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인자는 회귀했다-24화 (24/248)

EP.24 성장-1

깊은 어둠 속, 라인하르트를 지탱하는 짙은 그림자들이 가문을 해하는 적을 처리하러 왔다.

“...흑암님...아무래도...”

현재 있는 곳은 제하드의 거주지, 다이논스 가문의 저택이었다.

“...젠장...”

흑암, 크리스 라인하르트는 저택 내부를 돌아보며 시가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러곤 입에 시가를 문 채 한숨을 내쉬었다.

궐련에 불은 붙이지 않았지만, 그 기행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이미 다 죽인 건가.”

그러기엔 이미 끝나있는 저택의 학살극이 참혹했기에.

아무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여긴 흑암... 보고하겠다.”

간신히 통신 마도구를 꺼낸 크리스는 입을 열었다.

전달된 보고는 이와 같았다.

제하드 다이논스 두부가 참수된 채 발견,

그의 아버지 젠 다이논스,

어머니 혜린 다이논스,

약혼자 레인 리포드, 그리고 남동생 엘리 다이논스까지

이상 다이논스 가 5인 전원 사망.

시가를 문 입에선 연기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

라인하르트 가의 저택 내 분위기는 활기로 분주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기류를 전환하기 위해 저택의 사용인은 급하게라도 밝은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오, 축제 분위기인데~]

<가문 안주인의 생신이니까요.>

가주의 반려, 시리카 라인하르트의 생일이었으니까.

[근데 말이야. 생일이면 더 올 사람이 있어?]

<대부분 올 사람은 다 옵니다. 시리카님을 포함해 가주님께도 잘 보일 기회니까요.>

귀족들이라고 단순히 유흥과 사치를 위해 사교계를 여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관계와 상황 그리고 힘을 파악하기 위한 일종의 회의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꽤나 유식하네. 용병 아니었냐?]

<종자 짬이 몇 년인데, 이정돈 기본이죠.>

학당의 개가 3년이 있으면 풍월을 읊듯, 레오도 종자로서 익혀둔 상식을 자랑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게?]

<놀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거들 일이라도 찾아야죠.>

쉬는 것도 좋았지만, 이대로 계속 놀고 있는 것도 눈치는 보였다. 원래부터 쉬는 것보다 일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했고.

[...근데 일이라고 해봤자 딱히...]

“아가씨!!”

복도에서 벌어지는 육상 대회, 선두에 서고 있는 것은 백발의 소녀였다.

“아리아스필 님!”

용사 가문의 영애는 사교계만 되면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말괄량이가 된다.

“멈춰주세요! 아리아스필 아가씨!”

각종 드래스를 든 메이드들은 힘겹게 아리아스필 아가씨를 쫓아갔다. 하지만 전력을 줄행랑을 치는 1성급의 기사를 일반인이 쫒아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생겼네요. 할 일.”

레오는 그런 경주에 참여라도 하듯 자신의 아가씨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복도를 달리며 코너에서 꺾어지기를 몇 번을 반복한 끝에 아리아는 질주를 멈췄다

“...후...여기라면...”

긴 복도를 넘어서 바깥의 정원 뒤편에 있는 마구간, 그곳의 짚더미에 몸을 숨긴 채 아리아스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여기에 있었군요.”

레오의 목소리였다.

“...어?!”

그 익숙한 목소리에 아리아는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자신의 전속 기사는 상쾌한 미소로 그녀를 마주했다.

“...어떻게...?”

“그냥요. 감이 좀 왔거든요.”

아까도 말했듯 레오는 종자의 인생을 헛보낸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모시던 아가씨가 주로 도망치는 곳을 찾아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이런 걸 보면 참 눈치가 있는데... 역시 하반신에 문제가...]

<닥쳐요. 천연기념물.>

그렇게 훈훈한 독설을 주고받으며 레오는 아리아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문제로 도망치셨나요? 아가씨.”

“도망친 거 아냐. 그냥 하기 싫어서 피한 거지.”

[그걸 세간에선 도망이라고 한단다. 허허.]

무슨 놈의 현자가 저리 옹졸하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럴 때일수록 잘 보듬어주는 것이 미덕인 법이지.

“도망치신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자꾸 드레스를 입으라잖아. 난 입기 싫은데...”

알만했다.

다른 귀족가 영애들이 인형이나 가지고 놀 때, 검부터 잡았던 아리아였다. 그것도 애들장난 수준이 아닌, 건장한 기사들조차 때려눕힐 정도로 강한 전사인 그녀였기에.

조금 부드러운 사슬갑옷이면 참아도, 드레스와 같이 하늘하늘한 옷을 참기에는 제법 버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입기 싫으신가요?”

“응. 입기 싫어.”

너무 단호한 나머지 절삭음과 착각할 뻔했다. 그래도 이럴 때일수록 포옹하는 전략으로 가야 하지.

“그럼 입지 않은 것도 방법이겠네요.”

“...응?”

우선 이렇게 동조를 하는 것으로 아리아의 경계를 푼다.

“어쩔 수 없잖아요. 본인이 싫다는데 강요한 것도 보기 좋지 않고요.”

“...그치만... 그러면 파티에 참가할 수 없잖아. 계속 다른 시종들도 입히려고 할 거야.”

[그걸 알면 입으면...]

<아, 닥쳐요. 동심 파쇄하지 말고.>

그렇게 만악의 근원에게 핀잔을 준 뒤, 레오는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그럼 같이 도망치죠. 이런 식으로.”

“...도망 아니... 같이...?”

도망이라는 말을 부정하려던 순간, 같이라는 말에 아리아의 관심이 훔쳐졌다.

“같이 도망친다고?”

“저도 그런 격조 있는 자리는 부담스러워서요. 혼자보다는 같이 피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괜히 파티장에 있었다가는 다른 귀족들에게 시비나 안 걸리면 다행이었다.

차라리 이런 가벼운 일탈로 기분 전환이라도 된다면 아리아의 정서에도 좋을 것이다.

전생에도 오히려 하기 싫은 것을 강요시켰기에 15살이 넘도록 드레스는커녕 프릴 달린 옷 하나 입지 않았다.

“...같이...도망...”

이때 레오는 몰랐다.

‘...같이 도망친다고...? 이건... 연인들이 꼭 하는 것 같은...!’

전혀 아니었지만,

‘...데이트...!?’

아리아의 생각은 대강 이랬다는 것을, 레오는 전혀 알지 못했다. 전혀 아니었지만.

“...괜찮으세요? 얼굴이 붉어지셨는데...”

“어어?! 괜찮아! 그것보다...”

그녀는 긴 머리를 귓가로 넘기며 조심히 홍조를 숨겼다.

“...도망치고... 뭘 할 건데...?”

“마침 월급도 받았으니, 시내라도 돌아다닐까요?”

레오는 태연히 도망치는 계획에 대해 짜면서 설명해나갔다.

같이 밥을 먹는다던가.

차를 마시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초상화를 그려주는 가게에 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던가.

적당한 변명거리도 필요하니, 암살자 때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다는 거로 둘러대는 건데 어떠다던가.

그녀에게는 분명한 데이트의 계획일 거다.

레오에겐 전혀 아니었지만.

현자가 사회의 폐기물을 보는 듯 시선으로 경멸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거 좋네!”

“좋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그렇게 할까요?”

“응...!! 꼭 그렇게 하자!”

드레스를 안 입겠다고 도망칠 때는 내심 걱정했지만, 이렇게 레오가 든든히 자기 편이 되어주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더 좋을 지도...!’

“저도 턱시도 입는 건 좀 힘들거든요. 드레스만큼은 아니겠지만...”

누누이 말했지만, 아리아는 천재였다.

반사신경도, 판단력도 범인을 넘어선 초인.

“턱시도...?”

그랬기에 레오의 지나가듯 말한 짧은 단어조차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청력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

“아...네. 알프레드 씨께서 턱시도를 사주셨거든요.”

알프레드는 전생에도 레오나르도에게 턱시도 하나를 마련해준 적이 있었다.

물론 이때보다는 나이가 많았지만, 저번에 아리아를 달래준 것이 평가에 영향을 준 것인지 회귀 전보다 일찍 받게 되었다.

“...그럼... 입을 거야...?”

“...네?아무래도 파티에 참여하면 입어야겠죠?”

어디까지나 아리아스필이 파티에 참여한다는 전제 하의 얘기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는 몰랐다.

‘...턱시도... 레오의 턱시도...!’

지금 한 천재가 모든 생각을 끌어모으며 고민에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레오는 항상 편한 복장을 입고 있었지...’

한달 동안 옷을 안 산 것은 아니지만, 레오는 지금까지 턱시도와 같이 완벽히 용모에 신경을 쓴 옷은 입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분명...엄청나겠지...?’

갈등과 고뇌의 연속이었다.

[쟤 왜 저러냐?]

<글쎄요? 몸이 안 좋나?>

안타깝게도 두 정신적 고자에겐 깨달을 수 없는 수 없는 번뇌였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데이트가 턱시도보다는 낫지. 그냥 선물 사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

“게다가 아리아 아가씨도 사교 댄스를 추는 건 힘드시잖아요.”

뇌세포에 과부하가 올 때 즈음, 레오가 다시 말을 걸었다.

“...어? 어어!”

당황하긴 했으나 아리아는 고민에서 벗어나 대답할 수 있었다.

“저도 사교 댄스는 좋아하는 편은 아니여서요. 같이 안 하길 잘했네요.”

“그래! 같이 안 하길... 잠깐 같이?”

이번에도 ‘같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귀를 훔쳤다.

“같이 한다니...? 사교 댄스를...?”

“아, 네. 알프레드 씨께서 최대한 아가씨와 같이 춤을 춰달라고 설득해달라고 해서요. 그럴 거라면 차라리 같이 하기도 해서... 하지만 아가씨는 딱히 춤을 안 좋아...”

라고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포상이었다.

레오에겐 강요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왜 없는 걸까에 대한 고민은, 보는 사람의 속을 가연성으로 태우는 고통을 자아내었다.

***

“와아...! 아가씨...!”

그 이상, 아무런 추임새도 시종들은 넣지 않았다. 수수해서도, 어울리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보는 사람의 말문이 막힐 정도의 변화, 갑옷으로 간신히 가리고 있던 가녀린 미색을 드레스가 하염없이 강조하고 있었다.

“...그...그래? 이상하지 않아?”

이제 그녀가 걱정하는 건 드레스의 불편함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의 파트너로 만나게 될 한 소년이 어떤 감정을 느낄 지가 중요했을 뿐.

“네! 분명 모두가 좋아할 거에요!!”

“...레...오...도 좋...”

그 이상으로는 말하기도, 묻기도 힘들었다. 목과 얼굴에 몰린 핏기가 그 이유를 간접적으로나마 설명해주고 있었다.

“얼른 가시죠! 시리카님도 분명 기뻐하실 거에요!!”

그러면 좋겠지만, 더 좋은 거는 자신만큼이나 얼굴을 붉히는 레오의 얼굴을 보이는 것이다.

문이 열리고

화려한 사교장이 아리아의 시야를 채웠다. 샹들리에가 일으키는 화려한 불빛도, 그만큼이나 화사한 옷차림으로 사교계를 빛내고 빛낼

것인 또래의 귀족들도 아리아스필이라는 소녀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레오...! 레오나르도는 어디에...!’

그렇기에 드레스 자락을 붙잡으며 그녀는 사교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가주인 아버지보다, 생신의 주역인 어머니보다도 빨리 그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순간 레오의 인영이 인파 사이에서 보였다. 턱시도 차림도 눈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레오!! 레오나...!”

이름은 끝까지 부르지 못했다.

“...르도...”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레오나르도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으니까. 당황스럽다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자신이 아닌, 다른 소녀에게.

그것도 한명이 세네명은 넘는 여자들한테 둘러싸인 채,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아리아스필의 눈은 이미 죽었다.

당장 허리춤에 검이 없는 것이 몹시 아쉬웠으니까.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