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인자는 회귀했다-9화 (9/248)

EP.9 라인하르트-4

“...흠... 이정도면 되겠지.”

레오나르도는 싸놓은 짐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별거 없네. 뭔 옷이 상의 하의로 3벌밖에 없어.]

레오의 짐은 조촐하다 못해 황량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간단한 건조식량, 세 벌의 상하의와 사슬갑옷과 가죽갑옷 하나, 그리고 몇푼의 돈 뿐이었다.

<이때는 그냥 방랑 용병이니까요. 짐이 많아봐야 거추장스럽기만 하죠.>

[근데 어째 돈도 너무 없다.]

“영양 보충으로 고기 샀다가, 어떤 미친놈이 다 토하게 만들어서요. 식비 지출이 컸죠.”

그 이름이 뭐였더라... 현자였나? 고자였나? 같은 ’자‘라는 단어로 끝나서 헷갈리네. 아, 어차피 같은 사람이지.

[급하게 먹으면 체하니까. 깊은 마음으로 배려해준 거지.]

입술에 침 하나 바르지 않은 채, 궤변을 늘어놓자 헛웃음이 나왔다.

“그딴 마음도 받기 싫으니까 고이 접어서 가슴팍에 쑤셔 넣으세요.”

[그게 스승한테 할 말이냐?]

“그럼 내장은 제자한테 보여줄 겁니까?”

서로 훈훈한 독설이 오고 가던 와중, 짐이 완전히 싸졌다. 가방을 몸에 메며 레오는 문을 바라보았다.

“자, 이제...”

“무슨 일 있나? 레오나르도 소년? 아까부터 말소리가 들리더군.”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혼잣말이 길어졌는지, 크리스가 의아한 듯 레오를 불렀다. 현자의 헛소리를 무시한 채, 레오는 짐을 든 채 여관 밖으로 나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네. 그저 혼자 말이 많길래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을 뿐이지.”

“괜찮습니다. 원체 말이 많은 성격인지라... 하하...”

가급적이면 현자의 존재는 숨길 생각이었다. 말한다고 해서 득이 될 상황을 적을 테고, 오히려 현자의 돌이나 현자를 노리고 습격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그 중에서도 절대 크리스 님께는 들키면 안 돼요.>

[왜?]

왜인지는 현자도 알고 있을 거다. 다만 그 이유가 너무 아득하고 순수한 나머지 직관적으로 집지 못하는 것일 뿐.

<저 사람 은근히 그런 거에 동경하거든요.>

크리스 라인하르트, 그녀는 30대가 넘도록 「흑염룡, 마안, 오른팔의 저주」와 같은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미지의 힘에 동경하는 안타까운 인간이었다.

<거기에는 배후령도 포함돼 있거든요.>

자신의 배후에 영혼으로서 보필하는 설정, 전생에 그녀와 함께 임무에 나갔을 때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근데 만약에 그 사람이 현자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현자님의 팬이 한 명 더 늘어나는 거군. 흐흐...]

상황의 무게를 파악하지 못하고 현자는 가볍다 못해 경박하게 대답했다.

<저딴 소리 숨쉬듯이 읊는 팬도 괜찮다면 말할게요.>

레오는 망설임 없이 목에 힘을 주었다.

“크리스 님!”

[죄송합니다. 다신 그딴 소리 안 하겠습니다.]

역시 태세 전환에는 공포만 한 것이 없다.

그게 태생적이고도 이성적인 거부감을 자극하는 거라면 더더욱.

“무슨 일이지?”

사실 현자에 대해 밝힐 생각은 없었다. 그녀를 부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호위 기사분은 어디 갔죠?”

“’전’ 호위기사 제하드 말인가?”

확실히 잘린 건 맞은 것 같았다.

“...예, 이젠 ‘전’ 기사가 되셨군요.”

“...제하드에 대해선 사과해야겠지. 미안하다.”

갑작스러운 사과에 레오의 말이 멈췄다. 나온 사과의 맥락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리아에게 그가 한 모욕은 들었다. 권위적이고 모욕적인 태도에 검까지 뽑았다지.”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

너무 별 볼 일 없는 일이었기 이미 잊은 지 오래였지만 말이다.

“괜찮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리아스필에게 싸움을 건 건 저기도 하고요.”

“이해해준다니 고맙군.”

그렇게 말이 오가던 와중, 레오는 기묘하다는 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지?”

“근데 아리아스필이 보이지 않네요. 어디 갔지?”

정작 이 대화의 중심에 있어야할 아리아스필은 주변에 없었다.

“아리아는 지금 여관에서 자고 있다. 아무래도 발록과 제하드, 두 녀석을 상대하느라 체력이 다한 거겠지.”

아리아스필이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지금은 당연히 체력적인 한계가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발록을 상대하자마자 탈진해 앓아누웠겠지.

“우선 푹 쉬라는 의미에서 깨우지 않았다. 그 나이 때에는 자는 것도 단련일테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이유도 있다.”

크리스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허세나 폼을 잡는 것과는 사뭇 다른 무게의 눈매였다.

“...무슨 이유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리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리아를요?”

아리아스필을 부탁한다라, 처음 크리스를 만났을 때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틀어진 부탁이었다.

“그 앤, 아리아는 혈육인 내가 말하기도 그렇지만 고금을 불문할 천재다.”

그건 누구보다 레오가 잘 깨닫고 있었다. 고금이라는 과거와 현재뿐만 아닌, 10년이 넘는미래 이후에도 아리아스필 이상의 천재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애는 고독할 수밖에 없었어. 뛰어난 자의 숙명처럼, 고고한 늑대의 외로움을 곱씹어야만 했지.”

“...그렇군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뛰어나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대부분 사람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너와 만난 뒤로 아리아는 변했다.”

“...”

“나조차 그 아이가 그렇게까지 자신의 감정을 표출할 줄은 몰랐거든. 실력이 발전하고를 떠나서 그 감정은 아마 인간으로서 큰 성장일테지.”

생각해보면 전생의 아리아스필은 항상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마치 모든 일에 흥미가 없다는 듯, 권태로움만을 지닌 채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난 너에게 부탁하고 싶다. 부디 그 외로운 늑대를 홀로 두지 말라고 말이다.”

조금 손가락이 오그라들긴 했지만, 충분히 의미가 있는 대화였다.

“알겠습니다. 부탁이 없었다 할지라도 전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 노력했을 겁니다.”

“너도 마찬가지로 고독한 늑대일테니까. 호적수이자 동류를 만난 것만큼 반가운 일은 없겠지.”

마지막 말에 손가락이 완전히 오그라들었다. 잔인한 청각 고문에 레오의 입술과 혀가 꿈틀거렸다.

“...근데 한가지 정정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내가 실언을 한 게 있었나?”

말의 비수는 이미 장전되었다.

“늑대는 무리 동물입니다. 개와 같은 생물들은 대부분 무리가 있죠. 그러니 고독한 늑대는...”

그 사실에 크리스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반박했다.

“훗, 그건 네가 견문이 좁기에 모른 것일 뿐이지. 난 보았다. 홀로 다니는 늑대의 모습을...”

“아, 그건 무리에서 쫓겨난 늑대입니다.”

“...뭐?”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이었다.

“고독한 늑대는 대부분 두 부류입니다. 무리를 만들기 위해서 따로 나온 청년 늑대와 늙어서 무리에서 퇴출당한 노년 늑대죠.”

그녀의 눈썹이 진동이라도 하듯 거하게 떨린다. 눈썹뿐이었을까 근엄하던 표정마저 크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그건...! 내가 말한 건 젊은 늑대였다! 그래!! 젊은 늑대!!”

“근데 젊은 늑대가 고독하다면, 그건 실패한 늑대입니다. 힘이 없어서 무리를 만들지 못한 거고, 들어가지도 못한 거거든요.”

늘 얘기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그...그건...”

크리스는 또다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고귀한 사자, 고독한 늑대, 그에 대한 항상 이상을 품던 그녀였으니까.

‘고귀한 사자...는 그렇더라도... 늑대만큼은 안된다... 고독한 늑대만큼은...!!’

근데 자연엔 그딴 거 없단다.

[넌 어째 동심을 토막내지 못해 안달난 것 같다.]

<저 사람이 동심을 갖기엔 너무 늙지 않았습니까?>

[매정한 놈.]

<대자연이란 늘 매정한 법이죠.>

이 무슨 대자연인가.

“레오나르도?”

한 여성이 동심의 파괴로 깊은 상실에 빠져있을 때, 다른 소녀는 밝은 기색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리아스필?”

뒤에는 아리아스필이 있었다.

휴식으로 피로는 완전히 풀린 건지,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맑은 벽안에는 생기가 흘렀고, 긴 백색 생머리에는 윤택으로 잠들어있었다.

피부도 마치 새하얀 눈처럼 곱고 촉촉해 보였다.

[애가 안 본 새에 더 예뻐졌네. 화장이라도 했나?]

<얜 그런 거 할 줄 몰라요. 자연 미인이죠. 자연 미인.>

아리아스필은 아름다운 화장이나 옷가지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잘 드는 검이나 잘 막는 방어구에 관심을 보였지.

그럼에도 그녀는 외모만으로 나라를 기울게 하는 미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제 생각엔 외모보단 재능 때문에 나라가 기운 것 같지만 말이에요.>

[욕을 하거나 칭찬을 하거나 하나만 해. 뭐라 말하기가 어렵잖아.]

딱히 칭찬이나 욕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었다.

“늦어서 미안해. 깨는 게 늦어서...”

“괜찮아. 그런 일 겪고 일찍 깨는 게 더 이상하지.”

그녀는 레오와 인사를 나누던 중, 깊은 고통을 곱씹고 있는 자신의 고모를 바라보았다.

“사자도... 아니, 늑대...가... 늑대만큼은...”

동경해왔던 이상이 무너진 나머지 정신도 마찬가지로 붕괴하고 있었다.

“...고모, 아니 크리스 님은 왜 저러시는 거야?”

그건 이 문장으로 압축해 말할 수 있었다.

“어른이 돼가시는 중이야.”

***

라인하르트 본가로 가는 길은 멀다면 멀고 길다면 길었다. 하루 내내 말을 타고 도시로 가야했고, 그 뒤에는 대금을 내고 워프게이트를 사용해야했다.

“워프 게이트 비용은 내가 내도록 하마.”

“그래도 괜찮습니까? 만만치 않을 걸로 알고 있는데...”

“괜찮다. 그 정도 액수에 흔들릴만큼 라인하르트는 약하지 않아.”

[동심 파괴에는 많이 약한 것 같던데.]

<그건 크리스 님 한정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레오나르도는 크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액수 이상으로 부응하도록 하죠.”

“기대하지.”

레오 일행은 그대로 워프 게이트에 탑승해 이동하게 되었다.

그렇게 게이트를 타고 이동한 곳이 바로

“라인하르트 본가에 온 걸 환영한다. 소년.”

라인하르트가의 대저택이었다.

‘여긴 봐도 봐도 놀랍단 말이지.’

놀랄만한 구석은 수도 없이 많았다. 먼저 웅장한 저택의 크기부터 해서, 소도시가 간신히 설치하는 워프 게이트가 사유지 내에 존재했으며, 정원의 넓이는 작은 숲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루벤, 그 녀석 돈 좀 벌었나본데?]

<용사마저 돈 못 벌면, 다들 살맛 안 나겠죠.>

[...그건 그렇지.]

왜인지 현자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보였다. 단순한 감정이 아닌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표정, 그걸 물어볼 새도 없이 정문 쪽에 인파가 몰려들었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리더니, 저택 밖으로 시종들이 모여 입구의 줄을 만들었다.

[완전히 임금님 납시오구만.]

<그런 셈이죠. 아리아스필에 크리스 님까지니까요.>

가문의 직계인 두 인물이 나타나는데, 이정도 대우를 안 하면 어떤 불똥이 튈지 몰랐다.

“소란스럽네요. 크리스 님.”

“그러게나 말이다. 아리아. 이래서 일부러 오는 걸 말 안 했는데, 의미가 없었나보군.”

정작 둘은 이런 환영식을 내키지 않아 하지만 말이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그 중심에 있는 노년의 집사, 알프레드 세바스찬은 라인하르트의 두 영애에게로 걸어왔다.

“오랜만이군. 알프레드.”

“오랜만일 것도 없죠. 저번에 ‘자아’를 찾기 위해 떠난 모험을 생각하면 굉장히 짧은 시간...”

라인하르트를 지탱하는 그림자는 자신의 검은 역사를 숨기기 위해 노신사의 입을 다물게 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실언을 했군요.”

“손님이 없더라도 그런 이야기는 자제해라. 알프레드.”

알프레드는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 품격과 예절에 순간적으로 레오는 라인하르트의 격을 되새길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전 라인하르트 가문의 집사를 맡고 있는 알프레드 세바스찬이라고 합니다.”

기사, 귀족 간의 예법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알프레드 집사장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긴 위해선 그 정도로 끝내선 안된다.

“안녕하십니까, 집사님. 전 방랑 용병인 레오나르도라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성은 말씀해드릴 수가 없군요.”

예법을 지킨 인사와 동시에 레오는 알프레드를 바라보았다. 절도 있는예절에도 제법 신경쓰이기도 했지만, 알프레드의 의문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어째선가요? 레오나르도 님?”

“성주인이 아니니까요.”

싸늘해진 공기, 짜게 식은 시선.

장난을 친 레오마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정신이 나갔으면 미리 말하지 그랬니. 그랬으면 현자의 돌은 안 주는 건데.]

“브루룹우하하하하하!!”

그때 갑자기 호탕한 광소가 들렸다.

“아학!! 아히히히히...! 이히히히히...!!”

그 자리에는 노집사도, 노신사도 없었다.

단지 말장난에 몸부림치는 늙은이만이 있었을 뿐.

“죄송...! 죄송...합니다...! 으흐흐...!”

“왜 그러나?! 알프레드!”

알프레드는 몇 번의 심호흡과 헛기침 끝에 웃음 잠재웠다.

“으흠, 음... 죄송합니다. 제가 추태를...”

“괜찮습니다. 근데 혹시 다과 중에 오렌지가 있습니까? 오랜만에 오렌지가 먹고 싶군요.”

“푸아칵하하하하하...!! 아히!! 아히! 이히힉!!”

[뭐야? 쟤 왜 저래? 지랄을 들으면 웃는 병이라도 있냐?]

<있어요.>

알프레드 세바스찬

그는 라인하르트에서 가장 오래 일한 집사이자 가장 명망 있는 집사장이며.

또한 기품 있는 분위기와 언행, 예절 덕에 남자에게는 존경을, 여자에게는 애정을 받는 인격자였다.

레오 또한 그를 남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경애하고 존경해왔다.

하지만 어느날,

‘무슨 일입니까? 레오 씨?’

‘아 그게, 물건을 좀 찾고 있습니다. 해골기사랑 싸워서 얻은 전리품을 잃어버렸거든요.’

‘그렇습니까? 마침 여유가 있으니 같이 찾아보도록 하죠.’

‘아! 감사합니다. 해골기사 때문에 골 때리던 참이었거든요.’

웃길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저 용병 출신인지라 말에 격이 없었을 뿐, 웃길 의도는 눈털만큼도 없었다.

‘푸웃!’

그리고 레오는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신생아도 듣다가 정색할 개그를 저 영감은 웃어준다고?]

<웃어주는 게 아니고, 좋아하니까 웃는 겁니다. 오히려 그때 이후로 많이 친해졌죠.>

그 이후로 알프레드와는 단지 사무적인 관계가 아닌, 가끔 농담을 주고받는 동료가 될 수 있었다.

“커하하하하하!!”

[근데...]

“크핫하하하하하하하!!”

[너무 웃는 거 아니냐? 웃다가 죽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아무리 웃는다고 해도 알프레드 씨가 고작 그런 거에...

풀썩

알프레드가 쓰러졌다. 거품을 문 채로.

“...알프레드!!!”

레오나르도, 나이 13세.

“알프레드 씨!!”

가문에 온 지 13분

“집사장님!!”

집사장 실신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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