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5 흑암-2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레오의 마음은 얼어붙은 것이라 생각했다.
고통의 냉기에 갇혀 마음이 얼음으로 뒤덮인 것이라고.
너무 차가운 나머지 어떤 감정을 보일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러니 따뜻하게 감싸주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라면 진심으로 레오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하지만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고작 얼어붙은 것 따위가 아니었다.
얼음으로 뒤덮인 것 같이 하찮은 감정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뜨거운 쇳물을 목에 잠길 정도까지의 붓는 자학.
스스로 용서할 수 없어 영원히 가둬놓은 감정의 관.
뜨겁게 달아오른 분노와 자기 혐오는 그대로 뒤덮어 매장시켰다.
시간이 지난다고 녹는 감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고 감정이 식을수록 관은 고문 기구의 역할을 시작한다.
한번 달궈진 철이 식으면 식을수록 단단해지듯.
자신이 사랑하는 기사의 감정은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으로 덧대어 매장되어 있었다.
너무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동시에 느껴진 건 역겨운 감정이었다.
자신은 지금도 마음 속 깊이 레오의 마음을 가져간 여자를 질투하고 있었다.
***
카앙!
전황은 이해를 못하리만치 복잡하며 정교했고 치밀했다.
속임수에는 카운터, 역습에는 함정, 반격에는 연격.
으레 보이던 기사들 간의 전투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기습적이었다.
정면 대결을 하는 기사가 아니라, 암살자들 간의 곡예술을 보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대단하기는 한데...”
멀리서 도청하고 있던 리오스는 머쓱한 눈치로 크리스와 레오가 격전을 벌이고 있는 대련장으로 왔다.
“...그래. 그렇긴 하다만...”
마르켄도 놀랍고, 동시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까지 고도의 심리적인 전투를 벌인 것도 놀라웠지만, 그 이상으로 어이없게 경악스러운 경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데... 무인들은 연애 상담 도중에 결투를 신청하나요?...”
시리카는 여러 기사들을 보기는 했지만, 지금만큼이나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은 본 전례가 없었다.
연기이기는 하나, 연애 상담을 받는 쪽에서 자신의 연애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이 갑작스레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해 검을 맞대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더더욱 기묘한 것은 레오는 그 제안에 승낙에 했다는 것에 있었다.
“아... 그건 아니지만...”
글라디오는 가주로서 기사단을 통솔했고, 크리스(티나)의 오빠로서 그런 만큼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부리는 흑암의 행동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갖은 노력을 하는 것으로 말이다.
“...레오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군...?”
그러고 보면
크리스가 읽은 소설에는 그런 내용이 자주 나왔다. 혼란스러워하거나 깊은 죄악감에 빠져 고민하는 동료에게 직접적인 대련으로 일갈하는
장면이 늘 밑줄이 쳐져 있었거나 그녀의 [라이프 노트]라 명명한 수첩에 적혀있었다.
의도 자체는 좋았다.
문제는...
“...본인 연애 상담인데요?”
형식 상은 그랬고, 레오도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근데 크리스는 레오의 사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상황을 반대라 착각하는 것 같았다.
“...그게 문제...”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자리에 모두가 살기를 느꼈다.
분명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그 언어에 담긴 감정은 영도 이하의 온도가 잔류해있었다.
“...아...아리아...?”
뒤에는 미소가 그려진 아리아가 있었다. 미소를 '지은' 아리아가 아닌, '그려졌다'는 시점에 그건 긍정의 미소 따위가 아니었다.
“고모가 레오한테 연애 상담... 레오의 마음을 확인한다고요?”
용사인 아리아의 눈에는 깊은 심연이 자리잡고 있었다. 혼돈과 광기, 용사의 후광 아래에 그 검은 파도가 동공에서 넘실거렸다.
“정말 재밌는 이야기네요? 아.빠?”
그때 글라디오 라인하르트는 깨달았다.
여기서 말 한 마디라도 잘못하면 자신의 외동딸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참살할 거라고.
***
[...그런 마도구가 있어? 원리는 대강 이해돼도 저런 건 처음 보는데?]
그럴 만도 하다. 이 마검이 만들어진 것은 대략 50년 전으로, 한 대장장이가 부부검을 만들려다가 외검만을 만들고 쌍검을 만들려던 찰나 급사해 원혼이 그 검에 증식의 저주를 건 무기였다.
[그럼 마검이잖아. 위험한 거 아니냐?]
<쓰는 사람이 평범하다면 그렇죠.>
마검은 마법의 검이기 전에 저주의 검.
당연히 분에 넘치는 무기는 사용자에게 독이 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범인이라고 하기에 어폐가 있었다.
<마검이 오히려 기겁할 걸요.>
[하긴...]
사람들이 으레 오해하고, 예전에 자신도 오해한 것이었지만, 크리스는 마검을 얻어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저런 증상이 있었다.
마검을 얻고 말투가 더 이상해진 것은 마검의 광증이 아니라, 그냥 그게 더 멋있어보인다는 광기와 같은 이유였다.
“분신이라고 해도 무한히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계는 있지.”
회귀로 이미 알고 있다. 본체 분신의 수는 사용자의 마나를 반으로 나누는 것으로 늘리는 것.
거기에 유지하는 것 자체에도 마나가 소요되니 그다지 사기적인 무구는 아니었다.
만들어봤자 최대 4명 정도가 한계일 테지.
하지만 그 무구가 크리스의 손에 들어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분신에 잔상이라...]
크리스에게는 최적의 시너지를 지닌 무구였다. 잔상을 만드는 것 자체에는 대량의 마나를 요구하지 않기에.
“하지만 잔상에는 한계 범위가 넓은 편이다. 이런 식으로.”
연막과 같은 연기가 주변에 일며 크리스는 이명과 같이 안개의 그림자 너머로 몸을 숨겼다.
[하는 짓에 비해 꽤나 지능적으로 싸우는데?]
독설 같았지만 말하는 현자 본인의 지능을 생각했을 때는 이는 칭찬 중에서도 극찬이었다.
이는 레오나르도 본인도 인정하는 바였다. 자신의 테크닉 그리고 전략 중심의 전투는 크리스의 밑에서 배운 게 많았으니까.
<그럼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만의 무기술로 반격하면 그만이었다. 흑색의 검은 점차 하나의 긴 채찍처럼 길이가 길어지며 주변 안개를 일소하기 시작했다.
•베기 제4형 작(斫) 회전 베기
회전되는 연검의 칼날에 안개가 걷히며 근방 지근거리를 전부 베어갈랐다.
캉! 카앙! 카아앙!!
“...윽!!”
하지만 무의미했다. 전방과 후방에서 동시에 도약한 크리스들은 증식검들을 투척하기 시작했다.
증식검의 본래 능력은 검 자체의 복제이기에
전방은 창으로 변형시킨 검은 돌로, 후방은 마법으로 방어한다. 하지만 2초 정도 지나자 한 가지 사실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나머지 두명은...’
그 사이, 은신해있던 두 명의 다른 크리스들은 단검을 든 채로 돌진했다. 이건 막는 게 불가능하다.
자주 사용하는 크리스의 포위 전략, 한번 걸리면 아리아조차도 고전할 정도였다. 정통 반격 방법은 그 이상으로 고화력의 마나가 담긴 공격으로 전방위를 날려버리는 것.
하지만 그건 적어도 라인하르트의 피를 지닌 천재들보다 마나량이 많아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건 당연히 근본부터가 불가하다.
사실 아까의 트리플 캐스팅으로 마나는 이미 충분히 줄어들었으니까.
“...그렇다면...”
콰앙!
레오나르도는 창을 지면을 찍으며 장대를 넘듯 탄성으로 공중으로 뛰쳐올라갔다. 빗발치듯 단검을 던지는 크리스들과 단검을 휘두르는 크리스들 모두에게서 거리가 벌어졌다.
“...하지만 공중이라면 회피는 더 어렵겠지.”
그대로 지면에 있는 크리스들도 레오를 향해 증식검들을 투척시켰다. 공중에는 발을 딛을 곳도 없었고, 하물며 바람이나 유사 마법으로 정밀히 방향을 전환시키거나 단검을 튕겨내는 것도 무리였다.
아무리 분신으로 마나가 4분의 1로 줄었어도 자신은 크리스의 마나량을 압도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
채앵!
이 ‘무예와 마법의 아리아’와 창술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의 심화에 따라 창은 지면에 수직으로 날아가 박혔다.
“블링크.”
창의 궤적에 따라 좌표값 계산도 없이 초고속으로 몸이 순간이동한다. 지면에 꽂힌 창을 붙잡은 채로 그대로 레오는 다시 크리스에게 돌진했다.
“이런...!”
4명 중 한 명의 크리스는 간신히 레오의 공격을 받아내던 도중, 그대로 마나를 고갈돼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반 정도는 예상했다면 역시 이건 꽝이었다.
“...굉장한 걸 넘어 무섭군. 아마 내 나이 정도 되었다면 이미 압도했겠어.”
몇십을 넘어 몇 백합을 겨루면서 크리스는 인정 이상으로 레오나르도라는 기사에게 존경을 표했다.
정말 자신의 나이만큼 레오가 성장한다면, 자신은 확실히 졌을 거라 크리스는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모르는 일이죠.”
자신이 95세의 경지에서야 그렇게 된 것도, 자신의 첫 스승이 그리 허무히 간 것도.
전부 모를 일이었으니까.
“지금은 저도 무섭군요. 그걸 보니.”
크리스는 아무 생각 없이 분신을 방패로 쓴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 기술’을 준비할 시간을 걸렸던 것일 뿐.
이미 기술을 보조하던 분신들은 마나를 온존하기 위해 모습을 감춘 뒤였다.
키이이이잉!
마치 고속으로 이빨을 가는 듯한 예리한 음색, 흑암이라는 이름에 맞는 검은 도신에 칼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재법 재밌는 기술인데.]
길어진 검기의 도신에 뿜어지는 빛에 현자는 볼만하다는 듯 피식 웃음을 내었다.
그건 그 빛의 정체가 그저 ‘발광’이 아닌, ‘반사’라는 것에 알았기 때문이라, 레오는 내심 확신했다.
“샤이닝 다크 오르비스, 검은 도신에 회전하는 오러의 검날이 일으킨 빛에서 따온 이름이지.”
[차라리 매직핫 슈퍼 나이프가 낫겠다.]
둘 다 해괴하게 기묘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저 기술의 진면목은 결코 비웃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오러의 작은 칼날이 검기의 날 끝에 형성되어 회전한다.
단위가 단분자라 생각될 만큼 극단적이며 얇은 검날이 회전한다면, 이론상 어떤 물건도 절단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도신의 길이 자체도 본인의 판단에 따라 변경이 가능했기에 피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 경우에 따라 투척도 가능했다.
촌스러운 이름에 비해 세련된 기술인 것은 확실했다.
“...설명하는 까닭은 기사도입니까?”
“그것도 있다만...”
크리스는 호기어린 미소를 지으며 칼날이 회전하는 단검을 들었다.
“서로의 정정당당히 전신전령을 부딪치고 싶다는 의사 표현이다.”
이제야 의미가 이해되었다. 뭔가 쓸데없이 말이 많았다고 느낀 것도 그 탓이었을까.
“그럼 이쪽에서도 전력을 걸어야겠군요.”
레오나르도는 검은 돌을 들어 단검처럼 길이를 줄인 뒤, 어깨의 쇄골 위쪽으로 그 흑빛 단검을 찔러넣었다.
“물론 기사도에 따라 정정당당히.”
크리스도 거기에 응하는 것일까, 그 기술을 기대하며 회전하는 검날의 단검을 들며 완성을 기다렸다.
“검은 돌에게는 신체와 연결되는 갑주 기술, 붉은 선이 있습니다.”
검은 돌은 점차 액체와 같은 상태가 되더니, 하나의 생물처럼 레오나르도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신체의 10퍼센트가 한계였지만, 지금은 10초 정도의 찰나라면 전신도 가능하죠.”
감싸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위를 감쌀 때마다 검은 돌은 지금 마나량과 전투 상황에 따라 최선의 형태로 갑주를 구성했다.
“제 신체를 보완해줄 이 기술에 한 가지 하자가 있다면, 제대로 이름이 없다는 점에 있었죠.”
전신을 완전히 타고 올라 얼굴마저 감싸자 붉은 선들이 부분마다 이어지며, 이윽고 눈에서 붉은 빛이 들어왔다.
《검은 돌-붉은 선[100%]》
“...하지만 지금은 무얼로 할지 결정이 섰습니다.”
이 기술에 도달하게 해준 자신의 스승에 대한 존경, 그에 따른 이름.
“흑암...은 어떻습니까?”
“...건방지군. 아무리 네가 대단하고는 하나 감히 내 이명을 탐하는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크리스도 그 검은 갑주의 전사가 할 공격이 기대되었는지, 공격 자세를 잡았다.
“탐한다는 것보다는... 일종의 경애입니다.”
자신을 거둬준 첫 스승에 대한 경애.
오마주(homage)였다.
“...그래, 누가 진정으로 어둠을 가질 자인지, 겨뤄보지...!”
레오의 흑암(黑巖)과 흑암(黑暗)의 크리스가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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