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자, 그럼 설명을 마저 하지.”
[쟤 더 물 먹일려고? 자살 안 한 게 용한데?]
에일린은 아예 하얗게 질린 채로 벽을 딱따구리처럼 머리를 부딪쳐대고 있었다.
입으로 중얼거리는 ‘죄송합니다’라는 단어는 흡사 불안장애를 연상케 했다.
“내가 위로하면 더 심해지는 거 아닌가.”
[그건 그렇지.]
“내버려둬. 저런 건 시간이 약이니까.”
저런 건의 의미가 에일린의 자기혐오를 나타내는 건지, 에일린 본인을 나타내는 건지 헷갈리긴 했지만.
어느 쪽이든 딱히 상관없었기에 아무도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뭘 말하려고 했더라...”
“...그게 혹시 광전사 때 썼던 흑마법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을까요?”
마법사인 아메리로서는 그 기묘한 흑마법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마기로 만든 마법이 마기의 존재를 해치운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었다.
“오, 고마워요. 형수.”
“그니까... 그런 호칭은...”
형수라는 호칭에 아메리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리오스와는 건전히 사귀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비밀로 해두자 말한 상태였다.
자신은 명문가이긴커녕 천대받는 하프 엘프에 갓 흑탑주 대리가 됐을 뿐이다.
“부담스러우면 그만두긴 할게. 근데 어차피 지금 가주 권한이 전부 나한테 있는지라 그리 눈치는 안 봐도 될 텐데.”
게다가 유한 글라디오는 그렇다 쳐도 저 까탈스러운 마르켄까지 아무 거부감 없이 아메리를 보고 있는 시점에서 형수라는 호칭은 허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그 우선 흑마법부터 설명해주십쇼!! 순애나르도 님!!”
“남의 이름 사랑스럽게 개명하지 마라.”
막판에 헛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흑마법에 대해서는 확실히 설명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걸 말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마인을 공략한 방법과 마왕의 위험성을 한번에 이해시킬 수 있을테니까.
“우선 너희가 죽고, 성황도 노환으로 죽어서 신전이 와해된 뒤를 설명할 필요가 있겠네.”
{...신전이 와해됐다니...}
앤젤라 뿐만 아니라 루미네도 적잖이 충격받은 눈치였다.
레오나르도가 살아온 세계를 보면 신전이 멀쩡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지만 신앙을 절실히 믿는 그들로서는 가히 충격과도 같은 설명이었다.
“그때부터는 개판 시작이었어. 다들 후발주자가 되기 싫어서 하나둘 마기를 받아들였거든.”
“...그런...”
레오나르도가 크리스를 붙잡고는 오열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라인하르트가 무승부를 냈음에도, 인류는 승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스스로 패배와 항복을 택했다고.
“개판은 계속됐지. 지들이 인간을 초월했다며 ‘마인’에서 ‘마족’이라는 호칭 쓴 시점에서 인간성은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으니까.”
상상하기도 끔찍한 이야기였다.
인간과 마인의 구도가 아예 뒤집히는 경우까지 이르렀다는 건, 인류가 완전히 패배했다는 의미다.
자신들의 실수와 실책이 눈덩이처럼 불어올라 그런 사안을 초래했다는 것에 고개를 들 면목조차 없었다.
“근데 재밌는 전개가 시작된 거야.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도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그걸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그건 마인에 대한 비웃음임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자조의 쓴 웃음이기도 했다.
[본인들끼리 치고 박기 시작했구만.]
이야기의 맥락을 가장 먼저 파악한 건 현자였다.
냉소적인 현자의 말에 레오나르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경악했다.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 쓰레기들이 잘 단합해서 세계평화를 이뤘으면 나도 진작에 마인했겠지. 애초에 인간 자체가 하자 덩어리인데, 그 쓰레기의 극단적인 진화형인 마인이 문제가 없었겠어?”
인간비판적인 발언이었지만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인간들도 전쟁으로 피로 얼룩진 역사가 있으니, 마인에게도 그런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각 지역의 마인 수장들이 서로 마왕하겠다고 난리를 피워대니, 단순한 개판이 개싸움판으로 변했어.”
거기서 반격의 여지가 생긴 것인다.
“까놓고 싸우는 방식이 거칠어서 그렇지 내가 한 건 엄연한 암살이야. 서로 싸워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피해를 입었을 때 즈음 목을 베는 역할이지.”
그런 상황을 있도록 조성한 것은 자칭 현자 에일린, 남은 인간들이 마인으로 전향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건 성인 루미네가 해내었다.
“그 결과, 광전사나 사령왕 같은 마인의 탈을 쓴 전쟁병기들도 어찌저찌 맞붙을 수 있었던 거야. 공략법 없이 싸우면 나라도 죽어.”
레오나르도 입장에서는 모르면 질 만한 싸움이라고 격려하는 차원이었지만, 이 말을 듣는 이들은 오히려 본인들이 오만했음을 깨달았다.
저런 괴물들의 죽일 공략법을 만들고 실천한 전사조차 스스로의 역량을 객관적으로 판단했으니까.
[그럼 그 흑마법은...]
“마인하고 흑마법사들이 서로를 족치려고 만든 거야. 흑마법 자체는 그 녀석들하고 죽도록 싸우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된 거고.”
역설적인 이유였다.
마치 인간의 악의가 여과없이 그대로 마인에게로 전이된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왕이 더 문제인 거야.”
그 악의를 어둠 속에서 맨눈으로 마주본 레오나르도는 그 이상을 상정할 수 있었다.
이보다 더한 최악이 있을 걸 상상할 수 있었다.
“...확실히 마왕은 이보다도 강할 테니...”
[그것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냐.]
현자도 이해한 눈치였다.
지금 마왕이 위험한 이유는 그저 강해서만이 아니었다.
“저것들이 서로 견제를 안 하고, ‘왕’의 명령에 따라 협력해서 일사불란하게 싸운다고 생각해봐.”
“...재앙이네요...”
문자 그대로 재앙이었다.
광전사 같은 괴물들이 군대 형식으로 밀고 온다면 인류 전체가 단합해 싸워도 승산이 없었다.
“아마 그 괴수들을 한번에 끌어내는 건 무리일 거야. 가능했다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 다 죽었겠지.”
만약 1회차 때 마인들을 전부 소환할 수 있다면 진작 해서 쓸어버렸을 것이다.
안 했다는 시점에서 당장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야. 생각 이상으로 지능적이야.”
그나마 여유가 있다는 의미였지만 말이다.
대군을 앞에 두고 광전사를 소환한 시점에서, 마왕은 전략적인 판단력이 결코 낮지 않았다.
“사령왕 수준이 아니라면 대부분 숫자로 압살하는 게 가능해. 개체를 늘리는 뱀파이어도, 환각을 쓰는 계열의 적들조차 물량 앞에서는 장사 없거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군사는 통제할 수만 있다면 많을수록 유리한 전투였다.
전쟁이 아닌 토벌이라면 물량전의 이점은 수직으로 상승하고 말이다.
“그런데 일부러 그 자식은 부하가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마지막 방에 왔을 때 광전사를 소환했어.”
“...방심을 유도했다는 말입니까?”
마인 토벌에 잔뼈가 굵은 마르켄은 전투 상황을 되짚었다. 확실히 과정이 순조롭다는 감각에 군사를 한번에 집결시키는 만용을 부렸다.
“그래. 광전사는 애초에 혼자 싸워도 불리하지만, 여럿이서 싸우면 더 불리한 적이거든.”
굳이 부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다.
광전사는 일반 병사의 시체마저 회복 포션과 근력 강화제로 사용하는 괴수, 상식까지 먹어치우는 폭식의 상징이었다.
“솔직히 드래곤 비늘이 있어도 아리아스필 혼자 싸웠으면 힘들어도 이겼을걸.”
“...아,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혼자서...”
“겸손 떨지 마. 나한테는 그거 기만이거든.”
그걸 본 현자는 ‘지도 밥먹듯이 기만하면서’라면서 속으로 되뇌었다. 직접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건 레오에게 지은 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그건 그렇군요. 전략적으로도 우위에 있다니...”
현자의 말이 이해되었다.
지금 마왕은 인간의 지성을 얻은 상태, 그건 다르게 말하면 지혜를 얻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뭐 그건 당장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야. 지금은 이해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게 나아.”
읽는 것조차 어려운 난제는 뒤로 두고 이해할 수 있는 문제부터 푸는 게 현 상황에서는 합리적이었다.
[그게 어떤 건데?]
“아리아스필의 살인미수 이유 궁금하지 않아?”
모두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궁금한 눈치였다.
애초에 아리아스필이 거부감이 없는 시점에서 살해가 목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외의 이유를 명확히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검 속에서 들어가기 위해서였죠.”
유일하게 함께 성검에 들어간 아리아스필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아리아스필도 중상이였고, 마침 나도 죽기 직전이었거든. 도박이었지만 확인해야만 하는 게 있었어.”
“그럼 왜 재판에서는 그 말을...”
“크리스 다친 것도 모른 채로 너희들이 나 꼴받게 해서.”
순식간에 이 다물어지는 마법과 같은 설명이었다.
“어쨌든 그 결과 알고 싶은 건 알 수 있었지.”
안 죽을 거라고는 믿고 있었지만 집단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가슴 졸인 도박이었다.
그에 대가로 얻은 정보는 양질의 확신을 주었다.
“예상은 했지만 아리아스필이 지금까지 만나온 용사는 루벤이 아니더라고.”
“...네....네?!”
모두가 그 한 마디에 놀랐다.
유일하게 경악의 정도가 낮은 건 두 영령들과 아리아스필 본인 뿐이었다.
아리아스필 본인조차 다른 의미로는 경악하고 있었다.
‘...알면서 루벤이라고 놀린 거였구나...’
일부러 루벤이라는 호칭을 강조하면서 아무 관계 없다며 자극했다는 걸 알게 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루벤이 아니면 다른 용사라는 거지?]
“어, 초대 용사라기 보다는 선배 용사라는 표현이 알맞겠지.”
선배라는 용사에 다들 미약하게나마 감을 잡은 눈치였다.
“...설마...”
“죽을 리가 없다고는 생각했는데 그런 식으로 명줄이 붙어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레오나르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리아스필의 성검으로 손으로 가리켰다.
“1회차의 아리아스필이 성검에 있어. 정확하게는 의식 뿐이겠지만.”
“...그런...”
다들 뭐라 말해야할지 진심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그건 1회차 아리아스필와 깊은 면식이 있는 레오의 존재 때문도 있었지만, 지금 옆에 있는 2회차의 아리아스필의 존재도 헤아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회차와 2회차가 아예 다른 인격으로 분리된 경우는 이례적이다 못해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그럼 설마 그렇게 아리아스필 용사를 죽이려한 이유는...}
모두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리아스필은 1회차 때 마왕과 함께 공멸했다.
그 결과로 인류는 마기에 굴복하고, 레오나르도는 끝없는 사투에 몸을 던지게 된다.
만약 그걸 전부 보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면 그에 대한 자기혐오는 상상을 초월할 터.
게다가 아리아스필의 질투심은 알다시피...
“근데 그게 다인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아리아스필 본인마저 그렇게 생각할 때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부정했다.
“...아니에요?”
“아니라기보다는 그게 전부인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단순히 자기혐오나 질투로 인한 살의라고 하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그게 사실 전부라면 내가 기억을 잃은 타이밍에 네가 죽어갈 때 살릴 필요는 없잖아.”
“...그건...”
확실히 그렇다.
갖은 분노와 화를 폭언으로 쏟아냈지만, 정작 처음 아리아스필과 만났을 때는 바로 죽이지 않고 살려서 성검 밖으로 내보냈다.
분명 가만히 두었다면 그대로 죽었을 텐데 말이다.
“...레오나르도 님이 혹여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까 해서 그런 게...”
“그런 거라고 하면 이제 와서 죽이려한 건 이상하단 말이야.”
그것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2번째, 3번째에 갔을 때 성검 속 아리아스필은 어떻게든 아리아를 성검 내부에 가두고자 했으니까.
“...아리아스필이 널 싫어하는 건 맞지만, 아리아 네가 단순히 죽는 게 아니라... 모종의 기회라고 해야 하나, 자신보다 낫길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실망한 것...”
“어... 저... 잠시만요.”
레오나르도 본인이 성검 속 아리아스필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했을 때, 크리스가 머리에 과부하가 온 듯 어지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정말 죄송합니다만...아무래도 제 이해력과 문해력으로는 구별하기는 도저히 힘들어서...”
크리스는 자신이 무례한 말을 꺼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본인의 부족한 지혜로는 도저히 이 대화를 파악하고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성검 속 아리아와 이곳에 있는 아리아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크리스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만, 사실 이건 다른 사람들도 속으로 품은 생각이었다.
다만 상황이 상식을 넘어설 만큼 무거운 만큼 건드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호칭을 구분할 필요는 있겠습니다. 제 독해력으로도 고유명사가 겹치는 것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딸아이인 아인마저 구분하지 못하고 그리 말하니 이젠 넘어갈 수도 없었다.
[어려울 거 있나? 그냥 1회차, 2회차로 구분해서...]
{현자! 그러니까 당신이 연애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꼭 이곳에 있는 아리아스필 양이 후발주자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 두 망령의 주책으로 일은 커지고 말았다.
“...그럼 성검 속 아리아와 현실 속 아리아라고 하면...”
“근데 성검에 있는 아리아가 가짜는 아닐 텐데...”
“그럼 단발아리아와 장발아리아는 어떨...”
“투구를 썼다 들었으니 그것도 참...”
어떻게 보면 시시한 내용이었으나 다르게 보면 두 아리아스필의 정체성을 나눌 중요한 문제였다.
두 명 다 소중한 가족인 아리아스필이었기에 쉽사리 호칭을 단언하기가 어려웠다.
“...그럼 정...아닙니다.”
아리아스필은 스스로가 폭주할 걸 자각하며 자체적으로 입을 닫았다.
이런 막중한 사안 속 유치하게 정실과 첩실을 논할 만큼은 아리아스필은 철이 없지 않았다.
물론 꼭 그 호칭으로 정해야겠다면 정실은 지금 레오의 옆에 있는 자신이 하는게 타당하지만 말이다.
정실이란 곁에 있어주는 여성이 하는게 올바르다. 그게 정실이다.
누가 봐도 그렇지 않은가.
결국 레오나르도가 백아리아와 흑아리아로 제안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아마 그건 아리아스필이 평소 하얀 옷을 즐겨입고.
그녀가 제일 사랑하는 레오나르도가 검은 옷을 즐겨입는 게 크게 작용되었을 것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블루아카이브에서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시로코입니다.
물론 검은 시로코 좋고, 하얀 시로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