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어둠 속 그 존재는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었다.
완성도가 높은 껍데기를 심장 외에는 버려야했다는 실책은 뼈아플 수밖에 없었지만, 수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래서 인간은 재밌어.]
한없이 냐악하고 연약한 생명인 주제에 선과 악을 지닌 유일한 지성을 지닌 존재.
때문에 빛에게 끝없는 방해를 받았지만, 덕분에 이보다 더 재밌는 꼴을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릇으로서는 아직 쓸 수 없은 것 같은데~?]
이런 양산형보다 완성도가 높을지언정 당장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련된 영혼의 순도가 너무 높은 나머지 이런 병렬의 방식으로 주도권을 잡는 건 불가능할 정도니까.
[하지만 조건은 알아냈으니 상관없지.]
어째서 1회차의 레오나르도가 그릇으로서 적합하지 않았는지 감이 잡혔다.
[...단순하지만 까다롭겠어.]
용사 아리아스필을 살린 채로 제압하는 것.
가정만으로도 쉽게 엄두가 나지 않는 조건이었으니까.
하지만 방법은 있었다. 인간의 유일한 무기인 지성은 지금 자신에게도 존재했다.
[오리지널을 처리한 방식이면 괜찮겠지만 말이야!]
도저히 죽일 수 없었던 그릇의 원본을 처리한 방식을 쓰면 될 것이다.
자신이 태어난 혼돈에 집어던지는 것.
성검을 지워버렸던 방법의 연장선이었다.
홀로 여러 목소리를 내던 그 존재는 그리 독백했다.
***
성혈투술의 수업은 즉각적으로 시작되었다.
현재로서 시간이 촉박한 쪽은 라인하르트, 용사 아리아스필은 어떤 조건이든 무슨 대가를 지불하든 이 비기를 배우는 게 우선이었다.
“우선 저번에 멋대로 베낀 걸 다시 해봐.”
저번 날의 민망한 일은 검은 기억 저편으로 보내버린 레오나르도는 그대로 훈련을 개시했다.
특별한 비술을 가르침에도 거리낌 없었는지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백주대낮에서 수업은 진행되었다.
“...지금요? 그게 위험한 거...”
“잘 알면 그때는 왜 했어?”
아리아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레오는 혀를 차대었다.
아직까지도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앙금은 매서운 눈빛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수업에 오기까지도 레오는 몇 번이고 짜증을 토해내기 바빴다.
본인이 가르쳐주겠다 먼저 제안했으면서 가르치는 게 싫다며 몇 번이고 불평을 내었으니 그보다 더한 신경질은 찾기 힘들었다.
“괜찮아. 심하다 싶으면 도중에 멈출 거고, 장시간 쓰지 않으면 루미네도 바로 치료할 수 있으니까.”
지금 보여달라는 분량은 고작 해봐야 30초, 아무리 심각해도 30분과 같은 부작용은 체감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 미리 문제를 파악해두는 편이 전체적인 문제 해결에 진척이 도움이 될 것이었다.
“...네, 알겠어요...! 그럼...!”
망설임은 없었다.
어떤 고통이나 고난에도 각오한 바였다.
그것도 레오나르도가 직접 내린 명령이라면 더더욱 신뢰해야했다.
“...으윽...”
몇 번의 호흡이 오가고 아리아스필의 몸이 점차 붉게 달아올랐다. 호흡은 가빠지고 얼굴을 포함한 전신의 피부가 핏기가 지나치게 진해진다.
공기 중으로 전해질 정도로 뜨거운 체온이 대기로 전해진다. 아리아스필은 사고가 빨라진 만큼 몸의 감각과 통각이 민감해진 것을 체감했다.
“...흠...”
그런 아리아스필을 레오나르도는 유심히 보기만 할 뿐이었다. 바람 한번 불어도 몸에 바늘이 꽂히는 통증이 느껴짐에도 레오나르도는 ‘그만’이라는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보는 사람들이 덩달아 걱정할 정도로 레오나르도는 침묵할 뿐이었다.
아리아스필이 쓰러질 정도로 거친 숨이 내쉬어도, 몸이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붉어져도 침묵은 이어지기만 했다.
‘...이제... 좀 버틸 만해...’
그런 상황에서도 아리아스필은 불평 한번하지 않고 성혈투술을 유지했다. 고통스럽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더 유지해도...
푸우욱!!
“자, 그만.”
아리아스필의 흉부와 복부 사이에 새끼손가락으로 찔러넣어 호흡을 강제로 멈췄다. 아리아스필은 그대로 쓰러져 캑캑대며 성혈투술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건...!”
그런 가혹한 수업에도 모두 직접적으로 따질 수 없었다. 정도가 지나치긴 했지만 아무 의미 없는 폭력은 아니었다.
[왜 이렇게 사디스트같이 애를 가르쳐? 흑심 더럽게 챙기네.]
현자만 빼고 말이다.
“아인아, 이 양반 끌어내렴.”
“예, 알겠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현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아인에게 익숙하다는 듯 부탁했다. 아인도 대수롭지 않게 마법의 시초인 인간문화재를 붙잡고 끌어내었다.
“...켁...쿨럭... 왜...”
“너 분명 ‘이제 아픈 게 적응됐네.’라고 생각했지?”
몇 번 사례를 들린 듯 호흡을 고르던 아리아는 레오의 말에 당황해버렸다.
마치 독심술이라도 해서 속마음을 직접 읊어낸 것 같은 광경.
평소엔 둔감하면서 이런 부분에선 귀신과도 같이 알아내는 레오나르도였다.
“...그게 문제...인가요? 적응한 게 아닌...”
“그래, 아드레날린이 과다분비해서 통각만 없어졌고, 네 근육이며 신경, 기타 장기들이 저온 화상으로 익어가고 있는 게 적응이라면야 내버려둘게.”
참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근거와 논리였다.
일부러 재수없게 말만 했을 뿐, 타당한 이유인 만큼 부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 아리아스필의 부상이 지독했던 깔닭은 아드레날린으로 통각이 무뎌져 기술을 장시간 사용하고, 점점 근육과 신경이 통각조차 못 느낄 정도로 망가진 것에 있었으니까.
“그래도 조금은 살살...”
“곱게 가르쳐서 해결할 문제였으면 이렇게 안 했어. 이건 아파야 알 수 있는 문제거든.”
그런 냉혹한 지적에 리오스는 무안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레오나르도는 아리아스필이 정말로 다치지 않길 바랬기에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인데.
자신이 뭣도 모르고 나서는 것일까.
“그리고 까놓고 말해 누군 몇십년 갈아 넣어서 쓰는 걸, 어떤 천재는 보자마자 쓰는 것도 배알이 꼴려서.”
당사자인 아리아스필이 있는 앞에서 저런 말을 하자 그런 생각이 오래가지 못하는 리오스였다.
“아직 네가 맞을 차례는 아니니까 나가있어.”
“...아...옙...”
그렇게 흉악스러운 예고를 하며 레오나르도는 말만으로 리오스를 보내버렸다. 아리아스필에겐 이다지 모질고 잔인한 행위가 따로 없었다.
“...다시 하나요?”
그런 매서운 교육에도 지지 않겠다는 듯, 아리아스필은 각오를 다지며 그리 물었다.
애초에 깨어났을 때 사과했을 때부터 몇 대 맞는 것 정도는 각오한 참이었다.
오히려 감사하게 맞을 것이다. 이 또한 받아드리면 이겨낼 수 있을 시련일지니.
“아니, 대강 문제는 파악됐어.”
아쉽... 아니 다행히도 레오나르도는 무차별한 구타를 시도할 정도로 악인은 아니었다.
“넌 성혈투술의 근본을 몰라.”
“...근본이요?”
사실 근본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스필은 곁눈질로 배운 걸 즉각적으로 사용한 것이었으니 근본을 아는 게 더 괴상한 일이었다.
“애초에 이건 통각에 적응하는 게, 통각에 인지하는 걸 전제로 만든 기술이야. 아픈 게 기본값이 되야한다고.”
성혈투술은 사용에 능숙해야 할지는 몰라도, 익숙해서는 안 되는 신성술이다.
생명체에게 있어 통각이 익숙해진다는 것은 죽음에 경각심이 없어진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레이널드 님께서는 좀... 자유롭게 쓰시지 않나요?”
순간의 호기심으로 무심코 낸 질문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넘어갈 테지만 레오나르도의 성격이라면 내가 너랑 같냐며 머리에 당수를 날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리아스필은 행여나 한 대 맞을까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질문을 내었다.
“난 자살 판정이어서 자동으로 멈추니까 상관없어.”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숨겨진 비법을 실토했다. 다만 초연한 태도와는 달리 내용 자체가 무겁고 끔찍한 지라 쉽사리 반응하지 못하는 아리아와 일행들이었다.
“...자살 판정이라니...요?”
“나 내가 자결 안 하는 전제로 금제했었다고 말했잖아. 그거의 연장선이지.”
알다시피 레오나르도의 금제는 ‘자결하지 않는다’라는 조건을 걸었다.
그리고 성혈투술은 부담과 후유증에 비해 본인의 의지가 전제로 실행되는 기술.
그렇기에 성혈투술의 부작용으로 죽는 것은 자결의 일종으로 판정을 받아 강제적으로 능력을 해제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런 끔찍한 응용법에 다들 차마 뭐라 감상을 말할 순 없었다. 스스로에게 잔인한 것도 정도가 있었다.
그런 건 이미 사람의 삶이라 말할 수도...
“그러니까 넌 통각에 더 신경을 써야한다는 거야. 알겠어? 까딱하면 아예 찜처럼 익어버릴 거니까.”
분명 격없는 표현이었지만 아리아를 포함한 이들은 레오나르도가 고의적으로 저런 표현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에 대한 걱정을 돌리기 위해 일부러 미움을 살 만한 발언을 찾아 쓰는 것처럼.
“자, 이제 그럼...”
레오나르도는 옆쪽에 준비해놓은 커다란 양동이와 투박한 단검을 준비했다. 아까부터 아리아도 어울리지 않는 두 도구의 용도가 궁금하던 차였다.
도대체 어떤...
“손목을 그어서 여기에 피를 가득 담아봐.”
“...네?”
자해하라는 요구에 혈액을 모으라는 괴기스러운 명령을 듣자 아리아스필은 순간적으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맞는 건 버틸 수 있다쳐도 이런 기행을 바로 실행하는 건 제아무리 아리아일지언정 무리한 요구였다.
“네가 버틸 수 있는 출혈량을 정확히 알아야 전반적인 기술부터 시작해 혈액 방출도 어떻게 가르쳐야할지 알 수 있을 거 아냐.”
앞으로의 훈련 시간 단축을 생각하면 효율적인 판단이었나, 그것이 상식적이며 이성적이라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르게 말하면 죽기 직전까지 피를 뽑아내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으니 쉽게 받아드릴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레오 기사님...!”
“레이널드.”
집요하게 가명을 고집하는 레오나르도에게 성자 루미네는 답답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 네! 레이널드 님! 이건 성자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레오나르도가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해도 성자로서 용사에게 그런 무자비한 일을 방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왜? 이것만큼 빠른 방법은 없어. 몸사릴 때가 아니라고.”
“아리아스필님은 중상에서 회복하신지 얼마 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분께 과다출혈을 강요하는 건 의료적으로도 문제입니다!!”
만분의 일의 확률이긴 했다만 이걸 실행하다 실제로 죽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아직 아리아스필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지는 24시간 도체 지나지 않아 있었으니까.
“네가 치료하면 그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도 용사는 자기보신을 해야한다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앤젤라도 이런 훈련법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아무리 강해지기 위해서라지만 정도라는 것은 지킬 필요가 있었다.
“...아, 두 분 다 진정하세요. 전 괜찮으니까...”
아리아만이 다시 공포를 무릅쓰고 단검을 들려는 찰나,
“하...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시간은 좀 걸리지만 안정적이긴 하지.”
의외로 레오나르도는 순순히 한 수 접어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정말 하기 싫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건 덤이었다.
“...하... 이건 진짜 하기 싫은데...”
“...들어보고 결정해도 될까요? 다른 게 문제라면 제가 참고 견딜 테니까...”
“내 입장에서도 곤란하거든. 그거 때문에 루미네 너한테 따귀까지 맞았구만.”
그 말에 모두 일제히 루미네를 바라보았다.
어지간한 일로는 화조차 잘 안 내는 선인과도 같은 루미네가 따귀라니.
상상이라도 가당치가 않은 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기에 그러는 것일지 모두 짐작도 안 갔다.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데.”
레오나르도는 아리아스필의 눈과 시선을 마주치며 잠시 뜸을 들였다. 설마 죽는 것보다 더한 일이 있기에 각오을 하라는 것일까.
아리아는 퍼뜩 그런 두려움이 느껴졌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레오 본인에게도 상처가 되는 일일까.
차라리 그런 거라면 자신의 피 따위는 얼마든지 내줄 수 있었다. 죽는 것조차 각오했는데 과다출혈이 대수랴...
“...나랑...무, 무슨...”
레오나르도의 말투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쪼그라들어있었다. 기억상실한 뒤론 어떤 무례도 눈치를 보지 않았던 레오가 저렇게 소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리아조차 처음 들었다.
“...그... 죄송해요. 잘 못 들었는데...”
놀리는 것이 아닌, 정말로 듣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말내용을 확인하기엔 소리의 크기도, 말의 발음도 적절하지 않았다.
“나, 나랑...!”
레오나르도는 비명을 지르기라도 하듯 큰소리를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었다. 잔뜩 붉어진 얼굴은 마치 사춘기를 갓 지난 소년을 지니고 있었다.
“너 나랑 무슨 관계냐고!!”
“...어...네?”
대답할 내용 자체도 어려웠지만,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관계를 묻는다니, 그리고 그건 이미 답했을 텐데...
“...제 목표...”
“그거 말고! 여...연인 같은 거냐고!”
그 한 마디에 아리아는 뭐라 반응하지 못하고 얼굴이 잔뜩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연인이라니, 지금 래오는 기억을 상실했음에도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인가?
“...할머니와 형이 괴상한 소리를 해서 확인차 묻는 거야! 아니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해! 그래야 내 쪽에서 가르치기 편하니까!”
그런 것치곤 레오나르도는 얼굴을 돌린 채로 입꼬리를 위쪽 방향으로 꿈틀거리기 바빴다.
마치 어떤 대답을 기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모습을 보자 아리아스필은 용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삿된 욕망을 잠깐 품고 말았다.
그냥 저대로 기억상실한 채로 두면 저런 까칠하면서 사랑스러운 레오를 평생 볼 수 있는 건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최근 들어서 감기 기운이 심하네요. 계속 기침하고 콧물이 나와서 피곤합니다.
(참고로 마지막 아리아의 독백은 많이 순화한 겁니다. 그리고 만약 다른 수련 방법을 바로 말했다면 독백은 순화해도 19금 처리가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