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 성장-2
지금부터 생길 광기와 집착이 뒤섞이는 혼돈의 도가니가 되기 전,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시간을 5분 정도만 뒤로 되감아보겠다.
***
[꽤 화려한데?]
휘황찬란한 파티장의 경치를 바라보며 늙은 현인은 감탄했다.
<현자님 때에는 파티가 없었어요?>
[...얌마, 넌 내가 무슨 원시인인 줄 아냐? 그냥 추임새야.]
하긴 원시인이라 하면 고대인에게 너무나 큰 실례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레오는 문명인의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근데 네 애인은 어딨냐?]
<전 솔로인데요?>
[...등신 새끼... 아리아 어딨냐고.]
왜 혼자 착각하고 쌍욕을 날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시인보다도 못한 인간이니 이해하기로 했다.
<아리아는 드레스를 입고 있을 거에요. 그런 자리까지 같이 있을 수는 없죠.>
아무리 전속 기사이더라도, 탈의하는 현장까지 있을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있으면 미쳤다는 소리밖에 더 듣는가.
<음식이나 먹으면서 기다려야죠.>
이럴 땐 먹는 게 남는 것이었다.
파티장엔 평소 잘 먹지 못하는 고급 요리도 많이 준비되있으니 말이다.
[그럼 저기 검은색 과자부터 먹어봐. 왠지 저게 맛있어 보이네.]
<그럴깝쇼?>
레오가 브라우니 쪽으로 걸어가자, 주변의 사람들의 시선이 레오에게로 향했다.
[왜 이렇게 널 바라보냐?]
<글쎄요. 평민 냄새라도 나나.>
[신랄한 자기 비하일세.]
레오는 쟁반에 있는 브라우니를 집었다. 쟁반에는 절묘하게도 남은 브라우니는 하나밖에 없었다.
“앗...”
그 순간 다른 사람의 손이 레오의 손결과 닿았다.
“...어...”
반대쪽에서 손을 뻗은 사람은 제법 작은 체구를 한 소녀였다. 화려한 드레스에 머리장식을 한 거로 봐선 평민, 그것도 시종은 결코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드시지요.”
그 귀족가의 영애에게 레오는 다과를 양보했다.
“아, 고마워요.”
영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과자를 집어 베어물었다. 어차피 저것 이외에도 디저트는 많았고, 차라리 이렇게 배려하는 것이 사람들의 시선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흠...”
근데 무언가 기묘했다. 소녀의 시선이 계속해서 레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왜 저러죠?>
[잘생겨서는 아닐테고...설마...]
“아...!!”
현자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현인의 직감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농담 암살자님이시군요!!”
부정적인 예감이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네?”
“농담 암살자님 맞으시죠?!”
과자는 먹지도 않았는데, 목이 막히고 속이 타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침착해야했다.
[으학...! 카하하하하하하하학...!!]
옆쪽에 미친 늙은이가 광소를 터뜨린다할지라도 말이다.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듯 하군요. 전...”
“맞네!! 농담 암살자야!!”
이번엔 다른 소녀가 외쳤다. 아예 그녀는 따로 뜯어둔 신문의 사진을 내밀며 말했다. 타는 것 같은 속이 수치심으로 타오르다 못해 폭발하기 시작했다.
“농담 암살자라고?!"
"맞네!! 신문에 나온 그 사람하고 똑같아!!"
그런 수치심에 석탄을 들이붓듯 소녀의 지인들과 친구들이 레오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시사상식에 정통한 교양인이었기에.
"알프레드 집사장을 실신시켰다면서요?! 고작 농담 한 마디로!"
"저도 그 농담 좀 가르쳐 주세요!! 호신술로 좋을 것 같아요!!"
"아니야!! 용언처럼 고유의 발음이 있어서 쉽게 배울 수 없대!! 그 핏빛 그림자도 일순에 당했다잖아!"
농담암살자의 전설을 익히 읽고 듣고 있었다.
[크헝...! 커허허허허허헉!!]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현자는 호흡곤란을 동반한 개웃음을 내질렀다.
저 늙은이의 콧볼을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 나머지, 얼굴이 붉그락하게 변했다.
"...하하...하하...!"
농담으로 자살하자
***
그리고 현재.
"아리아스필님과 밀회를 나눌 정도로 사랑하는 사이라면서요!?"
"이미 가주님과 대놓고 아리아스필님을 가지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정말인가요?!"
"아니야! 아예 모든 저택 모든 사람들한테 아리아스필 님이 자기 목표라고 했데...!!"
“거기에 암살자들에게서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금지된 농담 암살술까지 썼다면서요?!"
어째서인지 화제가 ‘농담 암살자’에서 ‘아리아스필과 그렇고 그런 사이’인 이야기로 전환되어가고 있었지만, 차라리 이게 나았다.
‘이건 신문에라도 안 나왔으니까...’
아리아스필과의 관계는 오해할 수도 있었고, 이정도는 풍문 수준이었으니, 언제라도 무마할 수 있었다.
당장 꺼야 할 불은 그 빌어먹을 농담 암살자였다.
농담 암살자의 헛전설은 여기서 종지부를 내야 했다. 이러다간 대악마나 드래곤도 농담로 죽였다고 말할 판이었다.
[될 것도 같은데?]
<싸물어요.>
최대한 화사한 미소를 유지한다. 여기서 괜히 감정적으로 반응했다간, 반감이나 역효과를 살 수도 있었다.
"저기,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아, 아리아스필 님!!"
고난의 도가니 속, 고된 해명을 하려던 찰나, 구세주와 같은 이름이 들렸다.
그 이름을 들은 모두는 시야와 시선을 용사 가문의 영애에게로 옮겼다.
[오, 진짜 예쁜데.]
현자 말대로였다. 둘러싸고 있는 소녀들 사이로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벽안과 백발을 지닌 소녀의 미색을 가리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랐다.
평소 외모에 대한 관심이 박정했던 레오나르도마저 제법 놀란 눈치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각또각
딱딱하고도 고고한 음색, 구둣소리마저 아름답게 느껴졌다.
수면을 걷는 고니처럼 고결하게 아리아스필은 레오나르도에게로 걸어왔다.
[...야 근데...]
현자는 이성적으로나,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현재의 상황을, 좁혀서 아리아스필이란 소녀의 상태를.
[쟤 눈이 죽었는데...? 꼭...]
따각따각
저 날카로워져만 가는 구둣소리가 현자의 직감을 확신시켜주고 있었다.
하지만 더 말할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이미 아리아스필은 레오나르도에게 아슬아슬하게 접근해있었다.
주변에 자욱이 있는 인파는 하나의 기적을 내보이듯 아리아와 레오의 주변으로 갈라져 있었다.
"...아...네...?"
생기라고는 전혀 보이지는 않는 탁한 눈빛, 저 정도의 눈빛은 가족이나 친구가 죽는 충격 이상을 겪지 않는 이상 볼 수 없는 이색채였다.
"...따라와."
"...예? 갑자기요...? 무슨 일..."
"따라오라고."
결국 이유를 묻지 않고 따라갔다.
물론 그런 건 레오 자신이 충성심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주인을 따르는 건 기사도의 본분 아니던가.
절대, 결단코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아니고말고.
"..."
"...아...저기..."
아리아가 고개를 돌려 눈을 내보였다.
그냥 닥치고 걷는 게 맞았다.
말하면 기사도 잘리고 목도 잘릴 것이다.
비유 아니다.
"...레오나르도."
사교장의 외부, 아직 개방되지 않은 테라스의 쪽에서 아리아는 멈췄다.
"...네...? 아가씨...?"
"...파티는 어때?"
무슨 목적의 질문일까?
말 한번 잘못하면 내 인생도 잘못될 거다.
"대답."
아니, 목숨이 잘못된다.
"아주...! 아주 좋았습니다!! 음식도 맛있고!! 파티장도 화려하고!! 멋있고!!"
[너무 비굴하게 발악하는데?]
레오도 안다.
<그럼 여기서 죽어요?!>
알기에 이러는 거다.
목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거였다.
"...그래? 좋아?"
"네네!! 좋아요!! 무척 좋아요!! 사람들도 다들 착하고!! 상냥하고!!"
공포로 피부에 있는 털이 빠릿빠릿하게 선다. 만티코어... 아니, 드래곤과 싸울 때도 이런 감각이 든 적은 없었다.
"...그렇게 좋아?"
맞는 건가? 맞으니까 되묻는 거겠지?
"네!! 좋습니다!!"
"좋아?"
맞는 건...가...?
"네...?"
식은땀이 흐른다.
"좋냐고."
아니었다. 현자가 마치 토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을 보는 것처럼 보는 것이 그 확답을 내려주었다.
"...사실은... 싫..."
"싫어?"
"예...?"
"싫냐고."
이것도 아니었나보다.
생기 대신에 눈빛에 살기가 등등해졌다.
객관식 퀴즈인 줄 알았는데, 주관식 서술형이었나 보다.
"...지금 거짓말하는 거야? 사람 눈치 보고?"
"그게 아니고... 죄송해요."
우선 제 3의 답인 사과를 내본다.
짝!
갑자기 현자가 이마를 쳤다. 뭐지? 뭔가 틀렸냐?
"뭐가?"
"네?"
"뭐가 미안하냐고?"
죽는다. 저걸 제대로 변명하지 못하면 척살당한다.
”...뭐가 미안한 지도 모르는데 사과해?“
농담이고 뭐고 저 눈빛이면 그냥 즉살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말이죠..."
최대한 두뇌 회로를 돌린다. 시각, 청각, 촉각과 같은 정보를 최선을 다해 떠올린다. 1초 늦을 때마다 내 명의 1년씩 주는 것 같다.
"...지금..."
"구두 때문에 발 아프신데 급하게 걷게 만드셔서요!!"
이미 죽었다. 이게 뭔 대답이냐. 사실이긴 해도 이딴 대답은 절대 기대하던 대답이 아닐...
"...어...?! 알고 있었어...?"
...뭐지 아직 목이 붙어있나? 이승에는 있는 건가? 지옥에 계신 어머니가 보일락말락 했는데...
"예? 아무도 몰랐어요?"
구둣발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중간에 또각거리던 울림이 따각거리던 시점에서 다들 눈치챘을 텐데.
[아, 맞다. 이 새끼 여자 근골격 다 외우는 새끼였지.]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두서없이 설명하니 엄청난 미친놈이 되어버리지 않았지 않은가.
"...아프시겠다고 생각했죠..."
"...그... 그래? 그렇구나..."
눈에 살기가 사그라들며 생기가 돌아온다. 레오도 본인 목숨에 생기가 돌아온 감각을 느꼈다.
"...혹시 아프시면 발을 내밀어주실 수 있을까요?"
"...발을...?"
레오의 부탁에 따라 아리아는 자리에 앉아 발을 내밀었다.
"...굽이 너무 높은 걸 신으셨네요. 조금 부으셨어요."
원래부터 초인적인 몸을 지닌지라 심하진 않았지만,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이렇게 아프시면 차라리 다른 걸 신으시지 그러셨어요?"
"그게... 옷을 준 사람이 이게 예쁘다고 해서..."
그거라면 더욱 납득이 안 되었다.
"왜요? 지금도 충분히 예쁘신데?"
"...예...?"
웬 존댓말?
“예쁘다고...?”
“예? 예예. 예쁘시죠.”
눈깔이 현자마냥 어지간히 찌부러지 않은 이상, 그녀가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쪽이 이상했다.
“애초에 예쁘시잖아요. 머릿결도 빗하고 향수로 잘 다듬으셨고, 드레스도 다른 사람들보다 잘 어울리시는데.”
뭘 저리 새삼스럽게.
“...그...! 그렇구나...! 고...고...!”
아리아가, 그 이전에 사람이 저리 빠르게 진동할 수 있는 건 처음 봤다. 공진이라도 하는 건가?
[...레오나르도, 넌 둘 중 하나야.]
<뭔데요?>
[옴므파탈, 인간말종.]
뭐지, 바보냐, 멍청이의 차이인가.
“...어쨌든 그 발로 걷는 건 무리네요.”
“...그럼?”
“업어드릴게요. 자.”
레오는 자신의 등을 내밀었다. 얼른 업히라는 뜻이었다.
“...그건...그건 조금...”
“...왜요? 별로인가요?”
“아...아니...! 업히긴 할텐데... 뭐랄까... 그게...”
아리아는 조심히 레오의 등판을 붙잡았다. 넓은 등에 몸을 기대자 편안한 온기가 느껴졌다. 같은 13살인데, 이 소년의 등판은 듬직하게만 느껴졌다.
“갈게...”
레오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보다 몇배는 큰 등판과 체구,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마비가 되는 감각.
“내 손녀딸과 제법 친해보이는군?”
마르켄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의 집행기사단 단장이자.
“...하...할아버지?”
아리아의 할아버지인 그가 있었다.
참고로 전생에 마르켄은 아리아를 가지고 음담패설을 한 기사의 성기 한쪽을 뭉개버린 전적이 있었으니.
그게 대략 20초 뒤의 자신의 미래가 아닐까, 레오나르도는 심히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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