무예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헨리만의 독자적인 무예가 만들어진 셈이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베른의 질문.
헨리는 저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다음 단계를 위한 선택을 묻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이곳에 남아 부족함을 보충하고 싶지만 겸손보다는 욕심이 더 크네요.”
“하하, 검사라면 당연한 선택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오러는 단순한 수련으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검술의 다음 단계. 당연히 오러였다.
게다가 오러의 터득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스승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이라니요, 말씀만 하시지요. 어떤 부탁이든지 모두 들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래서 말인데, 저는 이제 영지를 벗어나 군대에 지원하려고 합니다.”
“군대에요?”
“예. 혹시 스승님께선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제도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면 혹시 그 귀족의 의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것이 맞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귀족들의 도덕적인 모범을 위해 가진 힘을 나누어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제도적인 의무.
만약 힘을 가졌다면 힘을, 돈을 가졌다면 돈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제도였다.
“하지만 우리 가문은 그 제도의 대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적어도 백작가 이상부터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제도를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족 중에서도 힘 있는 상위 계층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제도였다.
이것은 베른의 말대로 적어도 백작가 이상에게만 적용되는 제도로, 해당 가문은 국가에 일정량의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하지만 선대 황제가 죽은 후 이 제도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제도의 대상이 되는 의무자들은 일부러 양자를 입양하여 직계 혈통 대신 양자에게 그 의무를 부여할 수 있게 됐다.
그 의무란 군역을 의미했는데, 군역을 해결하면 제국에 기부해야 할 거액의 돈이 굳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의무 대상에서 제외된 자들은 이 제도를 출세의 수단으로 삼았다.
군대에 자원할 경우 백작 위 미만의 계급 또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무를 짊어질 수 있게 되고, 전장에서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면 의무를 다한 뒤 자신의 몸값 역시 올라가기 때문이다.
특히 제국에서 가장 높게 인정해 주는 가치는 명예였기에 이들은 이 제도를 좀 더 활용하고자 했다.
‘전쟁 무공 출신 준남작이 다시 한 번 군역을 짊어지면 엄청난 명예가 된다. 그러면 어디서든 대접받는 존재가 되지.’
헨리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의견을 피력하자 그 뜻을 이해한 베른이 기특하다는 듯이 미소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생각해 두신 지원지는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이미 뜻을 굳힌 곳이 있습니다.”
“그게 어딥니까?”
“바로 마물의 숲입니다.”
“마, 마물의 숲요?”
헨리의 대답을 들은 베른의 눈동자가 일시적으로 확장되었다.
마물의 숲이라면 말 그대로 마물들이 대거 나타나는 대륙의 끝이 아닌가.
“안 됩니다! 마물의 숲은 너무 위험합니다. 영주님께서도 반대하실 게 뻔합니다.”
“허락은 이미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조건이 바로 스승님을 검술로 이기는 것이었는데, 방금 전에 그 조건을 막 달성했습니다.”
“여, 영주님이 말씀이십니까?”
“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제국에는 사선이라는 말이 있다.
그곳에 가면 반드시 죽는 곳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곳 세 곳을 바로 3대 사선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마물의 숲은 그 3대 사선 중에서도 최악의 사선이었다.
“영주님과 다시 의논해 봐야겠습니다. 저는 반대입니다.”
“말리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제 뜻은 확고하니까요.”
헨리 또한 고작 몸값이나 올리자고 마물의 숲에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헨리가 되찾아야 할 수많은 아티팩트들 중 가장 필요한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지원하려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