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 친구-5
알폰스 암스트롱
지금은 단지 견습 기사일 뿐이지만, 전생에는 기사단 대장을 맡을 정도로 능력 있는 인물이었다.
능력이라는 단순히 전투력만을 논하는 것이 아닌, 전체적인 인망이나 인성 면에서도 높게 평가받아 기사의 귀감이라 칭송받았던 그였다.
평소에도 나름 인정하고 존경했던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종자는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지금 자신에게 사퇴를 권유하고 있었다.
[좋은 사람이래매.]
당황한 건 레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저런 말을 할 이유를 찾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단도직입적입니다만... 세부적인 설명도 해줄 수 있습니까?”
“그러지. 이유를 듣지 못하면 너도 납득 못 할 테니 말이야.”
알폰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다른 종자들과 다툼이 있었다고 들었다. 기억하고 있겠지?”
기억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얼마 전 일이었다. 레오는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들은 내 동기였지. 그들은 아직 종자지만, 난 얼마 전에 견습 기사로 승급했어.”
[그럼 설마 그걸 복수하러 온 건가? 이런 게 좋은 놈...]
“오해하지 않아도 된다. 동기들이 잘못됐다는 것도 알고, 복수하려는 것도 아니니까.”
복수가 아니라는 건 전생의 기억으로 이미 감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의 제안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럼 어째서죠?”
“나 이외에 다른 종자들과 견습 기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
알폰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오늘 저녁, 내 동기들은 징계를 받은 후, 다른 견습 기사와 종자들을 불러 모으며 너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군. 그 중엔 나도 있었어.”
그제야 조금은 흐름이 잡혔다.
“...썩 긍정적인 얘기는 아니었겠군요.”
“태반이 너에게 불만을 느끼고 있었고, 품게 되었어. 다들 부조리함을 느끼기 바빴지.”
이해는 되었다.
현재 레오는 표면적으로 낙하산에 가까웠고, 내부적으로 봐도 정식적인 형태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집사장과의 동행 및 가주와 한 대면 식사까지 생각하면...
불만이야 새어 나오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건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걸 극복하는 게 제 능력이겠죠.”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아예 널 무시하는 수준이 아닌, 짓밟아버릴 테니까.”
대강 예상은 갔다. 처음 했던 신고식 이상으로 자신을 쳐부수러 올 것이다.
그래야 조금 ‘공평’하고 ‘위신’이 선다고 생각할 테니까.
“늦든 빠르든 너를 철저히 누르겠지. 군기를 잡는다는 핑계로 너에게 어떤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아. 그러니...”
“하라고 하세요.”
“그래? 뭐...?”
“해도 상관없다고요.”
근데 상관없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었나? 그때 그녀석들과는 비교가 안 돼. 심하면 경상으로 그치지 않고...”
“압니다. 격부터가 다르겠죠.”
종자면 몰라도 견습‘기사’인 이상 그들 또한 한 명의 기사로 인정받은 전사였다.
각종 무기술부터 마나량까지, 시종에 가까운 종자와는 비교하는 것부터가 무례겠지.
“근데 그래서요?”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래서라니...”
“이런 식으로 도망치면, 결국엔 다른 상황에서도 또 도망칩니다. 사람한테도 도망쳤으니 정작 싸워야 할 마물에게도 쉽게 도망치겠죠.”
뭐든지 반복되면 일이 쉬워지는 법이다.
당장 했던 수련도 그렇고, 지금 권유한 도망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건 네가 어떻게 할 문제가...”
“해봐야 알죠.”
“...뭐?”
“해봐야 아는 문제잖아요.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그걸 알아보는 게 결투고 싸움 아닙니까?”
그것은 단순한 호기가 아니었다.
알폰스의 눈에 비친 것은 레오의 깊은 확신뿐이었다.
그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일단 알겠다. 선택을 하는 건 너 자신이니까.”
알폰스는 문손잡이를 잡으며 문을 열었다. 그때는 그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나도 널 그렇게 고운 시선을 보지는 않았다. 넌 통상적인 규칙을 어기고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니까.”
문 너머를 갔을 때, 그는 미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널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크리스 님이 왜 데리고 왔는지 이해가 되는군.”
“...감사합니다.”
레오는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할 필요 없다. 단순히 내 생각이 바뀐...”
“거기에 감사한 게 아닙니다.”
레오의 감사는 그런 시선의 변화에 초점을 두지 않았다.
“탐탁지 않은 상대를 위해, 배려해준다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겁니다.”
알폰스는 굳이 이런 경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견습 기사들끼리 단합해 레오를 짓밟아놔도 그리 어색한 풍경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알폰스 씨는 이곳에 와서 경고해주셨죠. 그래서 감사한 겁니다.”
이 말이 전생의 옛 동료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감사였다.
“...멋지군. 내 동료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번만큼은 네가 이겼으면 좋겠어.”
“부응해 보이겠습니다.”
문이 닫히고 알폰스는 방 밖으로 나갔다.
[근데 레오야.]
<예, 왜요?>
[아침 다 됐는데? 안 자도 괜찮냐?]
아침 햇살이 레오의 건조한 안구를 더 따갑게 만들고 있었다.
레오는 오늘 28분밖에 자지 못했다.
망할
***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너한테 반말해도 괜찮을 입장이 될 때까지.】
아리아는 몸을 뒤척인다.
“...으으...”
【제가 생각하는 아리아스필 님은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가냘프게 나오는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읏...흐으으...”
이불을 계속 발로 밀어내게 되었다. 마음 같아선 이불을 발로 차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이었다.
【아리아스필 님은 제 목표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한 소년이 눈앞에 나타났다.
짙은 검은 머릿결 아래에 빛나는 적안은 꿈이라 할지라도 생생했다.
【아리아, 넌 나의..】
눈과 입이 동시에 번뜩인다.
“흐아아아아아...!!!”
부우욱!!
꿈이 지나치게 생생했던 탓일까? 아니면 발힘이 너무 거셌던 것일까, 이불을 차자 이불의 천이 조금 뜯겨 나갔다.
“...흐앗?!”
그 소리에 당황해 아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나버렸다.
“...으... 아끼는 거였는데...”
아끼던 이불은 발과 손아귀의 힘에 벌어져 솜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마 알프레드가 이걸 보면 분명 한소리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이...”
시계를 보자 그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어...?!”
시곗바늘은 이미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너무 오래 잤잖아...!“
그녀는 급하게 찢어진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계속 잠을 설친지라 역으로 침대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져 버린 것이다.
평소 시종이 깨우지 않아도 제 시각에 일어나던 아리아였기에 이런 늦잠에조차 그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알기 전에 그녀는 급하게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내리고 얼굴을 닦았다.
짧은 시간, 급하게 했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깔끔한 차림으로 방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저택 안은 그날따라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시종의 숫자가 눈에 띄이게 적었다.
“...아, 리나!”
그때, 빨랫감을 옮기고 있는 하인인 리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부름에 리나는 놀란 눈초리로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구경 안 나가셨어요?”
“...구경? 무슨 구경?”
“지금 연무장에서 결투하잖아요. 아가씨께서 제일 먼저 가신 줄 알았는데.”
그 상황까지 그녀는 부끄러운 몸부림을 치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연무장에서 하는 결투 같은 건 알 턱이 없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다들...”
“아가씨도 가보세요. 다른 시종도 재밌겠다면서 찾아갔어요.”
“아니, 괜찮아. 차라리 못 잔 잠이나 더...”
“그러시군요. 그래도 새로 온 종자하고 다른 견습 기사들하고 결투를 한다는데...”
그 순간 아리아는 리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유는 ‘새로 온 종자’라는 단어에 숨겨져 있었다.
***
연무장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있었다.
아니, 차있었다는 표현보다는 둘러싸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마치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과 같은 형태로 저택 사람들은 둘러싸여 결투를 구경할 준비를 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냐고?”
급히 연무장으로 뛰어온 아리아 뒤에는 이미 누군가가 있었다.
투기장처럼 변한 연무장.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 나타난 사람.
’우연히‘라고 하기엔 너무나 절묘했고, ’고의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기묘한 상황이었다.
“...오빠?”
그걸 할 사람은 가문에 한 놈밖에 없었다.
“오늘 늦잠 잤나 봐? 사실이러면 제일 먼저 올 줄 알았거든.”
리오스는 실눈을 구부려 눈웃음을 지었다. 눈꺼풀 사이로 작게 보인 벽안은 아리아의 얼굴을 되비추고 있었다.
“이게 뭔... 상황이야?”
“간단해. 싸움 구경하는 거지.”
전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오빠가 이런 거야!?”
“오해하면 곤란해. 시작한 건 견습 기사들하고 레오나르도 쪽이었어.”
레오나르도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아리아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렇게 되자 어째서인지 리오스의 웃음은 짙어졌다.
“난 가문의 장남으로서 그들을 잘 다독였을 뿐이야. 가장 좋은 해결책으로.”
아리아는 저 연무... 아니, 결투장을 바라보았다.
“...저게?”
“무작정 말리기만 해선 해결이 힘드니까, 차라리 판을 크게 벌여준 거지.”
“부추긴 거잖아!!”
“말은 원래 '어' 다르고 '아' 다른 법이란다. 동생아.”
그런 궤변 따위를 들어줄 여유는 없었다. 그게 무시가 오히려 유희라는 듯 리오스는 큰 컵을 내밀었다.
“너무 그러지 말고, 너도 하나 해.”
“이게 뭔데?”
희고도 노란 빛깔의 덩어리들이 컵에 산 형태로 소복이 쌓여있었다. 얼핏 봐서는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지 갈피도 잡히지 않았다.
“원정을 가게 됐을 때, 알게 된 음식이야. 팝콘이라는 건데 이럴 때 먹을려고 레시피를 배워놨지.”
“...난 됐어. 기분 나빠.”
팝콘 뿐만 아니라 리오스도 포함해서 한 말이었다.
“난 먹어보고 싶군.”
흑암이라는 걸맞는 여성은 이명에 걸맞게 소리없이 둘의 곁에 섰다.
“아, 흑암님. 마침 잘됐네요! 식기 전에 드시죠.”
“원래 기사란 탐험가처럼 모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그건 음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야. 아리아.”
소설에서 배운 지론을 자랑스럽게 말하며 그녀는 입에 팝콘을 집어넣어 씹었다. 그러곤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흠...계속 먹어도 돼나?”
“물론입니다. 이럴 줄 알고...”
그는 다른 컵을 꺼내들었다.
“더 준비해놨죠.”
“칭찬하지.”
그 컵을 받아들며 크리스와 리오스는 팝콘을 즐기며 결투를 즐길 준비를 마쳤다.
“시작할 건가 본데요?”
리오스와 크리스는 어렵지 않게 관전할 수 있었나 아리아는 신장이 작았던 탓일까 쉽사리 현장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아리아는 두 일행을 뒤로하고 인파를 비집기 시작했다. 완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시종들이 영애인 자신을 무시할 일은 없었다.
흡사 바다가 갈라지는 것처럼 인파가 갈리더니 레오가 있는 결투장까지 길이 열렸다.
굳이 다가가지 않아도 레오가 보였을 정도였지만, 그녀는 호기심에 못 이겨 점점 그 방향으로 다가갔다.
레오는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앞 방향에 있는 상대만을 집중했다. 그 눈매는 처음에 봤던 수라의 눈빛과 완전히 동일했다.
“오, 그렇게 따르는 영애님이시잖아? 직접 봐주시니 기분 좋겠어? 안 그래?”
누구 봐도 도발의 어조.
기사의 격이 떨어지는 말소리가 크게 울리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도발하며 검을 잡아들었다. 검의 날은 예리하게 서 있는 것이 언제라도 레오를 벨 수 있었다.
“...할 말은 그게 다입니까?”
“뭐?”
“참고로 하나 알려드리죠.”
레오가 사라졌다.
“검은 그따위로 잡는 게 아니야.”
이미 움직였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단지 몸 뿐만이 아닌, 검도 마찬가지였다.
“...?!”
할 말은 그게 다일 수밖에 없었다. 찰나 순간 모든 건 끝나있었다.
수습 기사의 검은 부러지고, 레오는 그의 후방로 달렸다. 그리고 뒤에서 손잡이로 견습 기사 뒷덜미를 내리쳤다.
풀썩
견습 기사는 쓰러졌다.
승리의 함성은 없었다.
콜로세움 같다는 말이 무색하게 연무장은 마치 묘지 앞의 조문객들처럼 엄숙하리만치 조용했다.
침묵은 깬 건 결투의 승자였다.
“다음.”
다음 상대를 찾으며 승자는 침묵을 헤집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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