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뷔라는 것을 아는가?
같은 장면이 여러번 반복되는 걸 체감하는 현상으로, 이는 일상적으로 종종 있지만 때때로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자주 발생하는 현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으흐흐...흑...”
4년 전 일이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그때도 분명 자신의 부모 일만 말했을 뿐인데, 갑자기 다들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었다.
마치 지금처럼.
“...미...미안합니다...!”
“죄송해요...! 아무것도 모르고오...!”
다시 신파극의 눈물바다가 일어났다. 다들 왜 이러는 것인지 레오에겐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들도 네크로맨서와 맞붙은 적은 있을 텐데 말이다.
그것도 마르켄이라면 몇 번은 넘게 있을 것이다. 근데 여기선 마르켄이 제일 많이 울고 있었다.
그랬기에 레오나르도는 혼자 동떨어진 채로 멀뚱히 일행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 일가가 초점을 둔 부분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런 마음으로 항상 우리를 대해왔구나...’
집행 기사들과 직접적인 인연을 만들지 않은 이유를 알 수밖에 없었다. 죽은 것도 모자라서 저런 사투까지 벌여야했으니 정신과 마음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왜 이러냐고요...! 우선 눈물부터 그치고...!”
“...이러고도 저흴 증오하지도 않는다니... 으흑...”
다들 울기 바빴다. 가면 안의 레오는 지극히 젊었다. 하지만 탈색된 흰 머리인 채로 오열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연민할 만큼 안타까웠다.
저런 것에 슬픔을 못 느낄 정도로 감정이 피폐해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사무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인아 왜들 이럴까...?”
유일하게 울지는 않은 아인에게 레오나르도는 조심히 물었다. 이럴 때만큼은 딸을 잘 키웠다고 생각한 레오였다.
“저도... 이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다만 너무 잘 키운 게 문제였다. 이렇게 감성적으로 다가갈 문제인가.
“왜애!! 왜 자꾸 레오나르도를 불행하게 만들려고 하는 건데!!!”
갑자기 레오는 만사가 불행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부정하기도 뭐하지만, 본인이 괜찮은데 타인들이 이러니 뭐라 장단 맞추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레오와 아인을 제외한 모두는 진심으로 울기를 바빴다. 심지어 아인마저 어째서인지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아...아! 그리고 보니 저 용인화에 대해 설명했었나요!?”
레오나르도는 이 시궁창으로 떨어져버린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용인화... 그러고 보니... 아까 팔이 용으로...!!”
크리스라면 걸려들 줄 알았다. 이럴까봐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차라리 우는 것보다는 이런 유치한 이야기라도 하는 게 답이었다.
“...그건 어떤 겁니까?! 지금도 가능합니까?!”
“...아뇨. 그건 언데드 드래곤과 싸웠을 때 몸에 생긴 저주에요.”
회귀 전에 새로운 기사단이 창립된다.
용혈기사단, 용의 피를 잇는 기사단이 만들어진다.
본래는 발굴해낸 드래곤 하트에서 얻은 발상으로, 용의 심장에서 마력을 추출해 하급 병사에게 주입해 마인에 대응하는 상급 기사를 즉시 배출해내는 아이디어였다.
“...획기적인데... 미래에는 그런 발전된 기술도 있군요.”
“발전된 기술 따위가 아니예요.”
레오나르도는 그 기술에 경멸하는 눈치였다. 애시당초 신기술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애초에 흑마법의 일종이었어요.”
드래곤 하트에 아무리 마나가 농축되어 있다고 해도, 안정된 마나를 무한히 뽑아내 주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양도 한정되었고, 마나의 주입도 안정되지 않았으니까.
그랬기에 용혈기사단의 단장은 정말 미친 생각을 해버렸다.
“용의 심장은 따지고 보면 용의 장기이니... 그걸로 용의 키메라를 만들어 피를 뽑아내자는 아이디어였죠.”
“...그걸 실행했다는 말인가...”
결과적으로 그건 실패 반, 성공 반이었다.
용혈을 이겨내지 못한 인간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살점 덩어리가 되었고, 버텨낸 인간은 용인으로서 용력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런 곳에 있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드래곤의 자아가 폭주한 거였죠.”
“...폭주했다는 건...”
레오나르도는 설명을 도울 겸, 자연스럽게 위험물질인 검집을 탈취해 자신의 손에 쥐었다.
검집을 잡아들자 영상이 송출되며 거대한 비늘의 몸체를 지닌 무언가가 실제적으로 움직인다.
[...필멸자들이...! 감히...! 내 힘을 능멸하는가!!]
그 자리에 있는 모두 용의 말에 얼어버렸다. 기억 속 영상임에도 용언에는 그 이상의 무게가 있었다.
늑대에게 느끼는 산양의 감정처럼.
그들은 얼어버렸다.
[다 죽은 게 필멸자 이 지랄.]
그리고 영상 속 레오나르도의 한 마디에 풀어져 버렸다. 가면을 쓴 어둑시니는 허실하게 저 고룡에게 조소했다.
“...저 땐... 좀 철이 없어서...”
다만 조소의 내용이 너무 격이 없어서 반응이 뭐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싸늘했다.
[무슨 생긴 건 송곳니 달린 불알같이 생겨가지고, 으르렁거리니까 예전에 남자새끼 따먹힐 뻔한 흑역사 때문에 무섭긴 하다 야.]
“...좀 많이 없었습니다.”
모두는 조금 놀란 수준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레오나르도는 아니었다.
본디 흑역사는 타인이 보는 것보단, 타인을 보는 장면을 본인이 직접 보는 편이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널 보면서 생각하는 건데, 너 약간 알프레드 할아버지가 웃다가 쓰러질 때 생기는 주름 같이 생기기도 했다?]
[알프레드가 도대체 누구냐!!]
[왜? 알면 나 대신 명복에 제사라도 치러주게? 그럼 부조금으로 개쩌는 농담 생각해와. 지금 같이 만들까?]
레오나르도의 표정이 삽시간에 불타고 있었다.
“예? 레오나르도 군. 혹시 절...”
“안 불렀어요!!!”
살아있는 알프레드의 입을 다물게 하며, 레오나르도는 주변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다들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레오나르도 본인이 더 괴랄하게 반응했다.
“그 우린... 괜찮으니...”
[진짜 과장 안하고 찌그러진 리자드맨 항문이 말하는 것 같아 짜샤.]
“으아아아아!!!”
레오나르도는 괴성을 꽥꽥 내질렀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이미지가 차례차례 붕괴하는 것이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괜찮다. 레오나르도, 난 멋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는 레오나르도의 흥분을 막기 위해 어깨를 붙잡으며 위로의 의미로 엄지를 올렸다.
하지만 말내용은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는 것이 흠이었다.
“...그래서 어찌어찌 싸워 이긴 뒤에 팔에 용의 피와 저주가 스며들었어요.”
영상이 넘어가며 레오나르도가 누워있는 병실이 틀어졌다.
[...일어났나?]
[...또 너냐? 이 마녀가.]
에일린 템페리우스이었다. 그 옆에는 루미네 성인도 곁에 있었다.
[마녀라... 그럴 지도 모르지. 널 치료한 것은 괴물을 살린 것일테니.]
[...젠장...]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팔을 바라보며 욕설을 내뱉는다.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젠 이 팔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성해포로 덮어놔서 우선은 통제가 가능할 거에요.]
루미네가 덮은 성해포는 드래곤의 침식을 강제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그게 덮여져 있는 한 드래곤에게 지배당하는 것은 막아낼 수 있었다.
[...이런 팔로 여자를 안는 건 무리겠군. 안 그래?]
[...그...렇지... 않아요... 언젠간...]
[내 애를 밴다면 분명 괴물일 테니까... 나쁘지 않은 펀치라인이지?]
그 말에 전원이 레오나르도의 눈치를 살폈다. 영상 속 인물들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레오나르도의 안색을 살폈다.
“...레오나르도 님... 그 능력을... 멋있다고 생각한 것을... 진심으로 사죄하겠습니다. 그런 고충도 모르고...”
크리스의 사과에 라인하르트 가의 인물들은 ‘그걸 꼭 지금 입으로 말해야하나.’라고 깊게 생각해버렸다. 굳이 말하지도 않아도 될텐데 말이다.
“...괜찮아요. 어차피 몇년 지나고 완전히 치료됐거든요. 오히려 노화도 늦췄으니 제 입장에선 좋은 거였죠.”
“...하지만... 동료도 없이 홀로... 저런 고통을...”
“...예? 동료가 없다니요?”
레오나르도의 반응에 이번엔 일가 쪽에서 놀랐다. 여태까지 이들은 레오나르도가 홀로 방황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 혼자 다닌 거 아닌가?”
“아, 그건 맞는데요. 가끔씩 도움도 받고 그랬죠.”
레오나르도는 설명이라도 해주겠다는 듯, 관련 영상을 틀어주었다.
[...그만둬. 아저씨... 드래곤의 팔을 쓰면 못 돌아오게 돼. 죽는 걸로 끝나지 않아. 그 팔은 영혼을 좀먹어...! 완전히 괴물로...]
한 소녀가 레오나르도를 보며 울고 있다. 키는 아리아보다 한 치 작았지만, 성숙미가 느껴지는 귀족적인 소녀였다.
“...저 사람은...”
[공주에게 걱정받을 팔자라니... 이걸 좋다고 해야하나...?]
“...공주?”
그 호칭에 아리아의 표정은 굳었다. 손에 주먹이 쥐어지며 파르르 떨린다.
“아, 진짜 공주거든요. 정확히는 다음 세대이지만요.”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질투심이 스멀거리며 피어오른다. 추한 것은 아리아도 자각하고 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시기가 점차 부풀어오른다.
“그럼... 황녀...”
“경위는 복잡한데, 이 일 덕에 제국기사가 직접적으로 저를 죽이려 한 경우는 없어졌죠.”
레오나르도는 낡은 추억을 꺼내기라도 한 듯, 저 장면을 아련히 바라보고 있었다.
영상 속 레오나르도와 공주는 매우 돈독해보였다. 레오나르도는 용의 피 덕에 젊음이 유지되어 공주와 나이 차가 얼마 없어보였다.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애초에 화를 낼 일도 아니지 않은가.
레오나르도의 고생을 생각하면 오히려 걱정하고 상처를 어루만져주어야 마땅했다.
[걱정 말라고. 꼬맹아.]
영상 속 레오나르도는 성해포가 둘러져 있는 천을 잡았다.
[죽을 각오로 쓰는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영상 속 레오나르도는 천을 당겼다. 그리고 현실 속 아리아는 최대한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금제가 그걸 말해주고 있거든.]
이윽고 드래곤의 팔이 침식을 시작한다.
[...드래곤!!]
그렇게 외치며 레오나르도는 눈앞의 적들을 완력으로 베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는 그 황녀를 안아든 채로 적진을 돌파한다.
“...이게 첫 번째 동료였고...”
다음 영상이 틀어진다. 이번에도 아리아의 얼굴을 일그러진다. 이번 영상에도 여자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왜... 네가 성녀를 돕는 거냐?! 어둑시니!]
[누가 저런 되먹지 않는 여자를 돕는데?]
영상 속 레오나르도는 가면을 쓴 채로 성녀를 붙잡는다.
[난 단지 흡혈귀 네놈들이 쳐죽일 짓을 해서 쳐죽일 뿐이야. 겸사로 루미네 후계자가 어떤 년인지 보려고도 한 거고.]
이윽고 어둑시니는 검을 뽑는다.
[자, 쇼타임이다...!]
지금 있는 레오나르도의 얼굴이 불타오르는 건 덤이었다.
영상 속 레오는 말한 것과 달리 그 여자를 적극적으로 지켰다. 그렇게 그 자리에 있는 흡혈귀를 몰살하자, 성녀와 레오나르도는 서로를 마주본다.
[...저...어둑시니 님...]
[왜?]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웃기지 않는 소릴. 너 같은 건 죽어도 그만이야. 그저 루미네한테 진 빛을 갚은 거일 뿐이지.]
레오나르도의 얼굴이 다시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흑역사를 본다는 것은 역시 힘든 일이었다.
“...이분은...”
“루미네 님의 후계자에요. 본인은 그 사건 이후로 제대로 된 활동이 불가해서...”
“...그...그렇구나...요....”
아리아는 어색한 존댓말을 하면서 얼굴 근육이 풀리지 않게 유지했다. 하지만 손톱은 이미 주먹의 악력으로 살갗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속으로 연신 되새겼다.
‘질투하면 안 돼. 질투하는 건 추한 여자... 절대로 질투를 드러내면 안 돼. 레오나르도도 힘들었을 거야. 봐봐. 머리도 새하얗게 질렸잖아. 안 그래도 힘들었을 텐데, 이제와서 질투라니...’
으득...
“...아...아리아?”
아리아는 입술이 파랗게 될 때까지 깨문 채로, 영상을 통해 발산된 질투를 간신히 인내하고 있었다.
깨문 정도 너무 심해서 입가에선 피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하하... 아무래도 이제 영상을...”
영상을 멈추라 말하려는 순간, 리오스가 글라디오를 붙잡으며 말했다.
“...아니요. 지금이 오히려 아리아의 질투심을 해결할 적기가 아닐까요?”
안 그래도 아리아의 집착은 늘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최근 4년 사이에 레오와의 거리가 벌려진 아리아는 심한 결핍증상으로 과도한 집착을 내보였다.
때문에 지나친 폭력성을 내보이기까지 했다. 이를 순애의 위험이라 생각한 리오스는 글라디오에게 지금을 때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아리아도 도저히 화를 낼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죄책감 때문이라도 질투를 표출 못할 테니, 오히려 이 상황을 성격을 치료할 타이밍으로 삼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글라디오는 부들거리는 아리아를 보며 생각했다. 정말로 치료할 수 있기는 할지가 의문이었으니까.
“그리고... 왜 여자만 겹쳐져서 정리됐대... 현자님도 참...”
그 사이, 레오나르도는 또다른 동료의 기억을 꺼내두었다.
[...숲에 남지 않겠나? 부탁하지.]
이번 영상에선 엘프가 나왔다. 제법 미인었지만, 가슴 자체는 아리아 자신보다 작고 평평해서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 여성이었다.
혹시라도 아까처럼 여자랑 엮이면 아리아는 더는 버티지 못할 지도 몰랐다.
[...그럼 거절하지. 여기선 볼 장 다 봤거든.]
[...하지만... 그 이상 싸웠다간...]
[...그건 네 알 바가 아니지.]
[...그렇지 않아.]
그리고 그 엘프는 레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건 너였으니까. 레오나르도 넌... 싫지 않은 인간이야.]
[...그래.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가면을 벗은 채로 엘프를 바라보며 피식 웃어보였다.
[귀쟁이 중에 싫지 않은 건 네가 처음이었거든.]
“...크릅...꼬르르륵...”
그 행동 하나에 아리아는 정신이 한계에 봉착한 것을 직감했다.
그렇게 흰색 거품을 입에 잔뜩 몬 채로, 손에는 핏방울이 줄줄 흐르는 채로.
풀썩...
아리아는 기절했다.
“아리아 아가씨...? 아가씨...!!”
질투를 단전에 꾹꾹 눌러둔 결과, 아리아는 질투에 익사해버리고 말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여담(?)>
[근데 왜 저런 애들한테 도와달라고 안 해? 나름 쓸만해 보이는데?]
<안 태어났어요.>
[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