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 친구-2
친구
흔히 가깝게 오래 지낸 사람이라는 뜻의 단어로 다른 말로는 ‘동무’, ‘벗’, ‘친우’ 등이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쟤가 왜 저래? 오늘 뭘 잘못 먹었나? 왜 저를 친구라고 말하는...>
아리아스필은 친구라는 단어를 쉽사리 꺼내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몇 년을 같이 다닌 전생의 본인에게조차 말이다.
[......]
침묵, 1초의 찰나마다 침묵이 이어졌다. 현자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은 채, 노려보기만을 반복했다.
<현자님? 왜 그런 눈으로...?>
[.........]
인간적인 혐오를 넘어선 무언가, 경멸과 배척의 눈빛이 현자의 눈동자엔 스며들어있었다.
[알아서 해.]
단호한 어조.
<예?>
그 어조에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워진다.
[알아서 하라고. 뒤지기 싫으면.]
짐승과 같은 미물에게 쓰는 명령, 그런 어투에 레오도 자연히 눈을 정면으로 돌리게 되었다.
“왜 존댓말 하냐고... 왜...?”
눈앞에 있는 소녀는 원래의 차가운 인형과 같은 기사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평소 레오가 알던 아리아스필과는 괴리감까지 느껴져 인지하는 것마저 조화롭지 않을 정도였다.
“역시... 내가 친구가...”
“아니! 아니! 잠시만요!”
“또 존댓말! 역시 내가 싫...!”
깊게 숨을 들이쉰다. 속사포보다는 느리게, 바람보다는 빠르게 말을 내보내야했으니까.
“싫은...!”
“잠깐 진정 좀 해봐! 아리아스필!”
일단 가장 급한 문제는 존댓말이었다. 존댓말이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적으로는 존댓말부터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응.”
갑자기 존댓말을 멈추자 그녀도 흥분을 가라앉혔다.
뭐지? 라인하르트의 존대 체계가 심문실에 있는 사이 그렇게 역변했나?
“...우선 진정하고 천천히 얘기해보자. 알았지?”
“...알았어.”
말이 통하는 것 같으니 이제부턴 차례로 설명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우선 내가 너에게 존댓말하는 이유는 내 직급이 종자이기 때문이야.”
“...종자면 반말하면 안 돼?”
“안 되지! 여태까지 네가 만났던 종자들을 봐봐. 반말이나 격 없는 태도로 굴었던 사람이 있어?”
대답은 들을 것도 없이 없을 것이다.
그런 미친 종자가 있다면 바로 직급에서 퇴출되거나 인생에서 퇴출될테니까.
이 정도 말이면 아리아스필도 납득할...
“그래서?”
“...어어?”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이냐니...? 당연히 종자니까 반말은 하면...”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선언했다.
“넌 달라.”
“...예? 아니, 뭐?”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선언에 존댓말이 헛나와 버렸다. 급하게 정정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또 화를 냈을 게 분명하다.
“넌 다르다고.”
“아니, 뭐가 그렇게 다른...”
“넌 그런 녀석들하고 달라. 너는 더 강해. 더 멋있어. 더 특별해.”
그녀의 눈에는 맹목적인 확신이 있었다.
만약 전생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좀 감동했을지도 모르지만, 어린 소녀가 저러니... 뭐라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까 넌 반말해도 돼. 적어도 나한테만은 존댓말 쓰지 마.”
결국, 대화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진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존대하면 오히려 좋아해야 맞는 거 아닌가?
<현자님...?>
현자는 한숨을 쉬는가 싶더니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저렇게 말하는 게 짜증스러워도 역시 도와주긴 하는...
ㅗ
주머니에서 나온 건 산을 표현한 수화였다.
왜 저런 인간이 지옥에 안 떨어진 걸까?
하긴 자신이 악마더라도 지옥에 저런 노인네를 받는 건 목숨 걸고 막을 거다.
적당히 나쁘게 산지옥 사람들은 무슨 죄인가.
‘나 혼자 해결하는 수밖에 없겠군.’
생각을 가다듬는다. 여기서 자신이 해서는 안 될 것과 아리아스필이 원하는 것은 확실히 구분짓는다.
생각이 정리가 되자 레오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어. 네 의견은 존중할게.”
우선 한발 물러나고,
“그럼...!”
“하지만 나도 내 입장을 존중받고 싶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다.
“...너의 입장...?”
“나도 반말하는 건 편해. 동갑한테는 그게 익숙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난 종자로서 있을 수 없어.”
“그건 괜찮아. 내가 어떻게든...”
“그게 싫다는 거야.”
이건 짜놓은 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네가 말 한마디 하면... 그래, 종자보단 나은 직급을 꿰찰 수 있겠지.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그래선 네 곁에 내가 있는 걸 누가 인정하겠어?”
그런 건 의미가 없었다. 회귀 후, 처음 아리아스필과의 결투에서 승기를 잡았을 때와 같은 맥락이었다.
“...그...그건...”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너한테 반말해도 괜찮을 입장이 될 때까지.”
“...어?”
하지만 이 정도 여지는 남겨줘도 되겠지.
“아직 난 종자야. 하지만 거기에 안주할 생각은 없어.”
그게 여태까지의, 평생의 목표니까
”난 계속 올라갈 거야. 너랑 동등하게 마주볼 때까지.”
의심할 것도 없는 진심이기에
“그러니까 부탁할게. 기다려줘.”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그렇구나...!”
진심이 먹힌 건지, 아리아스필은 이해한 기색을 보였다.
“...근데...! 그러니까...! 그니까 레오나...!”
...이해한 거 맞지? 왜 이렇게 말을 못 하지? 얼굴빛은 왜 저렇게 붉어?
“읏...! 미...! 미안!! 일이 있어서 가볼게!”
“아... 네, 조심히 가세요. 아리아스필 님.”
어쨌든 협상이 성사됐으니 상관없으려나. 레오는 급히 뛰어가는 아리아스필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보냈다.
“후... 그래도 잘 끝났네.”
[...레오나르도.]
여태까지 돕지 않고 방관만 하던 늙은이는 머리가 지끈거렸는지, 양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넌 도대체 뭐가 문제냐? 대가리 쪽이 문제냐? 아니면 하반신 쪽이 문제냐? 어?! 어느 쪽이야?!]
<아 그건...>
주머니에 있을텐데, 너무 깊숙이 넣어서... 아, 여깄구나.
ㅗ
받은 건 돌려주는게 사제 간의 예의다.
***
몸이 화끈거린다. 이런 기분은 한번도 느껴본 적 없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너한테 반말해도 괜찮을 입장이 될 때까지.】
가슴은 두근거리는 수준이 아니다. 마치 펌프기로 강제로 혈액을 집어넣는 수준으로 심박이 울리고 있다.
【아직 난 종자야. 하지만 거기에 안주할 생각은 없어.】
뜨겁고도 정열적인 한마디, 한마디가 귓가를, 표정을,
【그러니까 부탁할게.】
그리고 심장을 뒤흔든다.
【기다려줘.】
지금 자신의 얼굴은 어떨까?
거울은 없지만 확실한 건.
‘...이 표정은, 이 표정만큼은...! 아무한테도.... 보이면...!’
이 표정을 누구에게도, 특히 레오나르도에게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불 지른 것만큼이나 뜨겁고, 벼락을 맞은 것 같이 떨리는 얼굴,
이 낯빛을 보여주면 박동이 더 빨라져 가슴이 터져버릴 것이다.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녀는 저택 복도를 뛰기 시작했다.
팍
“억?!”
“어...?!”
그 순간, 복도의 꺾어지는 길에서 그녀는 한 남성과 부딪치게 된다.
“이건 설마...!”
남자는 흥미있게 자신과 부딪친 소녀를 바라보았다. 운이 좋으면 이를 통한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될 수도 있을 거다.
아주 극심히 희소하고 희박한 확률로 아마도.
“...아...아...”
부딪친 아리아스필은 최대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실수라도 얼굴을 보였다간 평생의 놀림거리가 될 것이다.
“아리아? 왜 얼굴을 가리니~? 오빠한테 얼굴도 보이기 싫을 정도로 다친 거야~?”
저 소름끼치는 말투, 그리고 자기를 ‘오빠’라고 3인칭라고 말하는 정신나간 발상, 저런 광기로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
그 사람은...
“...오빠.”
자신의 오빠, 리오스 라인하르트였다.
“오오~ 그 얼굴 마치 순애에 빠진 소녀의...”
달아올랐던 마음이 차갑게 식는다. 들뜬 가슴은 깊은 짜증으로 빠져든다.
저 졸렬한 실눈, 옹졸하게 올라간 입꼬리, 좀팽이스러운 말투까지 보니, 얼굴이 정색으로 굳는다.
“...왜 일순에 얼굴이 그렇게 역변하니?”
“...누구 때문이겠어.”
“그래, 순애를 체험하기엔 아직 버거운 나이일 테니까. 착한 오빠가 이해하마.”
‘닥치라고’ 말이 나올 것 같지만, 그녀는 최소한의 교양을 지키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로 온 거야?”
“내 집에 내가 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닥치... 아니, 참아야한다.
“원래는 빨라도 다다음 주에나 오잖아. 일찍 온 이유가 뭐야?”
퉁명스러운 질문 때문인지, 리오스의 어두워졌다. 얼굴에는 음영이 생기고 눈가의 짙은 그림자가 배인다.
“사실은... 알프레드가 쓰러졌다고 해서 걱정돼서... 알프레드가 죽으면... 난...”
“사기치지 마. 이미 건강한 거 전보로 보냈잖아. 답장도 보냈으면서.”
연기는 씨알도 안 먹혔다.
연기를 그만두고 리오스는 다시 웃었다.
“들켰네~”
이때, 아리아스필은 마음 속 깊은 곳, 살의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진짜 궁금한 건...”
리오스는 주머니에서 챙겨놓은 신문을 꺼냈다.
【13살의 소년, 농담 살해자가 되다.】
신문에는 사진을 곁들여 레오 역사에 영원히 남을 굴욕이 인쇄돼있었다.
“여기 나오는 이 농담 살해자거든~! 빨리 보고 싶어서 뛰어왔지.”
“...레오나르도?!”
냉랭한 그녀의 얼굴이 다시 붉어진다.
“...응?”
그 반응을 라인하르트의 장남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흠...”
리오스는 신문을 들었다.
“어?! 어어?!”
그러자 아리아도 함께 고개를 꺾어 신문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천천히 신문을 든 팔을 돌린다.
“어어...?! 아...!?”
그녀의 시선도 신문과 함께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내려놓았다.
신문과 동시에 그녀의 마음도 내려놔졌다.
“이해했어.”
“...갑자기 뭐가?”
“이런 느낌의... 순애, 나쁘지 않아. 오히려 좋을지도...”
아리아의 표정이 다시 썩는다.
“닥쳐.”
“...순애에 그렇게 반응하다니, 오빠는 슬프단다.”
“헛소리할 거면...”
“어, 저기에 레오나로드가!”
“어디!?”
그녀의 고개가 꺾인다. 하지만 이상했다. 레오나로드는 연무장에서 수련 중일텐데, 저기는 완전한 반대 방향이었다.
“오빠, 어디에 레오나르도가...”
돌아봤을 때는 그의 오빠는 이미 사라졌있었다.
아니, 이미 ‘가버렸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때 그녀는 다시 곱씹었다.
자신의 오빠는 쳐죽일 새끼라는 걸.
***
[농담 살해자, 꼴받으니까 농담이나 씨부려봐.]
’...‘
무시하자. 아무 생각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아니다.
[국가에서 허락하는 유일한 살인 기술 좀 보여줘라. 어?]
“...”
참자. 참으면 언젠가 저 노친네도 질릴 것이다.
[후훗... 나의 이름은 농...]
죽인다. 뭐가 됐든.
“농담 살해자! 농담 살해자 맞...!”
“진짜 뒤질라고 환장했나?!”
레오는 현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귀신인지라 검은 맞지 않고 허공을 갈랐다.
“우왁!!”
“...어?!”
유령 너머에는 한 남성이 있었다. 백발에 벽안을 지닌 것으로 그가 이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하잖아. 죽일 거면 설정 지키면서 농담으로 죽여야지.”
저 지랄 맞은 말내용과 귓가를 핀셋으로 헤집는 것 같은 간드러진 목소리, 그런 자식은 레오가 아는 사람 중 한 명밖에 없다.
“...리오스 라인하르트님?”
“맞아. 농담 살해자가 날 알고 있다니, 나도 인생을 헛산 건 아닌가 보네.”
농담 살해자라고 하니, 갑자기 ’그냥 지금 죽여버려서 인생 헛살게 할까?’라는 충동이 들었다. 그래도 우선은 참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리오스 님께 큰 무례를 저질렀군요.”
“괜찮아~ 죽을 뻔했지만, 죽을 죄까지는 아니거든.”
...하...
속으로나마 나직이 한숨이 새어나온다.
[이 시대 사람들이 다 미친 거냐? 아니면 내가 너무 뒤떨어진 거냐?]
그 질문에 아련히 지나가는 두 얼굴이 보인다. 독특한 점은 두 명 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피가 이어졌다는 점이었다.
<...어려우니까 다 같이 더불어 미친 거로 하죠.>
[그래. 도태된 것보단 미친 게 나아.]
레오는 내리친 검을 집어넣으며 리오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리오스님.”
“...음, 미안하단 말이지.”
아, 저딴 쓰레기를 갈아마신 듯한 미소.
리오스가 괴랄한 생각을 품을 때, 늘 짓는 표정이다.
“...그럼 알프레드가 기절할 때, 썼던 농담 좀 알려줘~”
“네, 알려드릴게요.”
“진짜~?!”
다행히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다.
[야, 괜찮겠어? 그 노인네 진짜 죽일 생각이야?]
<괜찮아요.>
레오는 고민없이 리오스의 귀에 대고 농담 기술의 비전을 알려주었다.
“정말이야...? 정말 그딴 말로 사람이 기절해?”
농담의 원천을 들은 리오스는 실눈으로 의심스럽게 레오를 바라보았다.
“...저도 믿기진 않았지만, 그랬습니다.”
레오의 눈엔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 맑은 눈동자에 리오스도 넘어갔다.
“...그렇단 말이지.”
“리오스 도련님.”
마치 속담의 한 구절처럼, 이야기의 주체인 알프레드가 걸어왔다.
“오, 마침 잘 왔어!! 알프레드!!”
“좋은 상황에 온 거군요. 다행입니다. 도련님.”
리오스는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모기가 요기조기 있네~?”
“...”
정색
“...어? 알프레드?”
그는 정색했다.
“...왜 그래? 왜 그런 표정을...”
노집사는 유례없는 표정으로 정색했다.
“...미안함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반성했다니 다행입니다. 도련님.”
“...왜 그런 거야...?”
“침묵은 스스로가 부끄러움을 깨닫게 하는 데 가장 좋은 훈계 방식입니다. 도련님.”
이 상황을 관전하던 농담 살해자와 현자는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왜 안 웃냐? 저 영감?]
<재미없잖아요.>
[그건 알아. 근데 저번에는 웃다가 뒤졌잖아. 누가 들어도 똑같은데.]
<제가 해야 웃어요. 알프레드 씨는.>
처음 농담이 성공했을 때, 반응에 놀란 가문 사람들은 각자 본인 나름대로의 농담을 시전했다.
<그리고 전부 실패했죠.>
[근데 저렇게 정색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아? 그렇게 쌀쌀맞은 영감 같지는 않았는데.]
<그건 농담 친 사람이 저 인간이여서 그래요.>
리오스 라인하르트.
그는 라인하르트 가문의...
[생긴 거로 봐선 망나니인가?]
<아뇨.>
그냥 등신.
장남이자 등신.
장래 유망한 등신이었고, 등신일 것이다.
“잠깐...”
하지만 그 장남(등신)인 리오스가 왔다는 건...
“가주님이... 왔다는 거잖아.”
가주, 그녀의아버지인 글라디오 라인하르트도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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