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인자는 회귀했다-43화 (43/248)
  • EP.43 마탑-5

    지금까지 레오나르도는 어떤 싸움도 겪어봤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인간 도살자라 불린 광전사도 자신을 죽이지 못했으며, 저주와 죽음의 군주라 불린 사령왕도 레오의 손에 쓰러졌다, 현대에 부활한 고대의 악마조차 레오를 끝내 잡아먹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 레오나르도조차.

    “레오...”

    지금 상황이 가장 공포스러웠다 확신할 수 있었다.

    “설명해.”

    “...예? 뭘...?”

    퍽석

    복도의 대리석 바닥에 검이 박혀들어갔다. 물렁한 점토를 뚫는 것처럼 빠르고 깔끔히도, 바닥은 실금도 갈라지지 않은채 검자국만이 남았다.

    검을 뽑으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죽음이 몸에 엄습하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 죽으면 유령 생활 잘 알려줄게.]

    죽음이 전제인 게 이상하지만, 부정할 말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아리아스필 양...? 우선 진정하고오...!”

    “닥쳐.”

    “예...에...?”

    아리아스필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아까의 살인 미소가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 거야?”

    “예...? 그니까 뭘...?”

    “한 거냐고!! 대답해...!!”

    주어를 생략하고 말해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공포로 사고가 정지돼서 추측이나 추리를 할 여유도 없었고.

    “...그러니까 뭘 말씀하는...”

    “입 다물어...!! 듣기 싫으니까아...!!”

    더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

    뭐 때문에 저리 울분을 터뜨리는 건지.

    해명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도.

    그 사이에 아리아는 분노와 악을 써가며 울화를 폭발시켰다.

    “...난...! 난 말이야...!! 레오나르도랑 처음으로 같이 하고 싶었는데...!! 왜냐고오...!! 왜  날 배신한 거야아...!!”

    이제는 우리가 이해할 영역이 아니었다. 거의 우는 목소리로 흐느끼듯이 아리아는 울부짖고 있었다. 얼굴에도 점차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쟤 진짜 왜 저래요...?!>

    [나도 몰라... 뭐야, 저거 무서워...]

    두 남자가 혼돈에 공포를 느끼는 순간

    그 순간, 한 대학원생이 아리아의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미안해요. 어른인 제가 성급히 결정했네요. 아리아스필 양의 마음도 고려했어야했는데...”

    “당신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레오나르도한테 그런 짓을...!!”

    그렇게 검을 뽑아들려는 순간, 그녀는 아리아의 몸을 안았다.

    “정말 미안해요. 같은 인물을 경애하는 사람으로서 아리아스필의 마음을 알지 못한 제 잘못이에요.”

    “...으...아아...”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혼돈과 광기가 뭐냐고 묻는다면 레오나르도는 생각없이 바로 이 장면으로 설명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젠 같이 해요.”

    “...예...?”

    아리아의 눈물이 그쳤다. 울분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아메리의 말은 아리아에게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게 무슨...!”

    “같은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하는데... 분명 다같이 하는 게 모두에게 좋을 거예요! 더 의미도 있을 거고!”

    분명 아메리의 말뜻은 현자의 유산이 중심에 있었다.

    아메리의 눈엔 아리아스필도 레오와 마찬가지로 현자의 유산을 찾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그렇기에 본인만 쏙 빼놓고 현자의 유산을 찾은 것에 질투를 느끼고 분노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본인의 입장에서도 그런다면, 저럴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진정한 문제는...

    ‘...세 명이서...?! 설마... 다같이...?! 그런 난폭한... 걸...!!’

    아리아스필은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는 점에 있었다. 아리아의 머릿속에는 욕정과 배덕의 파티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그런 파렴치한 짓을...!! 제가 원할 것...!!”

    “...파렴치하다고요...? 아! 리오스를 빼먹어서 그렇군요! 리오스랑 넷이서 다같이 해요! 그럼 좋겠네요!!”

    아리아스필의 표정은 아예 불덩이가 되어있었다. 착각이 펼치는 쾌락과 배도의 유열은 어린 소녀에게는 치명적으로 자극적인 유혹이었다.

    잠시 진정과 설명, 그리고 해명의 시간이 필요했다.

    ***

    “...으으으...”

    아리아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를 고개를 테이블에 박고 있었다.

    사과를 받기도 기묘한 상황인지라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금 그 이야기까지 꺼내면 아리아스필은 수치심에 졸도할지도 모른다.

    “...정말... 죄....송...”

    이를 악물고 아리아는 수치 그 자체인 사죄를 입에 담으려고 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사실 의심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죠!!”

    급히 아메리는 사과를 받아줬다. 하긴 그녀 입장에선 친구 동생이 저러는 것도 부담스러울 것이다.

    처음 아리아스필에게 현자의 유산에 대해 설명했을 때, 그녀는 몇 번이고 반복해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황이며, 늦은 시간까지 모든 게 의심할 이유는 충분히 되었으니까.

    다행히 화장실 벽을 자른 것을 보여주고, 보관함인 상자와 유산인 반지를 내밀자 아리아스필도 그제야 믿을 수 있었다.

    <...근데 뭐라고 오해한 걸까요?>

    [이젠 알고 싶지도 않아. 나 같은 현자한테 묻지 마.]

    개소리인데도 자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레오는 의문에 단념했다. 현자가 모르면 그냥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았으니까.

    “...근데 그 반지는 어떻게 할 건가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아리아는 주머니 속에 든 반지를 보며 물었다.

    “예에... 아무래도 마탑주들님께 보고가 먼저겠죠. 마탑 역사에 처음으로 발견한 현자의 유산인 만큼...”

    “그건 당장 하면 안 됩니다.”

    그 말을 자른 건, 함께 반지를 찾은 레오나르도였다.

    “예에...? 왜요오...?”

    “우선 그게 진짜인지를 물을테고, 진품 여부를 가린다고 가져갈 가능성이 높을 테니까요.”

    “...그럼 안되는 건가요오...?”

    레오나르도는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마지못해 측은한 눈치로 그 질문에 대답했다.

    “그걸 그냥 돌려주겠습니까? 바꿔치기나 안 해도 다행이지.”

    마탑주들이 모두 악독한 건 아니지만, 현자의 유산은 역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가치가 있는 보물이었다.

    흑심이 생겨도 이상할 건 없지.

    특히 저런 유약한 사람이 주인이라고 했을 땐, 그에 대한 탐욕이 더욱더 가중될 것이다.

    “...정말 그럴까요오...?”

    “만약에 그거 주는 대신에 박사 학위 주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줘야죠!!!”

    저 대답은 어리석거나 멍청해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몇 년을 노예로 살아왔기에 반사적으로 자유를 갈망했을 뿐이었다.

    “봤죠?”

    “...으...응.”

    드물게 보는 애처로운 풍경에 아리아는 할 말을 거의 잃어버렸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천재에겐 저런 빈곤한 사상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네...역시... 그렇죠오?”

    “그럼 차라리 한 번이라도 반지를 끼어보고 결정하죠. 그렇게라도 하면 마도구로서 진짜인지 아닌지는 감별 가능하니까요.”

    그 제안에 두 일행은 고민에 잠겼다. 그 사이 반지를 만든 장본인은 레오에게 귓속말로 말을 걸었다.

    [근데 괜찮겠어? 저거 한 번 끼우면...]

    <괜찮아요. 그러라고 말한 거니까요.>

    [...하긴 사실 쟤가 쓰는 게 제일 맞는 거긴 하지.]

    현자의 승낙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일까, 망설이던 아메리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뭔가... 달라진 것 같지는...”

    “....어어?!”

    가장 먼저 놀란 건, 아리아였다.

    “...왜...! 왜요...!?”

    “눈 봐요! 충혈된 부분이...!!”

    그 말에 아메리는 시계의 검은 면으로 얼굴을 반사시켜 확인해보았다.

    다크서클은 여전히 진했지만, 건조하게 갈라져 충혈된 눈은 점차 희고 맑게 수분이 차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졸리지가 않아요. 머리도 무척이나 맑고...!”

    “아무래도 진짜인가보네요. 다행이에요.”

    [다 알면서... 사기 하나는 기가 막혀. 진짜.]

    욕인지 칭찬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는 좋았으니 칭찬으로 생각하자.

    “...그럼 이제 반지를...”

    이 행복감을 즐길 여유도 없었는지, 성실한 노예는 대학원을 위해 반지를 빼려고 했다.

    “...어? 이게 왜...?”

    아메리는 당황스러운 듯, 약지를 핀 채 반대손으로 반지를 감싸 빼려고 했지만, 도저히 빠지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그게... 이 반지가... 아리아스필 양, 한번만 좀 잡아주세요.”

    “예? 예예.”

    아메리의 부탁에 아리아는 가볍게 반지를 붙잡았다. 아메리는 그녀의 악력을 믿으며 몸을 쨉싸게 뒤로 뺐다.

    “으아아아...!! 아파요!! 아악!!”

    “아... 죄송해요.”

    아메리의 비명에 아리아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사과했다.

    [아리아 쟤, 아까 웃지 않았어?]

    <예? 그랬어요? 착각한 거 아니에요?>

    여기에 웃을 일이 어딨다고, 아마도 어두운 지라 착각했거나, 현자의 노안이 더 심해진 것일 거다.

    “이제... 어떡하죠...? 이게 안 빠지면...”

    “괜찮아요. 어차피 찾았다는 시점에서 주인의 자격은 아메리 씨나 저에게 있는데, 문제를 푼 양을 비교하면 지분은 아메리 씨가 많으니까요.”

    처음부터 이건 아메리에게 줄 계획이었다.

    반지의 효과인 치유력이라면 그녀의 몸에 있는 각종 골병들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근데 꽁으로 줘도 돼?]

    <아까울 것도 없죠. 애당초에 저 사람 아니었으면 얻지도 못했고...>

    레오나르도는 측은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끔은 열심히 산 사람에게도 보상이 돌아가야죠.>

    그리고 혹시 모르지 않는가. 전생에도 나름 상위권 마법사였는데, 이 마도구 때문에 대성할지.

    <다 투자에요. 이걸로 다른 유산 얻는데 조력을 구하기 쉬울 거고요.>

    [내가 있잖아.]

    <아, 그러시군요. 하긴 연한 아메리카노를 좋아하시는 홍옥 사과 알레르기를 지닌 현자님의 도움도 몹시 절실하죠. 너무 절실하네요, 예.>

    [조리돌림도 이 정도면 국보가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이야.]

    별말씀을. 과찬인 평가였다.

    “...그것도 중요하긴 한데... 저 결혼도 안 했는데... 이걸... 어떡하죠?”

    아메리가 반지를 끼운 손가락은 약지, 바보가 아닌 이상 약지에 끼운 반지가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이대로 시집도 못 가면 어떡해요...?”

    <...>

    소책임한 소인배는 슬며시 자신의 배후령을 바라보았다.

    [...]

    무책임한 무뢰배는 고개를 저으며 절망적인 확답을 내렸다.

    소인배와 무뢰배는 책임감 없이 애도를 표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

    다음날, 여러 가지 소동과 사건이 있었지만, 상황은 제법 조용히 지나간 편이었다.

    우선 레오나르도의 조언대로 이번 일은 당장 밝히지 않는 걸로 결정했다.

    분명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도 많을 테고, 심하면 반지를 뺏기 위해 손가락만 잘라가거나 암살하는 것도 서슴치 않을 테니까.

    화장실의 벽은 아메리의 마법으로 메우고 복구한 채, 일행들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늘날 밤, 그들은 한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근데 말종 마법사들은 안 잡아도 돼?]

    <이것만 있으면 바로 잡을 수 있잖아요.>

    [그건 그렇긴 하지만... 이 시험은 생각보다 까다로울 텐데...]

    <뭐요. 이번에는 현자의 첫 키스 날짜라도 맞춰야 하나.>

    했을지 않았을지는 모르겠지만, 현자 기준이라면 간접 키스도 포함할 테니...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알맞았다.

    [닥쳐 새끼야.]

    <그러게 누가 그딴 식으로 문제 내래요?>

    [난 솔직히 그거 일주일만에 해결할 줄 알았다고! 다 나랑 친한 녀석들이었으니까!]

    솔직히 정말 친한 사람이라면 바로 풀 수야 있겠지만, 어지간히 천재거나 미친 놈이 아닌 이상, 그런 식으로 답을 맞추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만약 풀었어도 푼 친구는 더 이상 친구일지도 의문이었고.

    “아! 레오!”

    “오셨어요? 레오나르도 군.”

    도서관 앞에는 두 사람이 이미 와있었다.

    “늦은 밤에 불러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현자의 유산을 찾기 위해서라면 일주일, 아니 지금은 한달도 안 자도 괜찮아요!”

    저 말이 단순히 동조의 의미가 아닌, 진심인 건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현자가 거들먹거리는 표정을 지을 리가 없지.

    “근데 정말 마탑 도서관에 유산이 있을까? 다녀가는 사람들도 한두 사람이 아닐텐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화장실은 시도때도 없이 다녀가는 곳이니까요. 등잔 밑이 어두운 걸 노린 거겠죠.”

    두 사람은 감탄사와 함께 납득했다.

    [...그래, 당연히 그거 때문이지. 하하.]

    그냥 아무 말도 안 했으면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 텐데, 저 양반은 굳이 사족을 붙여 의심을 만들어낸다. 너무 한심한 나머지 지적은 안 했다.

    “...근데 전에도 와봤지만... 여긴 정말 넓네요. 책이 몇 권이나 있는 걸까...?”

    “대략 800만권... 지하의 고서고까지 포함하면 30만권은 더 있어요.”

    그 숫자에 아리아의 입은 떡하고 벌어졌다.

    사실 마탑은

    학술적 자료도 후대에 전달해야할 의무가 있고, 마탑에 있는 학생들과 교수들도 이런 방대한 자료를 이점으로 삼아서 마탑에

    협력했으니, 마탑에겐 이 책 모두를 관리해도 아깝지 않을 가치가 있었다.

    “근데 어떤 방법으로 찾아야할까요?”

    “...그게 사실 도서관에선 현자님이 아예 힌트 같은 말씀을 남기셨어요.”

    [도서관에도 내 지혜가 녹아있지. 아마 이곳의 남은 지혜는 우리가 잠든다 할지라도 영원히 남아있을 거야.]

    “...라고요. 그래서 다들 도서관에서 각종방식을 시도했대요.”

    누군가는 책을 베고 자보기도 하고, 찢어보기도 하며, 아예 불태워버리기까지도 했다.

    “근데 그러다가 그런 짓한 교수고, 학생이고 전부 다 내쫒겼어요. 자료 및 재물 손괴죄로...”

    책을 베고 잔 것은 그나마 훈계나 반성문으로 넘어갔지만, 누가봐도 찢거나 불태운 건 변호할 여지가 없었다.

    [당연하지. 개념을 어디에 팔아먹은 거야.]

    <현자님이 할 말이에요? 그보다 찾는 법이 아까 말한 것에도 섞여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레오나르도는 책을 뽑기 시작했다.

    “...그 책들이 단서에요?”

    “아뇨. 사실 딱히 아무 책이나 상관없어요. 최대한 크고 두꺼운 걸로 많이 뽑아오세요.”

    “...예? 정말요?”

    레오나르도는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각종 책들을 뽑았다. 그 행동에 다들 조금 의심하는가 보더니, 속는 셈치고 각자 책을 뽑았다.

    “이정도면 될까요?”

    책들이 책상에서 여러 개로 이룬 탑을 보며 아메리는 되물었다.

    “네, 그 정도면 충분해요.”

    “그럼 이제 어떡하면 돼?”

    “이제 잘 자리를 만들면 돼요.”

    “잘 자리...?!”

    왜 저 말에 저렇게 화들짝 놀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충격적인 방법이었나?

    “...그건 시도해봤지만 안 됐어요. 책을 베고 자는 건 이미...”

    “베고 자는 수준이 아니라, 침대... 책으로 아예 관짝을 만들어야해요.”

    “...예?”

    레오는 저 반응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본인도 처음 들었을 때, 저런 반응이었으니까.

    -[그니까 잠든다는 게 두 가지 뜻인 거야. 진짜 잠드는 거랑, 죽는 거. 그런 의미로 숨긴 거지.]

    -<...신기하고 느낌 있긴 한데, 그걸 몇 백년 동안 아무도 안 했다는 게... 좀...>

    확실히 신박한 방법이긴 하지만, 괴짜가 많은 마탑에서 그런 방법을 시도하지 않은 건 조금 미심쩍었다.

    [사실 이건 방법을 알아도 단번에 통과를 못하면 의미가 없어.]

    <왜요?>

    [말 그대로야. 내가 들어가는 방법은 말해줄 수 있지만, 통과할 방법은 알려줘도 시험에 들어가면 하등 의미가 없어진다고.]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헛소리를 많이 하시는 분이니 이해하도록 했다.

    [근데 한 명만 성공해도, 물건은 얻을 수 있으니까 딱히 걱정 안해도 돼.]

    현자님 말씀대로였다.

    이번 것도, 저번의 문제 시험처럼 다수일수록 유리한 게 중점이었다.

    아무래도 다같이 협력해 성공하라는 의미였겠지만...

    ‘특허 가지고도 물어뜯는 마법사들한텐 그런 걸 기대하긴 어렵지.’

    그런 생각을 홀로 곱씹으며 레오나르도는 책의 선을 각지게 다듬어 관의 형태를 완성시켰다.

    “대충은 됐네요.”

    “저도요. 설마 이런 의미로 잠든다는 건 줄은 몰랐네요.”

    “...그럼 누우면 될까요?”

    레오나르도는 완성된 책의 관들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만 성공해도 이기는 게임이니까, 다들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그래도 꼭 성공해야죠!”

    “나도 열심히 해볼게!”

    각자 성공의 의지를 표명하며 관 속에 누웠다. 레오나르도도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일행은 눈을 감았다.

    ***

    ...

    ......

    .........

    “...일어나...”

    “...으...?”

    누군가가 레오나르도의 몸을 붙잡아 흔들고 있었다.

    “...일어나봐. 레오...”

    그 흔들림에 못 이긴 것일까, 레오나르도는 눈을 조심히 떴다.

    “...여긴...”

    자신의 집이었다. 깜빡 잠에 든 것일까, 입가에는 조금 따뜻한 침이 묻어있었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잠든 것 같네요.”

    “괜찮아. 우리 사이인데 뭘~”

    아리아스필은 싱그럽게 웃으며 답했다. 집에 있는 앞치마는 언제 찾아낸 것인지, 자기 껏마냥 편하게 입고 있었다.

    솔직히 안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남색 앞치마는 어느새 자라있는 그녀의 부드러운 몸 굴곡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색기에 레오는 잠기운을 핑계로 잠시 하반신을 이불로 덮었다. 혈기가 조금 잠잠해지자 레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레오? 안색이 안 좋은데?”

    사실 아침인 것과 앞치마를 입은 그녀가 앞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걸 당당히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말하는 게 미친 거지.

    “괜찮아요. 아리아 아가씨야말로 어제 괜찮았어요?”

    “응? 어제 뭐가?”

    몸을 활처럼 휘며 기지개를 킨 아리아는 역으로 물어보았다. 조금씩 느껴지는 혈기에 레오는 약간 민망하듯 웃으며 질문을 정리했다.

    “촌장님하고 한판 붙었잖아요. 어떻게 그 옹고집 할머니를 이겼어요?”

    “...아... 그거...? 그게 말이지...”

    아리아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레오나르도는 멀찍이 있는 시계의 초점을 바라보았다.

    째각거리는 소리가 아홉 번 정도 반복되자 아리아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레오나르도의 얼굴이 차갑게 일그러진다.

    “야.”

    동시에 단칼에 그 말을 잘랐다.

    “...레오...? 갑자기 왜...”

    “입 닥쳐. 열받으니까.”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어투,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아리아에게만큼은 절대로 쓰지 않을 어조였다.

    “...왜 그러는데...!? 내가 뭘 잘못...?”

    “빡치니까 내 앞에서 아리아스필인 척 하지 마. 몽마냐? 아니면 흑마법사? 그것도 아니면 환각제 주입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왜 그러는데?!”

    레오나르도는 테이블을 내리쳐 가구를 주먹으로 부서뜨렸다.

    “그럼 내가 물은 걸 대답해봐. 촌장님을 어떻게 이겼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빼놓지 않고 대답해봐.”

    “그건...”

    “바로 대답 못 하겠지? 안 그래? 어쩔 수 없을 거야.”

    환각이나 꿈은 대상의 지식과 무의식을 결합해 현실과 유사한 가짜를 만든다. 굳이 사실적이지 않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다.

    현실적이지도 않더라도, 기억과 의식을 흐리게 만들면 인간은 이곳이 현실일지, 꿈일지에 대한 의문조차 떠올리지 않으니까.

    “근데 이게 약점이 하나 있거든.”

    하지만 자신이 인지하고 있되 세부 정보를 모르는 기억은 상상의 결이 다르다.

    “그걸 자연스럽게 만들어내기 위해선 최소 10초에서 15초가 필요하거든. 없는 걸 다시 상상해서 창조해야 하니까. 이제 이해했어?”

    “무슨 말이야?! 아직 9초밖에 안 지났어!!”

    아리아답지 않은 역정, 하지만 레오의 확신은 다른 의표에 정확히 꽂혀있었다.

    “아, 그래? 근데 어떻게 9초라는 걸 알았냐?”

    “어...? 그건...?”

    “아까는 시계를 본 것도 아니고... 8초, 아니면 아슬아슬하게 10초일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9초인 걸 정확히 알았냐고.”

    아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뻔하지 않은가.

    “'내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으니까.' 아니야?”

    이곳에서 그 시간이 9초라는 걸 정확히 아는 건 레오나르도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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