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4 흑암-1
어디가 문제였을까.
이 이야기의 시발점은 분명 ‘연애 상담’이라는 틀에 있었다.
그리고 레오 자신은 분명 ‘첫사랑 이야기’를 서두로 연애의 상담을 시작했다.
“준비는 됐나?”
“...어...예?”
하지만 어째서 자신은 그 연애 상담자와 대련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크리스는 왜 저리 진지한 표정으로 단검을 확인하며 연애 상담을 빙자한 대련을 기대하는 것일까.
[...낸들 알겠냐?]
현자의 독설에 레오는 떠올린다.
방에서 했던 그나마 연애 상담다웠던 대화를.
***
지독한 이야기였다.
저 소년의 삶에는 비극밖에 없지 않은가.
가족도, 행복도, 그리고 이제는 사랑마저.
이유 없는 악의에 모조리 집어삼켜진다.
이제와서 사랑을 받고 나누라니.
그보다 더한 고문이 어딨는가.
자신이 참을 수 없이 밉고 혐오스러울 텐데.
드디어 이해가 되었다.
왜 그렇게까지 강해지는 것에.
성장하는 것에 맹목적인지.
그렇게 갈망하고 집착하는 것인지.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군.’
나약한 자신을.
무력한 자신을.
홀로 살아남은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랑받을 자격도,
사랑을 드러낼 자격마저도.
냉정하다 못해 잔혹하다.
누구보다 사랑을 지닐 자격이 충분하거늘.
왜 세상은 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레오나르도.”
너무한 이야기다.
“예?”
고작 피폐의 삶은 아니다.
“오늘이 날씨가 좋군.”
피학만이 저 소년의 생일지니.
“...그렇죠?”
흑암으로서 그걸 용납할 수는 없었다.
“잠시 대련해보지. 몸을 풀면 머리도 비워질 테니.”
<고... 아니 크리스 님...? 흑암 님?>
리오스도 크리스의 말에서 위화감과 이질감을 느낀 것일까, 당황한 눈치로 크리스의 이름이고 호칭이며 이명까지 계속 불러보았다.
하지만 크리스는 이미 결심을 멋대로 굳힌 뒤였다.
“...예? 상관은 없습니다만...”
레오나르도는 당황한 눈치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왜 본인이 (명목상) 상담을 받는 입장인데, 마치 해결책을 제시하는 양 말하는 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
다시 현재.
“...어...근데...”
왜 본론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벌써 고민에 둔 걱정이나 마음을 대련을 풀자와 같은 전개가 된 것인가.
그것도 따지고 보면 본인의 연애 상담인데.
“생각해보면 너와는 전신전령으로 검을 맞대어 본 적이 없었지.”
그걸 묻기도 전에 크리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본인이 이런 주먹다짐 식으로 고민을 해결 수 있다면, 레오에게도 무거운 문제는 아닌지라 굳이 지적을 걸지는 않았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크리스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어릴 때는 경험이 있더라도 실력 차나 체급 차가 크니 대련의 의미가 없었고, 나이를 점차 먹어갈 때
즈음에는 사정이 생겨 제대로 된 대련을 하지 못했다.
[원로원 갔을 때도 말로 사람을 두들겨 패서 전의를 상실시켰으니까.]
인정은 하지만, 자신은 지극히 학문에서 입증한 백호에 대한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다.
물론 사자나 늑대도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지금에서는 내가 도전하는 것도 올바르다 말해도 될 정도이지.”
저 눈, 단순히 겉멋이나 허식이 아니다.
진심으로 이 결투에 무게를 가지고, 자신의 모든 힘과 정신을 다 해 검을 맞댈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제가 라인하르트에 오게 된 건, 크리스 님의 제의 때문이었죠.”
이번 생뿐만이 아니다. 회귀의 전에도 크리스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당시의 자신은 발록을 잡지도 못했고, 검사나 기사로서도 반푼이.
그녀에게는 전혀 이득이 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크리스는 자신이 책임지고 레오나르도에게 라인하르트의 비전을 전수해주었다.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레오나르도는 한달 동안, 요령 한 번 부리지 않고 마나 수련을 이어갔다.
생각해보면 현자와 자신의 마나체련술을 망설임도, 흥정도 없이 그녀에게 보여준 건, 이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기도 했다.
“그래. 널 데려온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당시에 자신이 떠날 때, 가장 적극적으로 붙잡은 건 단연코 크리스였다. 정문에서 나무에 어설프게 몸을 기댄 채 시가를 물고 있었다.
‘갈 건가?’
‘남을 이유도, 명분도 없습니다.’
‘...명분은 있다.’
‘그렇습니까?’
‘널 데리고 온 것에 대해선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으니까.’
어쩌면 그 말을 듣고 끝까지 버텨 남았더라면 무언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생각은 너무 유치하고 어렸다.
‘네, 담배만 반대로 안 물으셨으면 멋졌겠어요. 흑암님.’
그때 흑암의 당황하고 허당 같던 표정은 여태 잊을 수가 없었다.
“흑암 님을 따라간 것에 전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
“한 수 부탁드립니다. 라인하르트의 그림자이시여.”
레오도 그녀에게 전심과 전력을 다한다.
“부탁하지.”
명예로운 인정 사이로 흐르는 숨막히는 기류.
대련장에는 따로 사람들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 기운 때문일까, 점차 인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문이 열린 탓에, 바람에 따라 낙엽 한 장이 들어와 공중을 떠다녔다.
채애앵!
먼저 울린 것은 금속, 그것도 검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챙! 채앵! 카앙!!
한번이 끝이 아니었다. 연이어 이어지는 검합의 화음, 그 합주가 끝나자 나뭇잎은 지면에 떨어졌다.
“...빠르군. 무술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
연격에 한해서는 자신의 쌍검술이 유리할 거라 생각한 크리스는 아까의 검합으로 생각을 철회해야했다.
“그 고유 마법은 무술 실력이 기본 전제니까요.”
검은 돌로 만들어둔 장검을 쥐며 레오는 말했다.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크리스는 청탑주의 딸, 아니 청탑주조차도 상회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가주인 글라디오보다도 뛰어난 기량을 지닌 쌍검사, 그리고 아리아의 다음으로 강한 라인하르트의 기사.
그게 크리스 라인하르트였으니까.
“그래. 대단하군. 그럼 그 자랑하던 마검을 보여줄 수 있겠나?”
물론이었다. 본디 자신의 고유 마법은 그런 나부랭이가 아닌, 이런 기사에 사용해야 마땅한 기술이었다.
이윽고 마나의 회로를 검은 돌과 연결시키자, 도신에 붉은 전류가 깃든다. 당시에 썼던 평범한 단검과는 비교가 안 되는 속도였다.
“...!”
파지직!
오러는 분명 부딪쳤다. 하지만 그 소리는 뇌전의 소리에 묻혀 오히려 위협적인 분위기를 형성시켰다.
“라이트닝 볼텍스.”
3서클 최대 전압의 전격 마법.
펼쳐지는 전류의 마검 아래로 전격의 마법이 형성돼 폭발한다. 하지만 전격에 당한 크리스는 뇌격에 당하고 있음에도 얼굴빛 하나 흐트러지 않았다.
콰지직!!
“어딜 보고 있지? 그건 잔상이다.”
그녀의 궤적만이 남아있는 잔상이었으니까.
후방에서 쌍검의 연격이 날아온다. 지금은 방어에만 집중하며 레오는 다시 한번 전격의 검획을 완성했다.
“라이트닝.”
이어지는 전격에 크리스도 다시 거리를 벌렸다. 또다시 남는 것은 크리스와 동일한 잔상들이자 분신들이었다.
“훌륭하군. 전략적이며 기교와 응용력이 높은 너에게는 최적의 기술이다.”
“실체가... 있는 잔상보다는 못하지만요.”
크리스의 잔상은 속도로 만들어진 시력의 착시 따위가 아니었다. 아무리 멋에 낭만이 있는 그녀일지라도 속도로 잔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허비스러운 일인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본인이 달리는 궤적에 자신의 분신을 남긴다. 몸에 두르고 있는 오러의 강기를 탈피하듯 남겨 마치 본인이 있는 것처럼 속이는 기술.
물론 오러로 이루어진 분신이기에 자칫 잘못 닿으면 반격하듯이 폭발해 카운터를 먹이는 것도 가능한 그녀만의 특수한 필살기였다.
“훗, 알아주다니 고맙군.”
이윽고 그녀는 빠르게 이동했다.
남은 건, 거울 너머의 거울 같은 잔상들.
그 잔상들은 점차 레오의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본체는 아니고 움직이지도 않지만 닿으면 자동적으로 폭발하기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너무 봐주셨네요.”
레오나르도는 지면을 향해 거대한 마법진을 그린다. 이어지는 원형의 불기둥, 지면 뿐만 아니라 연무장 전체를 전방위로 불태웠다.
“...해치웠나?”
대련을 본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눈치가 없어도 정말 몰인정하게 없는 인간이었다.
“마법도 소홀하지 않았어. 정말 괄목하게 자랐구나.”
마치 복선을 받아든 주인공처럼 공중으로 뛰어든 크리스는 그대로 다시 지면으로 활주했다.
잔상을 분신처럼 만들 정도로 오러의 달인 크리스에게, 오러로 공기를 압축시켜 발바닥으로 추진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콰아앙!! 쩌적...
검은 돌에 금이 갔다. 마탑에서의 훈련으로 검은 돌은 마르켄의 무기고에 있는 병장기들보다도 단단한 경도를 지닌 무기가 되었다.
하지만 크리스가 돌진하며 내리찍은 쌍검 아래에 레오나르도의 장검은 그대로 부러졌다.
“...멋진 무기였는데, 안타깝게 됐어.”
부러진 흑색의 장검을 보며 크리스는 아쉽게 검은 돌을 바라보았다.
다시 고쳐질 건 알았지만, 저 검이 한편으로 자신의 것이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약간의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흑빛의 가변형 무기는 흑암이라는 이름과 정말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더 멋진 것도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부러진 검날을 반대쪽 손으로 들며, 형태를 다시 변화시켰다. 부러진 검날을 잡자 양손에 쥔 두 검은 돌은 쌍검이 되었다.
“...흠, 그 무기에는 정말 욕심이 생기는군.”
“안타깝게도 드릴 수는 없답니다.”
진심으로 시무룩해진 크리스를 뒤로 한 채, 레오나르도는 쌍검을 손으로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오른손에는 화염의 마나가 궤적을 만들며 돌고 있었고, 왼손에선 냉기의 마나가 원형의 진을 형성하며 회전하고 있었다.
“...그건...”
[고유 마법 더블 캐스트, 이젠 익숙하게 하네.]
각각으로 상반된 마법을 지닌 쌍검이 회전하며 다음 공격의 예측을 뒤틀어놓았다.
‘...뭔가 이상해. 일부러 저런 화려한 동작을 보이는 건...’
본능적으로 함정을 느낀 그녀는 급히 아래를 바라보았다.
지면을 향해 그려진 것은 원거리에서 만들어진 마법진이었다.
“참고로 고유 마법과 범용 마법은 별개입니다.”
그러니 트리플 캐스트를 사용하면 지면에 따로 폭발 마법진을 형상하는 것도 가능했다.
콰아앙!
이런 식으로.
[...해치...]
<못 해치웠어요. 그러니까 말하지 좀 마세요.>
분명 잔상이 아닌, 실체와 본체가 있는 존재를 폭발로 날려버렸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알고 있었다.
크리스의 진정한 힘은 고작 잔상 따위가 아니라는 걸.
채앵! 카앙!
“감이 좋군.”
“이미 알고 있었나?”
앞과 뒤에서 오는 협공, 하지만 대련은 크리스와만 하고 있었다.
모순된 것은 아니었다.
“놀란 것 같지는 않군.”
둘 다 크리스였으니까.
“예상하고 있었나?”
예상한 것이 아니라, 예습한 것에 가까웠다.
“증식검 얼터 블레이드, 내 애검이다.”
증식검, 저 검은 본디 쌍검이 아닌 외검.
하지만 검 스스로가 복제되어 쌍검이 된 무구였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용사의 피는 속이지 못하는 것일까, 그 검은 크리스의 자질과 공명하며 새로운 능력을 개안했다.
“이 검은 나의 얼터 도플갱어를 만든다.”
[...뭐래는 거냐?]
해석하자면 자아를 지닌 분신을 만드는 게 가능했다는 뜻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