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098
촌장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영주님. 이곳은 숲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사냥감이 적습니다. 원하시는 만큼 가죽을 바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요. 저희 마을에 사냥꾼이라고는 달랑 한 명이 있느…….”
“가죽 따위는 필요 없다. 어차피 브루타뉴 공국에 사는 짐승들이야 해 봐야 뻔하지.”
아주 못쓰는 것들은 아니지만 또 비싼 것은 아니다.
질 좋고 비싼 가죽들은 동북쪽에서 난다.
“그럼… 혹시 약초를 원하시는지… 버섯 종류는 제법 많은 편이나…….”
“버섯. 좋지. 천년 감미료이니 세금 대신 적당히 바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리안의 말에 촌장은 다시 힐끔 리안의 얼굴을 바라봤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역전 마을이 된다. 상인들이 지나갈 때 적당히 숙식을 제공하며 마을을 키워라.”
“네에?! 이런 산벽에 상인이 어떻게…….”
“길이 생겼거든.”
“그게 무슨… 말씀… 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촌장과 주민들.
리안은 손짓을 하며 외쳤다.
“저기. 내가 왔던 곳을 보란 말이다. 너희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더냐.”
리안의 말에 촌장과 마을사람들은 그제야 이해를 했다.
고잉미샤호가 지나온 길은 나무가 쓰러지고 땅이 파여 있었다.
당장에야 나무가 거추장스러워 사람들이 지나기 힘들겠지만, 조금만 손을 본다면 훌륭한 길이 될 것이다.
물론 사람이나 일반 탈것이 아닌 부유선이라면 충분히 지나다닐 길이었다.
“앞으로는 이곳으로 많은 부유선이 지나다닐 것이다.”
이곳도 촌이지만, 레온 백작령도 딱히 특산물이 없었다.
그걸 아는 촌장은 또다시 의구심이 들었지만, 리안의 뒤에 서 있는 자들의 면면이 너무 두려웠다.
“그냥 개발을 하라고 하면 힘들 터이니 지원금을 내리겠다. 세바스 아저씨.”
“네. 선장님.”
그는 돈주머니를 들고 리안을 지나 촌장에게로 갔다.
잘그락.
촌장은 반사적으로 돈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어이쿠!!!”
액수에 놀란 촌장이 놀라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린 것이다.
태어나 이렇게 많은 돈은 본 적이 없었다.
“횡령하거나 도주한다면 도적 길드에 의뢰를 할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 브루타뉴 공국은 반도이니 도망갈 곳이 마땅치 않을 거야.”
리안은 으름장을 놓았고. 어린아이의 낭랑한 목소리였지만, 모두가 움츠러들었다.
이들에게 귀족은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같은 인류가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
“흐합! 절대 영주님의 뜻에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촌장은 겨우 숨을 몰아쉬고는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당연히 주민들 또한 고개를 조아렸다.
“다음에 볼 때는 이 마을이 번영해 있었으면 하는군.”
“분명 그리될 것입니다.”
“그래. 그리고 다음부터는 다들 그리 엎드리지 않아도 좋다.”
시골 영주들이나 주민들을 바닥에 엎드리게 하지, 대도시를 가진 영주들은 그리하지 않는다.
애초에 지나다닐 때마다 사람들이 바닥에 납짝 엎드리면 번거롭기 짝이 없기 때문.
자격지심이 많은 시골 영주들이나 영지민들을 험하게 다루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영주들도 많았지만.
“그럼. 건투를 비네. 촌장.”
리안은 그리 말하고는 배로 돌아갔다.
그 뒤로 부하들도 따라 올라간다.
다만, 돈주머니를 건넸던 세바스가 잠시나마 촌장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인건비는 넉넉하게 써도 좋습니다. 다만, 사용 내역은 빠짐없이 기록해 놓아야 할 거예요. 다음에 와서 확인했는데, 횡령한 사실이 보이면 목이 여럿 잘릴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집사? 님. 꼭 필요한 데만 쓰겠습니다.”
촌장의 말에 세바스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가 미소를 짓는다.
“뭐. 집사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렇다고 너무 아껴 쓰면 곤란합니다. 마을 운영비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용해야 할 겁니다. 영주님이 실망하는 걸 보기 싫다면.”
“알겠습니다. 열심히 몸이 부서져라 마을을 발전시키겠습니다.”
촌장은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맹세했다.
이건 자비로운 어린 영주가 내린 기회였다.
어떤 영주가 이런 한적한 마을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던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쥐어짜서 만들고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영주였다.
“그럼. 잘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만세!! 레온 백작님 만세!!!”
촌장은 두 팔을 하늘로 올리며 리안을 찬양했다.
마을 사람들도 덩달아서 기쁨을 환호를 질렀다.
-만세!! 영주님 만세!!!
그들은 고잉미샤호가 점이 될 때까지도 목청 터져라 외쳐 댔다.
“아직도 저러고 있네.”
부선장은 마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부선장석도 시야 마법이 부여되어 있어서 벽을 넘어 밖이 보였다.
“아마 얼마 가지 않아 망했을 마을이니까요.”
“그래 보이긴 하더군. 그보다 돈을 너무 적게 준 거 아니야?”
“더 줬다간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했을 거예요. 아니면 촌장이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에 걸렸을지도 모르고. 훗.”
요즘 돈을 많이 벌어서 그렇지 일반 마을을 발전시키기엔 준 돈도 차고 넘쳤다.
“선장. 이제 어디로 갈 예정이야? 방향이 갈리는데?”
그때 항법사가 지도를 살피며 말했다.
한쪽으로는 백작 수도로 곧장 갈 수 있지만, 조금 돌아가고.
다른 쪽은 조금만 가면 케리시안 남작령을 경유하지만, 평야 지대가 나와 길을 닦는 데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수도로 바로 길을 닦는 것보다 남작령을 경유하는 것이 영지 발전에 더 도움이 되겠죠?”
“그걸 난들 아냐. 영주는 선장이니 선장이 알겠지.”
리안은 잠시 고민을 하고선.
“역시 케리시안 남작령을 들렀다 가는 것이 좋겠네요. 흐흐.”
갑자기 웃음을 짓는 리안을 보며 부선장은 잠시 몸을 떨었다.
저건 사악한 웃음이다.
“설마… 네 영지인데… 네가 공격할 건 아니지?”
* * *
케리시안 남작령.
대대로 기사단장을 배출해 온 가신 가문이다.
레온 백작령의 가신들 중 가장 입김이 센 가문이기도 했다.
다만, 이번 계승 전쟁에선 한 발 뒤로 빼고는 중립을 취하고 있었다.
“후… 아버지는 왜 안 돌아오시는 건지.”
백작가의 집무실에서 한 청년이 한숨을 쉬었다.
그에 중년의 남성이 조심스럽게 답한다.
“아무래도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백작 부인과 바람이 나서 야반도주를 했다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혹시. 집사장도 떠도는 소문을 믿는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남작님은 명예로우신 분으로…….”
“쯧. 명예는 무슨. 어쨌든 그 리안이라는 꼬마 놈도 돌아오지 않는 걸 봐선 일은 성공했다는 건데…….”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사실 리안을 죽일 계획을 세운 것은 케리시안 남작의 장남인 그였다.
운 좋게 리안의 외가로 가는 서신을 운반하는 사람과 친분이 있었고 몰래 엿볼 수 있었다.
“아버지만 돌아오면 그 공으로 내가 후계자로 완전히 자리 잡을 수 있는데…….”
“만약을 대비해서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집사장은 아버지가 못 돌아올 것처럼 말하는군.”
집사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사실 남작보다는 남작의 아들과 더 친하다고 해야 할까.
더 깊은 진실은 두 사람의 진짜 관계는…….
“쯧. 어머니에게나 가 보세요. 동생이 다치는 걸 좋아하지 않을 것 같으니.”
“제가 말을 잘 해 놓겠습니다. 후후.”
경쟁자인 차남과는 어머니가 같지만, 아버지가 달랐다.
장남의 친부는 집사였던 것.
그 사실을 이 세상에서 당사자인 단 세 명만이 알고 있었다.
“도련님!! 도련님!!”
그때 집무실의 문을 열고 기사 하나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무슨 호들갑인가. 이번엔 어디 진영이야?”
“그게 아니옵고…….”
계승 전쟁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세력은 당연 백작가의 첫째?(리안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가 우세했으나 지리적인 이점으로 둘째가 버티고 있는 중.
“그럼. 설마 아버지가 돌아오셨는가?”
솔직히 말하면 첫째는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죽일 각오나 연민 따위가 아니다.
자칫 친족 살해자라는 타이틀이 붙을까 두려워서다.
그저 정당하고 안전하게 남작에게 후계자 자리를 받고 싶은 것이다.
“아닙니다. 정체불명의 부유선이 나타났습니다.”
“응? 우리 영지에 부유선이 다닐 만한 길이 없는데?”
일반적인 부유선이라면 마음 편히 돌아다니기 힘들었다.
평지야 그냥 다닐 수 있지만, 세상이 어디 평지로만 이루어져 있다던가.
“모르겠습니다. 철갑선입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철갑선이 어떻게 육지를 다녀.”
“그게 진짜입니다!!”
기사의 분위기로 봐서 거짓을 고하는 것은 아닌 듯 보였다.
더군다나 흙먼지를 묻은 것이 직접 확인까지 한 모양.
“그래서 목적지는 이곳이 맞는가?”
“30분이면 이곳까지 도착할 것 같습니다.”
장남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영지민들을 대피시킬 시간은 없겠군. 병력만 최대한 소집해 요새로 올라간다. 어머니도 얼른 모셔 오도록.”
“알겠습니다.”
마을의 위 언덕에 작게 요새.
그다지 크지 않았기에 장기적인 목적보다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 단기간 농성하는 것을 목표로 지어진 것이었다.
당연히 영지민들도 함께 피신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판단했다.
* * *
고잉미샤호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움직였다.
부선장은 그런 리안이 갑갑한지.
“이런 속도로 가다간 다 도망가겠네.”
“도망 안 가요. 아니지. 가지 말라고 이렇게 천천히 가는 거예요.”
갑자기 덮치면 도주하거나 직접 잡으러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주면.
“일단 요새로 대피하겠죠. 어차피 우리가 적인지 아닌지도 모르잖아요.”
오토호스 한 기가 근처까지 접근했지만, 보고가 더 급했는지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아마 당황한 남작의 아들은 병사들만 데리고 요새로 들어갔을 거다.
“음… 설마 진짜 그러려고? 너무 멍청한 거 아니야?”
슐 지역의 요새들과 비교를 해선 안 된다.
그곳의 요새들은 부유선에 어느 정도 대비가 되어 있지만, 이 동네는 부유선이 들어올 수 있는 길조차도 닦여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내부적으로는 전쟁을 소소하게 할지는 몰라도 부유선이 동원될 정도의 외부 전쟁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겪어 보지 못했다.
“멍청하기 보단 본 적이 없으니까요.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브루타뉴 귀족 중 거의 없을 거예요.”
그나마 바다에 어촌 마을이라도 가진 자들이면 해적에게 당한 게 있어서 반응을 할지도 모른다.
다만, 해적들의 부유선은 수륙 양용이 되는 경우가 드무니 그들이라고 해서 딱히 다를 것이 없었다.
“설마… 저 코딱지만 한 요새를 믿고…….”
산등성을 크게 돌아가니 요새가 보였고. 부선장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부유선보다 크고. 석조로 지어졌으니 나름 든든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마포도 보이고.”
“마포라니. 설마 저기 2문을 말하는 거냐?”
부선장은 입술까지 씰룩거렸다.
* * *
요새의 아래에 있는 마을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까 전 병사들이 요새로 올라간 이유가…….”
“그보다 왜 타종을……?!”
침입 타종이 울려 퍼지면, 영지민들은 주요한 물건만 챙겨서 피신하거나 요새로 들어가야 했다.
다만, 남작의 장남은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면 병사들을 제때 받지 못할까 알리지 않은 것.
“적은 아닌가 보지.”
“그럼 왜 병력을 데리고 요새로…….”
마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불안한 눈빛으로 집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는 일 밖에는.
쿠르르르르.
특히나 저 땅이 파이는 소리는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배 밑면이 땅에 닿지는 않지만, 압력으로 인해 땅이 파이는 중이었다.
평소에는 이 정도까지 저공으로 떠다니지 않지만, 이 순간에도 길을 닦는 중이었다.
“뭐냐!! 저 괴물 같은 배는!!”
그 모습이 워낙 기괴해서 장남은 넋을 잠시 놓았다.
명색이 귀족이라 보니 바다에서 다니는 배들도 보았고. 육지를 다니는 부유선도 타 보았다.
문제는 저런 형태도 처음 봤지만, 저런 식으로 땅을 긁고 다니는 것도 처음 보았다.
“공왕께서 도로 정비를 하고 계신 것은 아닐지…….”
솔직히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스랑 제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공국이었기에 딱히 외부의 적이 없었다.
외부의 적이 있다 해도 무에 건질 것이 있다고 여기까지 밀고 들어오겠는가.
더군다나 저런 최첨단 최종 병기 같은 것…….
[반역자는 나와서 무릎을 꿇어라!]
그런데 언덕 아래까지 도착한 요상한 배에서 확성 마법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