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회귀-5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
그녀는 소위 엘리트, 즉 천재의 대표적인 주자였다.
이론이라는 기본적인 큰 틀만 있다면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는 존재, 그게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규격을 넘어선 천재였다.
이론은 어디까지나 큰 틀일 뿐, 만약 재능이 부풀어 오른다면 그 이론 따위는 성장을 억압하는 족쇄에 지나지 않았다.
본디 그렇기에 천재들은 이론을 깨부수고 본인만의 유파를 만든다. 이론으로 인한 더딘 성장에 불만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아리아스필은 달랐다.
그녀는 배운 이론을 깨부수지 않았다.
이 또한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규격을 넘어선 재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강해... 어떻게 이런 나이에...’
‘아가씨는 천재입니다!! 벌써 이런 성장이라니...!’
이론이 아무리 억압해도 그녀는 다른 천재들보다 성장이 빨랐다. 격이 다른 재능으로 급이 맞지 않는 이론을 뛰어넘겼다.
그러니 그 누구도 그녀가 재능이 억압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누구보다 앞서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진 게 싫으면 비긴 걸로 쳐. 됐지?’
자신보다 앞서 있는 인간이 있었다.
‘그럼 그게 문제네.’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집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에게 맞는 틀을 만들어줄,
‘자, 이제 휘둘러봐.’
스승, 처음으로 가르침을 받을 존재를 만난 것이다.
쏴아아아...
바람에 나무가 흔들린다.
“...어...?”
자신의 검이 만든 바람에 낙엽이 차례 떨어진다.
‘가슴이... 두근거려...’
저 소년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래, 이건 말하자면.
‘성취감.’
자신이 한 일에 처음으로 보람을 느꼈다.
단순히 쉽게 따라한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제대로 배워서 ‘학습’했다.
‘...왜지?’
두근거림을 가라앉히려고 소년을 만나러 왔는데,
‘왜 더 두근거리지...?’
오히려 더 두근거리고 있다.
***
[...왜 이러냐? 요즘 시대가 이런 거냐? 어?! 지금은 천재만 나오는 황금기야?!]
<그러게 말입니다. 저런 녀석이 어디서 온 건지.>
[너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저걸 바로 발전시키는데!?]
왜 화를 내고 난리인 건지. 저 녀석이 천재 중에 천재인 건 나도 분통 터지는데.
<별거 없어요. 전생에 아리아스필이 썼던 자세를 가져온 거죠.>
대강 지금 성장 상태에 맞는 적절한 자세를 알려줬다.
아마 그녀라면 바로 따라잡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예상대로 오히려 충격이었다.
“어때? 나쁘지 않지?”
“...어?! 어어... 괜찮아!”
그녀는 놀란 눈치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붉고, 눈에 생기가 비치는 것이 그 증거였다.
‘놀랄 만도 하지.’
저 실력은 본디 제하드가 잘리고 반년 뒤 쯤에나 얻는 기량이다.
1성 마나 코어론 아직 부족해서 완전히 따라잡진 못했지만, 아까 한 마나체련을 보면 그건 시간 문제도 아니겠지.
“그럼 가봐. 호위 기사 양반 걱정할라.”
이미 달은 중천에 떴다. 너무 오랜 시간 나가 있으면 그 호위 건달이 어떤 난리를 피울지 몰랐다.
“그렇겠네...”
아리아스필의 무표정한 얼굴에 음영이 졌다. 변화가 심하지 않아도 그녀가 실망했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수련이 여기서 끝나는 건 아쉽나?’
하긴 본인 같아도 그럴 것이다. 하루만에 한계를 뚫고 괄목이 성장했는데, 그게 바로 끝나면 얼마나 실망스럽겠나?
“내일도 올래?”
“...어?”
“시간은 대충 이때가 좋겠네. 그 호위 기사 양반이 뭐라 하는 것도 듣긴 그러니까.”
“...그...그래도 돼?”
“돼. 나도 혼자 수련하는 건 심심하고, 일주일 동안 마냥 기다리는 것도 막막할 것 같아서.”
이건 레오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동시에 늘 자신의 호승심을 자극했던 라이벌에 대한 경애이기도 했다.
“싫어?”
“...아니. 좋아.”
그녀의 입꼬리는 미묘하게 올라갔다. 저런어설픈 미소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그럼 얼른 가. 라인하르트, 시간 늦었으니까 조심하고.”
“알았어. 늦지 않을게.”
아리아스필은 그렇게 말하며 돌아갔다.
“...아.”
그 때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말을 덧붙였다.
“아리아스필이라고 불러도 돼. 레오나르도.”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가버렸다.
[...새끼, 선수네.]
<네, 다음 고자.>
[이번엔 위장 내부까지 보여주랴?]
아리아스필하곤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하여간 고자들이란.
***
“...자고 있지?“
오늘도 그녀는 잠을 자는 제하드를 살폈다. 제하드는 아리아스필의 목소리에도 곤히 자고 있었다.
그녀에게 시킨 훈련은 제하드의 역량에선 지칠 수밖에 없었으니까.
‘가야겠다.’
하지만 이젠 그런 수업 따위 그녀에게 성이 차지 않았다.
아리아스필은 들뜬 기색으로 여관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뭘 배울까? 오늘도 배우는 것도 재밌겠지?’
뛰어가면서 수업에 대한 다양한 상상이 떠오른다. 그 소년, 레오나르도를 생각하면 항상 머리와 가슴이 들뜬다.
"...왔냐?"
오늘도 그 소년은 숲에서 검을 휘두른다.
"레오나르도!"
"오냐, 그럼 하던 대로 한다?"
"알았어."
그녀도, 레오도 검을 들었다.
"흡...!"
그러곤 각자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주변의 마나를 쪼개가며 체련을 이어갔다.
[꼬맹아.]
<무슨 일이십니까?>
[근데 이게 의미가 있냐?]
<뭐가요?>
현자는 레오와 아리아스필을 번갈아 바라보앗다.
[같이 훈련한다고 해도 실상은 따로 체련하는 것일 뿐이잖아.]
보기에는 그랬다. 서로 신경쓰지 않고 각자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의미야 있죠.>
[그런가? 그러고 보니 주변 마나 입자가 더 고와진 것 같네.]
그 말대로, 두 명이서 마나 입자를 쪼개니 입자 크기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만큼 흡수량도 늘었지.
[근데 애초에 한 명이 먹을 마나, 둘이서 나눠 먹는 거여서 의미 없지 않아?]
그것도 부정 못하는 사실이긴 했다. 사실 이것까지 계산하면 흡수하는 마나량은 대략 비슷하지.
<...사실은...>
[...역시...]
현자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현자의 지혜라면 이미 눈치채고도 남을테지.
[저 녀석한테 마음이...!]
<잘 키워서 이기고 싶습니다.>
...현자의 눈이 끔벅인다.
[마음이 있는 거... 아니었냐?]
<마음? 있죠. 이기고 싶은 마음. 호승심.>
끔벅이는 눈이 기가 막히게 식는다.
[...고자 새끼.]
"누가 고자야?!"
"어?"
짜증이 난 나머지 목청이 올라갔다. 고함에 검을 휘두르던 아리아스필이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고자?"
"아하하하... 말이 헛나왔네. 하던 거마저 하자."
"괜찮아. 근데 고자가 뭐야?"
...설명할 수 있지만, 설명하고 싶지 않다. 얼굴 앞에 고자계의 위상, 고자들의 우상이 있으니 더더욱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하자."
[아무것도 아니긴. ‘누우가~ 고오자아야아~?!’라며.]
아. 진짜 비음 짜증나네.유령 새끼만 아니면 코뼈를 부러뜨리는 건데.
[그래서 뭐라고? 키워서 이긴다는 게 뭔소리야?]
<처음 싸웠을 때, 만족하지는 못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이유 자체는 확실히 있었다. 다만 그걸 구체화시키는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그래서? 뭔데?]
<전성기가 아니잖아요.>
지극히 당연한 이유이자 원인이었다.
레오가 원했던 건, 동등하게 강해진 천재와의 결투였다.
이런 압도적인 편법을 가진 채 결투에서 이긴다 한들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겠는가?
<이거에 자존심 세우면 오히려 수치죠.>
[당연하지. 열 살배기 꼬마한테 뭘 바래. 니가 그랬으면 나도 너 가르치는 거 때려치울 거야.]
<그렇죠. 그게 당연한 거죠.>
그녀가 천재라 한들, 아직은 어린애.
거목이 될 인재라도 자라는덴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제가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요.>
그날, 아리아스필의 검술을 손봐줬을 때, 레오는 확신했다.
<아리아스필은 더 강해질 수 있어요. 회귀 전보다 빠르게요.>
아리아스필의 성장력은 아직 완전히 개방되지 않았다는 것을.
방향성만 잘 잡아준다면, 회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그걸 네가 해주겠다고?]
<네, 그러면 전성기도 훨씬 빠르게 찾아오겠죠.>
전성기 뿐일까, 그 이상을 노리는 것도 가능할 거다. 그러면...
<전성기 땐, 정말 만족스러운 결투를...>
[키잡이잖아.]
내 귀가, 청력이 의심되는 단어였다.
"네?"
[잘 키워서 잡아먹는다는 거잖아. 그걸 뭘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어.]
이 양반은 진짜...
"그게 어떻게 키잡입니까!? 같이 성장한다는 희망찬 이야기지!"
[응, 아니야. 고자승부충아.]
다 크다 못해 삭은 노인네는 마무리로 썩은 혓바닥을 내밀었다. 저 세 치 혀를 뜯어서 귀싸대기에 꽂든 해야지
"뭐라고?"
아차 싶었다. 이번에도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키잡이 뭐야?"
... 이번에도 설명할 수 있지만, 설명하고 싶지 않다.
이 단어의 뜻을 안다는 것 자체가 이젠 수치로 느껴졌다.
"‘키‘가 크는 ‘잡‘기술의 준말입니다. 불량배들 은어이니 절대 쓰지 마세요."
"어어... 알겠어."
존댓말을 하자 그녀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납득했다.
그래, 아직은 순수하게 있어라.
[크하하하하하하하학학!! ’키’가..!! 크는 ‘잡’기술~!! 오~! 그런 뜻이었어요~? 이 현자님이 모르는 것도 있었네요~?]
자신이나 나이만 처먹다 사레들린 저 늙은이처럼 되지 말고.
제발 예전처럼만 커 줘라.
"레오나르도, 혼잣말하는데 미안한데 아까 한 자세 좀 봐줄 수 있어?"
"그래. 얼른! 얼른 보자!"
빨리 화제를 돌려야했다. 저 어린 소녀가 고자니 키잡이니 같은 시궁창 단어를 배울 필요는 없다.
"여기가 문제인 것 같은데... 연격이 너처럼 빠르면 좋겠어."
"그건 나처럼 할 필요없어. 넌 유연성이 좋으니 근력보다는 근육의 탄성을 이용해서..."
이렇게 훈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리아스필은 밤마다 제하드 몰래 밖으로 나와, 레오나르도를 만났다.
기본적으론 마나체련술을 하고, 자세가 별로다 싶으면 레오가 그녀에게 적절한 조언해주는.
그런 수련이 일주일 동안 지속됐다.
레오는 7일 동안 완벽히 마나 코어를 완성했고, 아리아스필은 1년 동안 배워야 할 검술을 압축해서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날이 찾아왔다.
***
"...준비됐냐?"
"응. 오늘은 꼭..."
마지막날, 아리아스필의 눈엔 각오가 있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눈빛이었다.
"이길 거야."
그녀는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았다.
[꼬맹아, '그건' 가급적이면 쓰지 마라.]
<압니다. 저도 양심이 있죠.>
현자에게 배운 그 '기술'을 쓰는 건, 당장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이기면 더한 굴욕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져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레오나르도도 자신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자, 시합."
제하드는 둘의 중심에서 심판으로 섰다.
"시작!"
카앙!!
외침과 동시에 검격이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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