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검왕의 재래 (3)
붉은 점은 보통의 붉은 점이 아니었다. 마치 맹수의 눈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빛줄기였다.
하지만 헨리 또한 눈빛으로 귀족들을 벌벌 떨게 하던 인물이었다.
“헥터 마이어.”
헨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붉은 점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강령술서에 적힌 대로, 이름을 잊고 지내던 망자가 자신의 이름을 다시 기억해 내고 제 모습을 찾아 가기 시작했다.
명계의 틈으로부터 한기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새어 나오는 한기와 함께 그림자 같은 실루엣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죽은 검왕, 헥터 마이어였다.
“헥터?”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서 헨리는 다시 한 번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팟!
그가 눈을 뜬다.
마치 시체가 되살아나듯, 눈을 뜬 헥터의 눈동자에는 보름달 같은 안광이 번뜩였다.
그가 말했다.
-간만에 맡아 보는 바깥공기로군.
그는 골방의 죄수처럼 말했다.
그러나 곧 헨리의 손에 들린 자신의 약혼반지를 발견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 반지, 어디서 난 거지?
“내가 쭉 가지고 있었지. 오랜만이네, 헥터 경.”
-우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었던가? 나는 그대가 초면인 것 같은데.
헥터는 자신이 죽은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척 보기에도 어린 청년.
인연이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유품을 가지고 있었기에 헥터는 제법 점잖은 태도를 보였다.
“그럼, 우린 꽤나 강렬한 만남을 가졌었지. 오랜만에 다시 인사하겠네. 헨리일세.”
헨리의 인사에 헥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헨리? 그 마법사 헨리를 말하는 건가?
“그렇네.”
-농담이 지나치군. 내가 기억하는 그는 자네와 닮은 구석이 조금도 없어. 어째서 그를 사칭하는 것이지?
아무리 반지를 가지고 있다지만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헨리는 자신의 마지막을 가져갔던 사람이니까.
“거기에는 제법 긴 사정이 있지. 그나저나 이렇게 증표가 있는데도 구태의연한 설명이 필요한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헨리의 말대로 자신의 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많은 것들을 대변할 수 있었다.
헥터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본 헨리가 말했다.
“너무 갈등할 것 없네. 나는 자네가 아는 그 헨리가 맞으니. 나는 한 번의 죽음을 경험했고 그 이후에 되살아났네. 그것도 흑마술에 의해서 말이야.”
-흑마술? 자네 보통 마법사가 아니었군. 흑마술까지 다룰 줄은 몰랐네만.
“내가 다루지 않았네. 어느 젊은 흑마술사에 의해서 소생된 것뿐일세. 이 육체가 바로 그 술사의 것이지.”
-그렇군.
그는 딱히 의심을 표출하지 않았다. 전생에 가졌던 담백한 성격 그대로였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네. 자네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대륙 통일을 이뤄 냈다네.”
-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나도 자네들의 끝이 궁금했었거든.
“말로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네. 우리는 제국을 건설했고 영웅이 되었지만, 자네가 쓰러뜨린 골든의 아들놈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거든.”
-골든의 아들? 그렇담 그 녀석이 현 황제겠군.
“무능한 폭군이지.”
-크크큭, 적은 내부에 있다더니 그 영웅들이 무능한 폭군에게 죽임을 당하다니, 내 죽음이 다 아까울 정도야.
가벼운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것은 신랄한 비판이었다.
부끄러운 사실이었지만 헨리 또한 그 사실을 담백하게 인정했다.
“자네 말이 맞네. 분하고 아까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지. 하지만 지금의 나를 보게. 이렇게 다시 한 번 복수의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나를 불러낸 용건이 뭔가? 힘을 합쳐 그 아들놈의 목이라도 따자고?
“그럴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자네를 소생시킬 능력이 없네.”
-그렇다면 나를 왜 불러낸 건가? 설마 망자를 상대로 부활을 자랑하려는 건 아니겠지?
“나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게.”
-뭐?
생각지도 못한 부탁에 헥터는 잠시 동안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살다 보니, 아니 이젠 죽었군. 아무튼 이런 우스갯소리도 없구만. 자네는 분명히 마법사가 아니었던가?
“우연찮게 얻은 몸이 기사의 핏줄을 타고났더군. 그리고 마법은 이미 충분하네. 벌써 마도사의 경지에 도달했으니까. 하지만 이번 생에는 검에도 관심이 가서 말이야.”
-하하, 나를 죽인 마법사가 나에게 검술을 구걸하다니.
그는 얼마 동안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헨리는 그런 헥터를 긴장 어린 눈빛으로 응시했다. 아직 그의 입에서 본심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 과거의 일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사과하겠네.”
-사과? 무슨 사과?
“전쟁 말일세.”
-뭐? 푸하하핫!
헨리의 대답을 들은 그는 다시 한 번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런 헥터를 헨리는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보기보다 감성적인 면이 있군그래. 이봐, 그때는 자네 말대로 전쟁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전하와의 신의를 지켰고 그녀의 명예 또한 지켜 냈다. 기사가 전장에서 죽었는데 왜 자네들을 미워하겠는가?
“이거……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군.”
-예부터 마법사들은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서 탈이었지. 그보다 전리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네만?
“전리품이 아니네, 자네를 기리기 위해 챙겨 둔 것이지.”
-나를 기려? 자네는 나를 여러 번 웃기는군. 혹시 마법사가 아니라 시인이나 바드였던 건가?
“그 골든을 이긴 남자였네. 보기 드문 검사이기도 했고. 자네를 기릴 이유는 충분하네.”
-자네는 감성적인 데다 꽤 낭만적인 구석까지 가지고 있구만.
“자네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니까. 무려 검왕이었지 않은가?”
-흥! 죽어서야 불리게 된 이름 따위.
약간의 립서비스였다. 이 정도 서비스야 부탁하는 입장에선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헥터가 말했다.
-좋아. 자네의 그 부탁, 들어주도록 하지. 하지만 그냥은 가르쳐 줄 수 없네.
“쉽게 승낙하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 원하는 바를 말해 보게.”
-대화가 빨라서 좋군.
“그래, 원하는 게 무엇인가?”
-나도 자네처럼 살고 싶네.
“……?”
-말 그대로네. 나 또한 이생에 미련이 많은 몸. 자네는 훌륭한 마법사이고 이미 한 번의 부활을 경험했으니 나를 다시 살리는 것 또한 쉬울 것 아닌가.
망자가 삶에 대한 집착이 많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뻔한 조건을 내걸 줄은 몰랐다.
헨리는 잠시 생각한 끝에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그건 좀 어려워.”
-그렇다면 거래는 없던 걸로 하지. 아쉬운 건 자네니까.
“그래…… 그럼 어쩔 수 없군. 다른 방도를 찾아보는 수밖에. 잠시나마 즐거웠네.”
-어, 어?
생각보다 빠르게 포기하자 오히려 당황한 건 헥터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포착한 헨리가 잽싸게 여지를 남겼다.
“왜 그러나?”
-아, 아니! 그러지 말고 나도 자네처럼 부활만 시켜 주게. 그렇게만 해 준다면 그 황제 놈의 복수도 도와주고 검술도 가르쳐 주겠네.
“제안은 고맙네만 나 또한 기연으로 되살아난 몸. 지금은 고작해야 이렇게 망자의 혼을 불러내는 게 고작이라네.”
-허튼소리!
“자네 말대로 아쉬운 건 날세. 그런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거야 그렇지만, 끄응…….
“자네의 뜻을 모르는 바가 아닐세. 하지만 강령술과 소생술은 엄연히 다른 마법. 게다가 현재의 나는 흑마술에 대한 지식도 전무한 상태고 그런 상태에서 하나뿐인 자네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네.”
솔직하게 진심을 털어놓자 그 모습을 본 헥터의 표정이 더더욱 어두워졌다.
-그렇군…….
하지만 망령이 가지는 삶에 대한 집착은 엄청난 것이었다.
-정말 방법이 없겠는가? 이번에 다시 명계로 돌아간다면 나는 또 어두컴컴한 어둠 속에서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네.
“명계는…… 생각보다 더 끔찍한 곳이었군.”
-그러니 나를 제발 좀 도와주게. 살아생전 신에게 그토록 기도를 드렸건만, 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네. 죽음 이후에는 끝없는 어둠과 절망뿐이었어.
이것은 비단 헥터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마터면 헨리 또한 어둠 속에서 살아야 했을지도 몰랐으니까.
헨리는 어둠을 두려워하는 옛 친구에게 진한 동정심을 느꼈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한 끝에 대답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바, 방법이, 방법이 있는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자네도 알다시피 완전한 부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네. 나 또한 8서클의 경지를 이루었지만 부활과 불로불사의 비밀을 풀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흑마술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지도 모르지.”
-계속해 보게.
“자네는 네크로맨서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네크로맨서?
흑마술조차 생소한 그에게 있어 네크로맨서는 처음 듣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것은 헨리 또한 비슷했다.
오리지널 네크로맨서의 존재란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올 만큼 아주 보기 드물었기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네크로맨서는 망자를 되살려 언데드로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언데드? 그건 리치들이나 하는 짓이 아닌가?
“비슷한 맥락이긴 하지만 좀 다르다네. 리치는 죽음을 통해 영생을 추구하는 존재. 그들은 한정된 영역에서 허울뿐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고작이네.”
-그럼 네크로맨서는?
“그들은 리치처럼 보이긴 해도 엄연히 인간이네. 마법사로 치자면 마도사쯤에 해당한다고 해야 하나, 그들이라면 자네를 언데드로 되살려 줄지도 모르지.”
-지금 나더러 언데드가 되라는 건가?
“1차적인 방법일 뿐이네. 계속해서 그들을 쫓다 보면 부활에 대한 단서를 잡을지도 몰라.”
헨리가 찾아낸 돌파구. 그것은 언데드로의 부활이었다.
물론 헥터의 육신은 이미 모두 썩었을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다면 유골이라도 찾아낼 테니 언데드가 되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잘 생각해 보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더 낫잖은가?”
헨리가 언데드로의 부활을 제안하자 헥터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알겠네, 그래도 어둠보다는 언데드가 나을 테지. 대신!
“뭔가?”
-절대 약속을 잊어선 안 되네! 약속을 어기면 자네에게 죽음의 저주를 내릴 테니까. 지금 나에게 맹세하게.
“기사가 저주는 무슨, 걱정하지 말게. 약속은 꼭 지킬 테니.”
아무리 검왕이라고 한들 고작 강령술의 잔재가 무슨 저주를 내리겠나 싶었다.
그런데 헨리가 약속을 수락한 순간이었다.
부우웅.
‘음?’
헥터와의 약속을 수락하자마자 손에 쥐고 있던 헥터의 약혼반지에 붉은 빛이 감돌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반지에 나의 사념을 불어 넣었네. 지금의 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야만 했네. 그러니 너무 기분 나빠 하지는 말아 주게.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힘없는 망자가 이런 식으로 저주를 내릴 줄은 몰랐다.
순간 미간이 아주 조금 일그러지려 하였으나 헨리는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해하네. 그럼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자네를 불러낼 테니 그때마다 잘 좀 부탁하겠네.”
-물론이네, 내 모든 것을 자네에게 전수해 주도록 하지. 아니, 미룰 것도 없네. 당장 오늘부터 수련을 시작하도록 하지.
헥터가 활활 타오르는 의욕을 보여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만 있었으니까.
‘이래서 흑마술이 위험하다는 것이었군.’
의욕을 보이는 헥터와는 달리 헨리는 새삼스레 흑마술의 위험성에 대해 깨달았다.
하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깟 저주 따위, 약속만 잘 지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