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가 저런 눈을 내보이는 때는 몇 번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오싹했던 때는 레오가 자신의 첫키스 상대를 제대로 오해했을 때뿐.
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애들장난으로 보일 정도로 흉흉했다.
눈빛만으로 정말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게...”
아리아스필의 머릿속에는 설명의 우선순위가 뒤죽박죽으로 뒤섞인다.
성혈투술을 따라했다가 쓰러진 것을 변명해야할지, 아니면 방금 전 용사와 다시 만난 것을 설명해야할지 정리도 안 되어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지금은 레오의 화를 푸는 게 우선이었다.
“...이게 조금 복잡한데...”
“이봐! 늙은이!! 자살하신 용사님 깨어나셨단다! 괘씸한 놈들 불러!!”
우연인지, 고의인지는 몰라도 아리아가 다시 입을 열자 레오나르도는 즉각적으로 고성을 내지르며 말을 끊었다.
당황스러운 공기 속 레오가 부른 ‘영감탱이’가 일행들을 데리고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리 지르지 마라. 안 그래도 정신사나워.]
현자는 고개를 똑바로 든 채로 말 한 마디를 지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레오의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그건 단지 레오가 두려워서가 아닌, 볼 면목조차 없었기 때문이라는 걸.
아리아스필은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 왔네? 다들 걱정되기는 했나봐?”
“...당연하지...”
“퍽이나 당연하겠지. 라인하르트의 끈끈한 가족애를 내가 모르겠어? 하하!”
굴욕적인 모욕에도 글라디오는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레오나르도가 저리는 것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고, 반박할 염치도 제대로 없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지? 아리아스필?”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설명해보란 듯, 레오나르도는 면박을 주듯 다시 질문했다.
누가 봐도 무례하며 분노한 상황.
차라리 용사에게 찢어죽는 편이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연신 머리를 채운다.
“...성혈투술을 쓴 건... 당장 생각나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서였어. 잘했다곤 생각지 않아. 어떻게든 돕고 싶어서... 화나게 해서 정말... 정말 미안해...!!”
변명은 짧게 요약했고 사과는 굵게 끝났다.
제대로 된 대화가 통하진 않았지만, 아리아스필이 생각낸 최선은 이것 뿐이었다. 설사 매도를 당한다고 해도, 하물며 몰매를 맞는다 해도 납득할 수 있었다.
“왜 사과하냐?”
사과로 듣자마자 흥분했던 레오나르도의 목소리가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어... 사과해야...”
“애초에 내가 왜 화를 내야 하는데?”
당황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진심으로 의문스러운 투로 질문하자 아무도 대답지 못했다.
치료와 수술을 끝낸 후로 끝없이 짜증을 쏟아내던 본인이 저런 식으로 되물었으니 황당해서라도 대답할 수 없었다.
설마 바로 사과를 들어서 마음이 바뀐...
“그저 용사인 아리아스필 네가 내 기술을 멋대로 따라하곤 멋대로 자멸해선 잘못하면 죽는 건 기본에 운 나쁘면 반영구적인 장애를 얻을 뻔한 것일 뿐인데? 내가 왜 화를 내겠어? 안 그래?”
그런 생각들을 품인 이들은 극한으로 비꽈 조롱한 레오의 속사포에 마음에 치명상을 피할 수 없었다.
레오나르도가 진심으로 화나면 오히려 진정한다는 것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직관해 각인할 수 있었다.
“...아리아는 레오, 아니... 레이널드 님과 가족분들을 구하기 위해서...”
“시리카 씨? 그래서 명줄도 붙여주고 장애도 없게 치료해줬잖아. 그 정도면 등가교환은 성립된 것 같은데?”
할 말은 없었다.
실제로 레오나르도가 없었더라면 아리아스필은 그대로 죽었거나 살아도 산 게 아닌 상태로 남았을 것이다.
루미네조차 수술이나 치료엔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채로 보조하기 바빴고, 그나마 앤젤라만이 레오의 수술 방식과 미래의 치료법을 이해해 제대로 협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앤젤라도 자각하고 있다. 만약 자신이 물질적으로 존재한다 할지라도 완치시킬 수 있다는 단언도 할 수 없을 정도니까.
“...그렇지만 아리아는 자넬 구하기 위해 다친 거잖...!”
“이런 말하긴 참 그런데 말이야.”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던 레오나르도는 이윽고 영혼 없는 눈동자를 내보였다.
그건 여태껏 자신이 구한 사람들에게 주로 봐왔던 시선이었다.
“내가 언제 구해달라고 했나?”
“...뭐...?”
“난 구조 요청을 한 기억은 없는데...”
그 한 마디에 마르켄이 달려들어 레오의 멱살을 붙잡았다.
자신들을 향한 모욕은 납득하고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말만큼은 도저히 참아낼 수 없었다.
아리아도 자신이 좋자고 그런 지옥에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래, 넌 지원 요청을 하지 않았지! 하지만 네 형이 구조 요청을 하더군! 그래서 간 거다! 그것마저 모욕하는 거냐!?”
“그건 대단하네. 고결한 희생 정신이야.”
인정했지만 납득한 게 아니었다.
아리아는 저 말투에 자연스레 한 용사를 연상해버렸다.
“그 결과가 만약 수술 실패 시 전신의 혈액 응고 및 혈관 융해, 그리고 전신 근육 파열 및 화상으로 융해된 장기를 적출해야할 상황만 오지 않았더라면 말이야.”
직접 수술을 집도한 레오나르도로서는 지금 저렇게 허리를 숙여 사과하는 것도 기적처럼 보였다.
수술에 실패가 없었다 한들 저런 재생력은 천재라는 단어로도 설명치 못할 정도로 경이로웠다.
“...내가 진심으로 빡친 상대가 아리아스필 뿐일까? 너희들도 죽여버리고 싶은 건 매한가지거든.”
레오나르도는 멱살을 잡힌 손을 뿌리치지도 않은 채로 마르켄에게 위압을 전했다. 수없는 전장을 누빈 마르켄을 물론, 다른 이들마저 기세만으로 눌려버렸다.
“용사가 죽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
지금 눈에도 생생하다. 천천히 바닥으로 침몰해가는 세계의 최후를 잊을 수가 없었다.
선과 악이라는 게 한없이 무의미해지는 잿빛의 세상은 마음까지도 바래게 했다.
“만약 아리아만 죽었다면 우선 신전과 라인하르트의 관계가 개판이 되겠지. 당연하게도 성검마저 분실한다면 아예 암묵적 적대 관계가 될 테고.”
예상 따위가 아니다. 레오에겐 그 일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있었다.
“그리고 황실하고도 아주 어색해질 거야. 아예 이번 기회에 가문을 신뢰하지 않는 기사단까지 흡수해 병합해버릴 수도 있겠지.”
아리아스필이 죽고 성검마저 실종되자 라인하르트는 몰락을 겪었다. 분명 남은 이들이 이겨냈더라면 이야긴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계기는 용사의 죽음에 있었다.
“그리고 웬 말뼈다귀 같은 놈을 후계 용사라면서 내세울 수도 있을 거야. 성검은커녕 보는 게 안쓰러운 실력에 배경으로 된 게 뻔하지만 말이야.”
명예적인 단결에겐 티끌만 한 도움이 됐을지 몰라도, 실질적인 전장에선 하등 도움도 안 되는 겁쟁이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새낀 뒈진 이후에는 너도 나도 용사 하겠다면서 도적질, 강간, 마약까지 자유롭게 증진하는 문화가 발달되지만 그렇다 치자고. 어?”
용사로 나서는 놈들도 고루고루 정신이 나갔다.
자기가 용사 아리아의 제자라느니.
아니면 아리아의 친아들, 혹은 친딸.
정말 또라이인 것들은 아리아가 여신으로서 자신을 사도로 임명했다고 지랄할 때였다.
“...그게 미래입니까?”
“과거지만 미래가 될 뻔했지.”
흥분하는 것도 지쳤는지 레오나르도는 지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열을 내는 것도 이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용사라는 건 애초에 인간이 아니라 인류의 수호자여야만 해. 이런 식으로 싸워서야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격이라고.”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었지만, 틀렸다 부정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자 아리아스필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용사는 인간이 아니라, 인류의 보존을 위해 존재하는 사명이란 말이다!]
어째서일까.
그 용사와 레오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 상반된다는 감각도 지울 수 없었다.
“...그게... 사실 아까 설명했어야 했는데...”
어쩌면...
“다시... 성검 속에서 선대 용사님을 뵙고 왔어요.”
레오나르도도 그 용사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들었다.
***
“뭐 그런 놈이 다 있어?”
그 추측은 레오의 반응 하나에 뿌리째 흔들렸다.
“...짐작 가는 거 없어...요? 그러니까 예전에 뵈었다던가...”
“글쎄다. 너 말고도 자기가 선택받은 용사라면서 날뛴 것들이 한둘 아니여서. 설마 거기에 성검에 선택받은 진퉁이 있었나?”
오히려 너무 짐작이 가는 이들이 많아서 헷갈리는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정확히 누구냐고 꼬집어서 확인하기에도 시원치 않은 것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그 정도에요...?”
“아리아스필 네 이름으로 동상이고, 위인전이고, 도시에 종교까지 있을 정도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허락은 받았나 몰라.”
고인모독을 넘어 능욕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에 반응하기 어려운 라인하르트 일가였다. 지금 눈앞 아리아스필 본인이 살아숨쉬고 있었으니까.
“아니면 저 두 귀신들처럼 사실은 성격에 하자가 있다거나?”
무례했으나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직접 보는 것과 달리 현자와 앤젤라는 마탑과 신전과 같이 각각의 업계에서는 가히 신과 동등할 정도로 존경과 추앙을 받았으니까.
[누가 성격에 하자가 있다는 거야?]
{맞습니다. 그런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그런 비유와 가정은 불쾌하군요.}
[눈이 삐지 않은 이상, 앤젤라보단 내가 낫지.]
{현자아아?!}
현자가 레오의 말을 바로 증명해주자, 앤젤라는 분노한 듯 작은 현자의 머리를 팔로 쥐어감았다.
{약해진 기회에 버릇을 고쳐주록 하죠!!}
라고 말하면서 은근히 소년 현자의 얼굴을 가슴에 밀착시키는 성녀 앤젤라였다.
[야야야! 내 머리에 네 겨드랑이 냄새 베잖...끄아아악! 우와아악!!]
“봤지? 저런 사람들을 이끈 용사라고. 잘 생각해봐. 정상이겠어?”
레오가 엄지로 저들의 추태를 가리키자 아리아도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저런 인간들이 어떻게 세상을 구한 것일까 정말 의문이 들었다. 설사 구했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위인들로 기록된 것일까.
“...하지만... 그래도 용사님이시니까...”
“넌 방금 그 용사한테 영혼까지 썰려죽을 뻔했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오나르도는 연신 자신의 턱을 쓸어내렸다. 무언가 고민에 빠진 것처럼 담배를 쥔 듯한 동작까지 취하는 것 덤이었다.
“뭐 까놓고 나 같아도 기껏 살려놓은 후계자가 개복치마냥 죽어서 되돌아오면 괘씸해서라도 그러겠지만.”
“...아...아무리 그래도 그건 말이 좀 심해잖아요. 아리아도... 레이널드 님을 구하려고 한 건데...”
“그래, 죽을 뻔했고 그것 때문에 세계 개판될 뻔했지만 당장은 살아도 있고 결과도 좋으니 그러려니 할게.”
리오스의 변호에도 레오는 빈정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모두들 사실 이젠 레오나르도에 대해 썩 호의를 가지기 힘들었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비꼬려는데 안달이 나있고, 게다가 나름의 합당한 원인도 존재했기 때문에 대하는 것은 더욱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성검을 소각로에 버리기라도 할 거야?”
“...그건 아니잖아요! 우선은...”
아리아스필은 성검을 뽑아들며 날을 자신의 얼굴에 비춰보았다. 솔직한 심정으론 지금도 성검을 드는 건 꺼림칙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성검의 안치소에 가볼 생각이에요.”
“하지만 루벤님께서 정말 너를 탐탁치 않게 여기신다면...”
글라디오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존경하는 초대 용사님께서 자신의 딸을 그렇게 경멸하며 찢어죽인다는 가정을 자기 입으로 말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있어선 아무것도 알 순 없어요. 어쩌면 저희가 모르는 더한 비밀도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 용사는 자신에게 분노했지언정 거짓을 꾸며낸 것 같진 않았다. 어쩌면 천성적으로 거짓말이 능숙치 못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그러셔? 마침 잘 됐네.”
“...네? 마침 잘 됐다니...”
당황할 여유도 안 주겠다는 듯, 레오나르도는 전혀 다른 태도로 한 가지 제안을 건네였다.
“넌 그동안 나한테 성혈투술을 배워야겠어.”
“...네? 네?! 왜 갑자기...?”
배우기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 쪽에서 무릎을 꿇고 간청해서 전수해달라고 부탁해도 모자랄 정도였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시 가문을 사퇴하겠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는데...
“착각하지 마. 그냥 해주는 것도 아니고, 조건도 있으니까.”
“...하지만 레...이널드님은... 절...”
“어차피 내가 안 가르쳐줘도 네 마음대로 가져다 쓸 거잖아. 그러다 죽으면 전세계적으로 곤란해. 그럴 바에야 직접 가르쳐서 안정성 높이는 게 내 속에도 편하거든.”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마르켄과 레오를 번갈아바라보았다. 묘하게 둘이 말하는 방식이 비슷했다.
“그리고 성검 안치소도 네가 20살은 돼야 갈 수 있잖아. 내일부터 계산해도 3달하고도 21일이나 남아있구만. 뭐가 문제인데?”
“...어...그게 잠시만요...?”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다. 그것도 지금까지의 레오나르도의 태도의 의미를 뒤짚을 수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아, 계속 구시렁댈 거면 나도 됐어. 아주 자체적으로 팽형에 쇼크사하고 싶다는데 내가 굳이 말릴 이유도 없으니까...!”
“제 생일을 기억하고 계신 거예...요?”
방금 레오나르도는 정확하게 아리아스필이 스무 살이 되는 날짜를 계산해내었다. 그건 다르게 말하면 생일을 모르고서야 알아낼 수 없는 내용이었고.
“...그...그게 뭐...?! 어쩌다 기억할 수도 있잖아!”
[20년도 더 돼서 안 만난 고인의 생일을?]
애초에 생일이라는 것은 상대방에 관심이 없고서야 알아내지도, 기억해내지도 않는 정보였다.
그런 말에 레오나르도는 궁지에 몰렸다는 듯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긴 뭐 치매 오기 전에도 기억력은 괜찮았으니까. 쟤랑 10월 21일에 만났다고 기억했을 정도이니...]
안 그래도 열받는 현자가 변호해주려는 듯 말하자 레오나르도는 발끈해버리고 말았다.
“뭔 헛소리야!? 그보다 3월 21일에 만났거든...”
떨떠름하게 끝맺은 말 뒤에 남은 건, 일행들의 집중된 시선 뿐이었다.
싸늘하거나 날카롭진 않았다.
다만 차마 매도하기 어려운 미지근한 눈빛이 레오의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리오스: 그때였어요. 제 이빨이 전부 썩어버린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