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 친구-6
“다음, 다음 안 나옵니까?”
분명 경어였다.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고 존대하는 어투 말이다.
그럼에도 분위기가 언제 깨져도 이상할 게 없는 살얼음판과 같았다.
관중석에 있는 사람은 숨을 죽였고, 승리를 예감하던 견습 기사들은 심장 고동마저 죽였다.
그 소년은 그림자가 드리운 눈동자로 다음 상대를 살폈다. 그 시선은 하나의 뱀이 수십 갈래로 찢어져 전신을 기어오르는 감각을 연상시켰다.
[꼬운 건 알겠는데 눈깔은 좀 피자. 저러다 가만히 있는 애들까지 쓰러질라.]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고, 졸려서 그래요. 30분만 자고 싸우는데 웃을 일이 어딨습니까?>
단지 그는 피곤해서 그랬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수습 기사들에게는 충분한 위협이 되어주었다.
“내...! 내가 하겠다!!”
수습 기사 중 창을 든 기사가 말했다. 검을 들고 싸웠던 기사보다 키가 크고 목청도 괜찮은 편이었다.
“올라오세요.”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검을 집어던졌다.
“...뭐하는...?”
무시한 채 그는 무기고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견습 기사가 들고 있는 무기와 같은 형태의 창을 꺼내 잡았다.
“...시작하죠.”
“...뭐하는 거지...!? 검을 들어라!”
눈 앞의 견습 기사뿐이었을까, 주변 관중들도, 아리아마저도 이해하지 못했는지 다들 기색을 여실히 뿜어내었다.
‘...레오나르도는 분명 검을 썼는데...?’
그녀가 본 레오는 롱소드 중심의 외검술, 또는 쌍검술뿐이었다. 그 검술만으로도 충분히 그 나이대에는 찾을 수 없고, 없을 만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레오를 제외한 이들은 몰랐다.
“창을 쓰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습니까?”
이인자의 독기를.
이류의 범재가 택한 길을 말이다.
“...날 놀리는 거냐?! 특기인 검으로 싸우란 말이다!!”
“제 특기가 왜 검술입니까?”
그 말에 관중이 조용해졌다.
대부분은 저 말이 어이없어 말을 않는 거였지만, 몇몇 이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저 말의 의미는 단순히 ‘검술을 못한다’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면 창술이 네 특기란 말이냐?!”
“설명을 말로 해야 합니까? 기사라는 작자들이 길바닥 광대처럼 떠드는 것도 우스우니 덤비시죠. 얼른.”
도발은 효과적이었다.
기사의 반반한 얼굴에 선 핏대가 그 사실을 몇 번이고 증명해주고 있었다.
“건방진...!!”
연무장에 올라선 수습 기사가 돌격해왔다. 달려오는 예리한 창날은 언제 살갗에 닿아도 확실히 꿰뚫을 것이다.
카앙!
“엇...!?”
그래, 닿는다면 말이다.
레오의 창날은 그런 어설픈 날카로움을 인정하지 않았다. 쾌속의 창격은 레오를 향해 직진했지만, 결코 몸에는 닿지 않았다.
“자세는 괜찮고, 힘도 괜찮네요.”
창을 몇 번 받아낸 레오가 내린 감상이었다.
“뭐...?! 결투 도중에 무슨...!”
당황에 멈추긴커녕 레오는 비평을 이어갔다.
“하지만 회전도 거지 같고, 반동과 탄력도 쓸 줄도 모르시군요.”
그 모양뿐인 창술이 불쾌하다는 듯 일일이 창격을 흘려내며 레오는 말했다.
“이딴 게 창술이냐?”
레오는 그 평가를 일순 창에 담아내었다.
캉! 카앙!! 카아앙!!
“크악?!”
이어지는 삼연격, 같은 창임에도 전혀 다른 소리가 세 번 울리며 충격이 울려퍼졌다.
견습 기사의 창이 떨어지고, 기사는 그대로 바닥으로 넘어졌다. 창의 충격 때문이 아닌, 정신의 충격으로 인해 다리가 풀렸기 때문이었다.
“다음.”
넘어진 패자에게 창날을 겨누며 승자는 유유히 외쳤다.
“다음 나오시라고.”
더 이상, 존대는 느껴지지 않았다.
***
“...저게... 무슨...”
결투장에선 환호도, 함성도 나오지 않았다.
그건 그 자리의 전투가 하찮기 때문이 아니었다.
때때로 자신의 상식을 넘어선 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게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너 이 자식...!”
한손검와 방패를 든 기사는 고함을 치며 달려들었다. 단지 관중이 보기엔 저건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흠이었다.
“검하고 방패의 연계가 지랄맞아. 이럴거면 방패는 버리라고.”
마찬가지로 한손검과 방패를 든 레오는 반격을 이어갔다. 돌진한 기사의 검을 패링으로 튕겨내며 방패를 검으로 내리찍었다.
“그렇게 막으면 손목 다 부러져.”
조언으로 끝으로 수습 기사는 쓰러져 널부러졌다.
“자, 다음.”
다음이라고 외친지도 6번째였다.
지금까지 사용한 무기의 종류는 총 4가지, 장검, 창, 전투 도끼, 그리고 지금 든 한손검과 방패였다. 그 다양한 병장기를 전부 소화하며 레오는 철저히 적들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마치 그들의 실력과 비교라도 하듯, 레오는 아예 상대방과 무기를 똑같이 장비한 채 상대해왔다.
“...이건 말도 안 돼!!”
제일 먼저 진 롱소드의 기사는 레오에게 삿대질하며 외쳤다.
“뭐가요?”
땀은 한방울도 흘린 채, 레오는 많이 건조해진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너 일부러 이런 거지!?”
“그니까 뭐가요?”
주어가 없는데, 특정한 행동을 꼬집어 설명하기는 무척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설사 할 수 있더라도 저런 태도로 묻는다면 레오는 공손히 답변하지도 않을 테고.
“우리를 망신주려고...! 이딴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거잖아!!”
“세 번째 물어봅니다. 뭐가 어떻게 망신을 줬는지 제대로 말하세요.”
분명 언성은 그보다 몇 배는 낮았다. 하지만 위압은 그 허세 뿐인 목청 따위는 누르고도 남았다.
“...왜 무기를 같은 걸 쓰는데!? 우릴...!”
“쓰고 싶으니까요.”
단순한 이유였고 근본적인 이유였기에 그들은 더욱이 납득하지 못했다.
“장난쳐?! 고작 그딴 이유로 사람 망신을 줘!?”
“장난?”
레오는 검을 잡아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수직으로 꽂아넣었다.
“이게, 장난으로 보이십니까?”
레오는 방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당신들 뭔가 크게 착각하나 본데.”
눈가에는 붉은 동공이 음영 아래에 빛나고 있었다.
“싸움을 건 것도 당신들이고, 판이 커지는 걸 인정한 것도 당신들이에요.”
점차 그 적안은 견습 기사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전 연속으로 일곱 명이나 상대해야 했죠? 그것도 똑같은 무기로.”
말문이 막혔다.
저 말과 행동에 견습 기사 일행들은 혼란스러웠다.
자신들의 입을 열 수 없는 건, 고작 13살의 소년에게 논파 당한 탓일까, 아니면 20년도 살지 못한 어린 몸에 서려 있는 위압감 때문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수치였다.
기사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말이다.
“그러면.”
레오는 이미 견습 기사의 얼굴에 다다라 있었다.
“이건 망신을 준 걸까요? 아니면 저 자신에게 핸디캡을 걸고, 당신들에게 기회를 준 걸까요?”
“...이...평민놈이...!”
레오는 짧은 생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인간은 자신이 불리할 때, 태생적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을 트집을 잡는다.
굳이 찾을 필요도 없이 앞에 있는 저 귀족의 견습 기사가 그 예시였다.
“예, 저는 평민입니다.”
레오는 그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 사람들 모두 고귀한 혈통을 지닌 인간으로 수두룩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평민일 겁니다. 아마 부모하고 핏줄을 바꾸지 않는 이상, 전 영원히 평민일테죠.”
그리고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 비천함에 욕하고 지탄해도 상관없습니다. 전부 사실이고 저도 개의치 않으니 얼마든지 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근데 기억해두시죠.”
그 소년이, 그 청년이 오직 바라는 건.
“당신은 그런 저조차 이기지 못했습니다.”
단지 각인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그 비루한 태생이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레오는 주변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제 출신, 직급, 오게 된 경위, 그리고 존재 자체가 불쾌한 사람이 있다는 건 압니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맞는 말이었기에 입을 닫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어린아이가 스스로 저런 말을 외친다는 것에 그들은 할 말을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쫓아낼 이유가 있다면 가감 없이 가져오세요. 타당하다면 언제든지 받아들이겠습니다.”
저 어린 소년은 누구보다 자신의 처지를 알며, 자신의 위치를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없는 동안은 전 제 목표를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누구보다 높은 곳을 목표하고 있었다.
“제 목표를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전 언제든 그걸 극복하고, 배제할 거고요.”
이건 허락이나 통보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게 제가 선언하고 싶은 말입니다.”
선언이었다.
연설이라 말해도 무방한 길고도 짧은 선언이 끝났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레오는 그렇게 말하며 연무장을 걸어나갔다.
[어디 가는데?]
레오의 걸음에 자신보다도 경력 있고, 고직인 시종과 기사들이 길을 비켰다.
<자러요. 조금은 자도...>
털썩
그 순간 레오는 넘어졌다.
“레오나르도!!”
아리아가 달려와 쓰러진 소년을 붙잡았다.
“의사... 아니 치료 사제를 불러라!! 빨리!!”
크리스는 급히 사람을 불렀다. 시종들은 마찬가지로 급하게 그 명령을 따라 달려갔다.
“일어나봐...! 레오나르도...!”
아리아는 쓰러진 레오나르도를 흔들며 이름을 연신 불렀다. 따귀를 때리지 않았다는 점에 있어서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
“...괜찮은 척하고 있었지만, 역시 무리하고 있었군. 그렇게 빠르게 회피하기 위해선 마나에 무리를 줘야할테니...”
사람들은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레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야, 너 깨어있지?]
현자는 아니었다.
<...>
[크큭...]
<닥치세요.>
그 '말'은 자명종보다 효과가 좋았다.
[근데 왜 그러냐? 안 일어나도 돼?]
<일어나기 쪽팔립니다.>
레오는 눈을 감은 채로 방금 전의 해프닝을 다시 떠올렸다. 분명 연설은 혀를 꼬고 씹지 않은 채 잘 이어갔지만, 문제는 걸어갈 때였다.
[어떻게 축지법 쓰던 새끼가 돌바닥 틈에 넘어지냐? 그것도 능력이긴 하다. 대단해.]
<닥쳐요. 잠 못 잤는데, 마나까지 몰아서 써서 그렇다고요.>
이미 마나는 동나버린지 오래였다. 기절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발밑에 돌부리가 있는지, 홈이 있는지는 구분이 안 갈 정도로는 지쳤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언제 일어나게?]
<안 일어날 겁니다.>
[뭐? 왜?]
<동방에는 이런 속담이 있죠.>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
레오는 넘어진 김에 다 못 잔 숙면을 취했다.
***
따뜻하고도 포근한 기분, 이건 부드러운 이불만의 감촉만이 아닌, 고급 침대의 푹신함도 몸을 충분히 받쳐줘야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이었다.
[뒤져...]
저주가 들렸다. 환청일테니 무시하고 이 기분을...
[뒤져라...]
저 치매 노령은 무시하고 침대에...
[뒤져서 지옥에나...]
<작작하세요.>
눈을 슬며시 뜨며 레오는 대답했다. 이젠 오러로 짜증내는 게 더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일어났냐? 그럼 다시 뒤져.]
<뭔 개소리에요? 대낮에 약주 했어요?>
[너 때문에 약 빨은 기분이긴 해. 그리고 지금 밤이다.]
그러곤 현자는 턱짓으로 침대 아래쪽을 가리켰다.
“아리아스필?”
침대 아래에는 아리아스필은 잠들어있었다. 같이 발록을 잡았을 때처럼 그녀는 내 곁에서 잠이 들어있었다.
[걔 네가 계속 걱정된다면서 여기 계속 남겠다고 했어.]
<그럼 제가 뒤지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원래 너 같은 놈은 죽어야 제 맛이야. 미소녀한테 두 번이나 간호 받은 새끼는 말이야.]
<...>
뭔가 이해가 되는 듯하면서도, 눈빛으로 경멸을 쏟아내는 걸 참아낼 수는 없었다.
[야, 눈 깔아.]
<아 예.>
눈 깔자 아래에 있는 아리아스필이 있었다.
“...레오...나르도...”
아리아스필은 레오의 이름을 조금씩 중얼거리며 그가 덮고 있는 이불을 쥐고 있었다.
‘...전생하고는 좀 다르네.’
자신이 달라진 탓일까, 지금의 아리아스필은 자신이 기억해왔던 그녀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조금 둥글어졌다고 해야할지, 상냥해졌다고 해야 할지 아리아스필이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꼭 성격뿐만이 아니라 외모로도 그녀는 충분히 매력을 끌 만한 소녀이기도 했고.
부드러워 보이는 볼도 그렇고, 만지면 정말 고울 것 같은 피부와 머릿결도 정말...
“...쓰읍... 이쯤에서 일어날까.”
괜히 피곤하니 잡생각이 드는 거다.
레오는 이불을 조심히 걷은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아리아스필을 부드럽게 잡아 가볍게 들어올렸다.
[뭐하게? 덮치...]
<지랄할 거면 아가리 싸물고, 질식해 죽어주세요.>
날도 추운데 침대에라도 눕혀놔야겠다. 레오는 그녀를 양손과 팔으로 상냥히 안으며 침대에 놓을 준비를 했다.
“실례하겠네. 레오나르도 군.”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노크도 없이 열렸기에 반응도 하지 못했다.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괜...”
가주 글라디오 라인하르트였다.
즉 아리아스필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었다.
“...아.”
어두운 방, 넓고도 따듯한 침대, 그리고 헤집어진 이부자리.
마지막으로 자고 있는 아리아를 양팔로 안고 있는 자신.
한 소녀의 아버지는 그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가주님,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30초만 시간을 주세요.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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