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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23화 (223/235)

223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45)>

“…아아아!”

눈을 떴다.

아찔한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고. 상체를 반사적으로 벌떡 일으켰다.

“하아. 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축축했다.

끈적하게 들러붙는 옷을 떼어내며, 거칠어진 숨을 달랬다. 그리고 가슴팍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두근, 두근.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박이 손바닥에 전해진다.

“…방금 건.”

혼란했던 머리가 서서히 식어간다.

좀 냉정해진 머리로 방금의 악몽을 찬찬히 반추해보기 시작했다.

“뭐였지. 대체.”

곰곰이 생각해본 끝에,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아찔해지는 정신 속에서. 나는 가만히 떠올렸다.

‘혹시……?’

혹시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최초 회차의 한 장면인 걸까. 아니면 그냥 혼란한 내 머리가 만들어낸 망상에 불과한가.

당시의 기억이 없는 나로선, 답이 안 나오는 질문이었다.

“미치겠네. 진짜로.”

중얼거리며 몸을 괜히 한 번 뒤척였다.

그러자니 문득, 다리 부근에서 이물감이 느껴진다.

“우응. 아빠아……?”

뭔가 꿈틀거리면서 이불 속에서 기어 나온다. 이불을 들춰보니, 이브가 한껏 밀착한 채 눈을 부비고 있었다.

그녀의 체온이 하체의 감각을 지배한다.

“으히. 잘 잤어, 아빠?”

퍼뜩. 나는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멍하니 풀렸던 시선을 다잡았다. 그리고 힘 풀린 표정으로 실실거리는 이브를 빤히 쳐다봤다.

어느새 미간에 굵직한 골이 패였다.

“거긴 또 언제 기어들어갔냐.”

“으응? 잘 모르겠어.”

“네가 모르면 누가 아는데.”

“진짜 모른다니까. 나도 돌아오자마자 바로 곯아 떨어졌다구. 그러고 지금 아빠 땜에 일어난 거란 말야.”

“흐음.”

이번 전투에선 혈천갑의 파손이 상당했다.

그리고 전에 경험한 바론, 혈천갑의 파손은 곧 이브의 피로도로 직행하곤 했다.

그렇다면 저건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냥 진짜 잠꼬대로 들어왔나.’

지금 바깥 날씨가 장난 아니게 춥다.

그리고 박살난 칵테일 바에 난방이 될 리가 만무하다. 본능적으로 온기를 찾아서 나한테 들러붙었지 싶다.

납득한 나는 주섬주섬 주머니부터 뒤져봤다.

“보자. 오늘이…….”

핸드폰을 꺼내 날짜와 시간부터 확인해봤다. 회귀로 다져진 습관 중 하나였다.

어쨌든 지금은 12월 25일. 오후 4시 18분이었다. 오늘 동틀 때쯤 무르무르와 전투가 끝났으니까… 대략 한 나절 쯤을 내리 잔 듯하다.

“생각보다 좀, 많이 일찍 깼네.”

내 입장에서 이건 의외의 결과였다.

아직 크리스마스가 지나지 않아 있다니. 하도 힘을 많이 써서 꼼짝없이 내일은 돼야 일어날 줄 알았건만.

‘내 정신력도… 그새 성장을 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좀 감개무량하다.

실제로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루 정돈 편히 쉬겠는데.’

최종붕괴일은 12월 27일로 고정이다.

14차 붕괴였던 12월 24일과는 무려 이틀 간격.

영원회귀가 시작한 뒤 이틀 후부터 1차 붕괴가 시작되는 것처럼. 마지막에도 이틀간의 공백이 있다.

‘이유는 모르겠다만.’

어쩌면 이 마지막 공백에도 숨은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딱히 알고 싶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비밀이 뭐가 더 있든, 이젠 전혀, 요만큼도 궁금하지 않았다.

‘이제 그냥 전부, 지긋지긋해.’

오히려 있어도 내 쪽에서 무시하고 싶을 정도다.

솔직히 넌더리가 난다. 머리가 아프다 못해 터질 지경이니까.

생각해봐야 소용없는 골치 아픈 일은 차치하자. 다른 건전한 생각이나 떠올리기로 했다.

“이거… 선물이라도 주러 가야 하나.”

여성진들의 은신처에 찾아갈까 싶어 중얼거렸다.

모처럼 아직 크리스마스도 안 지났겠다. 산타클로스 코스프레라도 하고, 선물 명목으로 안부나 확인하러 갈까 하는 심산이었다.

“으응? 선물? 아빠아. 웬 선물? 나 선물 주려구?!”

그런데 이브가 귀신 같이 그 단어에만 반응해왔다.

나는 귀찮은 나머지 얼버무릴까 하다가, 그냥 얌전히 포기했다. 그리고 대략적으로 크리스마스에 대해 설명해줬다.

이브는 어느 순간부터 내 말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사,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라고??”

정확히는 산타에 흥미가 있는 듯했다.

근데 이상하게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가 의문의 공포와 경외를 담아서, 내게 조심스레 반문해 왔다.

“그, 그러니까. 산타클로스란 할아버지가 나온다는 거지? 오늘?”

“그런 소문이 있다는 거지.”

“시뻘건 옷을 온몸에 둘둘 껴입고. 뭐가 잔뜩 든 시뻘건 자루를 메고. 몰래 굴뚝을 타고 남의 집에 쳐들어오는, 흰머리에 흰수염이 성성한 할아버지?”

“…맞긴 한데.”

“그, 그거, 무서운 이야기야? 아빠?”

“…….”

얼굴이 왜 저리 딱딱하게 굳어 있나 했더니, 그녀는 무시무시한 산타의 공중강습 소식에 공포를 느낀 듯했다.

내가 산타의 외관을 좀 이상하게 설명했지 싶다.

“잠깐 실례.”

나는 이브를 슬쩍 치우고 벌떡 일어난다. 허리가 박살난 채 나동그라진 냉장고로 다가가, 안에서 물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줄줄줄. 찌그러진 물통에서 물이 질질 새고 있다.

[스킬 발동: 리스토레이션]

꾸드드득!

물통을 금세 말끔하게 원상복구 시켰다. 뚜껑을 열고, 아직 새나가지 않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약간 맛이 비리다. 오염물질이 좀 섞인 듯하다.

“크흠. 음.”

냉수 한 모금 들이켜니 좀 더 진정이 된다.

몸과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고 할까. 청량해진다. 이 느낌 덕분에, 난 회귀 후에 냉수부터 마시는 습관이 뱄었지.

뚜둑, 뚝. 나는 목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스트레칭을 했다.

“마셔라. 이브.”

그리고 물통의 남은 물을 이브에게 건넸다.

이브는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봤고. 이내 배시시 눈웃음치며 눈썹을 튕겼다.

“아빠아. 혹시 딸기우유는 없어?”

“…딸기우유.”

“나, 먹은 지 되게 오래된 거 같은데. 이번에 나 열심히 했으니까. 주면 안 돼?”

“그야. 뭐.”

“요즘 잘 안 줬잖아. 응? 응??”

그러고 보니 이브에게 딸기우유를 재촉 받은 것도 꽤 오랜만이지 싶다.

내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이브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슬쩍 들이밀었다.

“난 산타 같은 무서운 할배는 필요 없으니까! 아빠가 그… 크리스마스? 선물 주라!”

“내가……?”

“응! 딸기우유 하나면 된다니까? 응? 응응??”

이브는 여전히 딸기우유바라기였다. 이 정도면 살짝 경외감마저 들 정도다.

파지직!

허공을 찢어 열고 인벤토리를 뒤적거렸다.

“자.”

나는 곧 딸기우유를 찾아냈고. 그것을 꺼내 이브에게 던져줬다.

이브는 대번 화색을 띄우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앗싸아! 고마워 아빠! 으헤, 에헤헤!”

여전히 이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아한다.

세상이 이렇게 곱창이 났는데. 심지어 지금까지 지지고 볶고, 눌러 살았던 칵테일 바가 이렇게 풍비박산이 났는데도.

아랑곳 않고 그녀는,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다.

“…이브.”

“으응? 왜애?”

내가 부르자, 이브는 행복한 얼굴로 빨대를 쪽쪽 빨며 대답했다.

흙먼지가 잔뜩 뭍은 소파를 괜히 한 번 쓰다듬었다. 한참을 그런 끝에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약간 섬뜩한 위화감을 말이다.

“다른 사람들. 지금 어디 있는지 궁금하진 않냐.”

“으응? 다른 사람들? 누구?”

“이세라나 강서윤. 아니면 강수아라든지…….”

거기까지 말한 뒤. 잠깐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고개를 휘저으며 말을 정정했다.

“그래. 엄마. 네 엄마 말이야.”

“아아, 으음! 그러네? 그러고 보니 다들 어디 놀러 갔나? 안 보이네!”

이브는 이제야 눈치챘다는 기색이다.

그녀가 빨대에서 입술을 떼고 눈을 들었다. 동그랗게 뜨인 붉은 눈이, 방정맞게 사방을 휘휘 둘러본다.

그러나 털썩. 금세 다시 고개를 떨궈 버렸다.

“뭐, 아무려면 어때! 알아서 잘들 살고 있겠지. 응!”

쭈욱쭈욱.

이브가 어깨를 으쓱였고. 다시 행복한 얼굴로 딸기우유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모두의 안위가, 딸기우유에 뒤쳐져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냐.”

“응. 왜? 아빠, 그 사람들 뭐 하고 있는지, 나 알아야 돼?”

시선을 슬쩍 들었다. 이브의 붉은 눈을 가만히 마주봤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진심이구나.’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다. 딱히 화난 것도 아니다.

지금 저건, 그녀의 순수한 진심이었다.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고?’

이브는 정말로 다른 사람들의 행방은 물론이고 생사여부까지, 일말의 관심도 없다.

내 목소리는 조금씩 요동치기 시작했다.

“네 엄마도… 궁금하지 않냐?”

“응. 전혀?”

“왜냐. 혹시 크게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뭐 어때.”

“…뭐?”

“다쳐도 나을 거잖아.”

“…….”

“그리고 다쳤던 것도, 죽어버렸던 것도 어차피 잊어버리잖아. 엄마는.”

그건 좀 숨이 막히는 대답이었다.

이상하다. 이브의 저런 반응은 이상해도 좀 단단히 이상했다.

나는 전에 없이 혼란을 느꼈다.

‘뭐지.’

이브는 한 때 수아에게 잊히는 걸 두려워했다.

그 때문에 나와 대대적으로 반목까지 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끔찍하게 싫어했다.

‘분명히 그랬는데.’

그런데 지금의 이브는?

그 때의 이브와 동일인이 맞나 싶을 정도다.

“난 있잖아? 이제 아빠만 있으면 돼.”

흠칫.

나도 모르게 등줄기가 곧추섰다.

어느새 딸기우유를 다 먹은 이브가 내게 몸을 밀착해왔고. 전에 없이 요염한 손놀림으로, 내 허벅다리를 쓸어내렸기 때문이다.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아줌마도, 이모도. 툭하면 나를 잊어버리는 엄마도. 다 필요 없다구.”

“…….”

“이제 아빠만 있으면 돼. 아빠만, 내 옆에서… 영원히. 나를 기억해주면 돼. 그거면 충분해.”

“…무, 무슨.”

“그러면 말이야. 나도 아빠를 기억해줄게. 영원히 말이야! 에헤.”

광기가 절절하게 흐르는 문장의 향연.

애정을 갈구하듯 가슴팍에 부벼대는 얼굴.

그리고 맹목적으로 나를 향해 있는, 두 줄기의 새빨간 안광.

“나랑, 평생 같이 있자? 아빠.”

“…….”

“에헤헤. 헤헷.”

멋쩍은 듯이 이브가 배시시 웃었고. 그것으로 대화는 잠시 소강되었다.

입을 꽉 닫은 채 잠깐 이브의 작태를 관망했고.

“흐. 흐하.”

이내 희미하게 실소를 터뜨렸다.

뭐랄까. 이브가 내뱉은 말들은 물론이고,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황. 하나부터 열까지, 이제 그냥 웃겼다.

반쯤 미쳐 있는 이브에게 지지 않도록. 나도 미친놈처럼 빠르게 중얼거렸다.

“아빠라고. 내가?”

“어… 아, 아빠?”

“수아는 엄마고? 내가 아빠. 그렇단 말이지.”

“왜, 왜 그래? 아빠, 뭔가 잘못됐어? 응??”

지금의 나는 안다.

이브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수아를 엄마로 인식했는지 말이다.

생각보다 간단한 얘기다.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쉽지.

“그래. 그렇지. 수아는 엄마지. 엄마는 맞지.”

최초의 회차에서. 수아의 결정으로 이브가 다시 태어났다.

지금의 이브를 태어나게 만든 건 분명히 강수아라고 할 수 있다. 이브의 입장에서 수아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그래. 어머니. 나도 그 외의 적절한 표현을 못 찾겠다.

“근데. 왜… 나는, 아빠인 거냐고.”

수아를 엄마라고 부르는 건 납득이 된다.

하지만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다. 알 수는 없고, 이제 와서는 다만 이런 추측을 할 뿐이다.

“나도 뭔가, 영향을 준 거냐? 너한테? 응?”

정확히 뭐에 영향을 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뭔지는 몰라도. 뭔가는 영향을 미친 거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아빠인 것 같다.

“대체… 왜냐고. 왜……!”

왕을 만나면.

진짜 강수아를 만나고. 모든 것을 끝낼 때가 오면. 이 의문도 해소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럴 수 있기만 바랄 뿐이다.

“아, 아빠. 왜… 그래?”

이브의 걱정과 두려움이 섞인 시선이 날아든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 감촉이 깜짝 놀랄 정도로 인간적이라, 나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물렸다.

“…쯧.”

미친놈 놀이는 그쯤에서 그만뒀다.

궁상을 접고,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돌아온다.

엉덩이나 툭툭 턴 뒤. 나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이 싹 달아나네. 아주.”

신랄하게 중얼거리는 한 편. 폐허가 된 주점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출입구로 향했다.

영 힘아리가 없는 걸음걸이였다.

“어어? 아빠. 어디가!”

도도도! 부리나케 이브가 따라붙었다.

그녀가 내 소매를 꾹꾹 잡아끌며 관심을 호소했다. 나는 그녀에게 슬쩍 고개를 돌렸고, 쓴웃음과 함께 지상으로 향했다.

“…걸으려고. 바깥바람 좀 쐬러 간다.”

“흐응? 산책한다는 소리?

“비슷하지.”

“그럼 나도 같이 가!”

“그러든지.”

“으히히. 아빠랑 산책, 오랜만이네!”

오랜만이라.

그 말에 나도 몇십 회차 전의 일화를 떠올렸다.

분명 그런 일도 있었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는 아파트 단지랑, 시가지를 돌았던가.”

“으응. 이상한 아저씨들이랑 시비도 붙었었지!”

“내가 동전으로 대가리 박살냈고.”

“아하하! 맞아 맞아! 그거 재밌었어! 아빠 짱 멋있었어!”

이브가 박수를 쳐가며 동조해줬다.

이미 묻혀버린 지난 회차의 일을 추억처럼 회상한다.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와 공유한다. 웃고 울며 떠들어댄다.

별안간, 눈물이 나올 정도로 벅찬 감정이 사무쳐왔다.

“…하.”

생각보다 꽤 괜찮을지도 모르겠는데. 이브랑 영원히 사는 거.

분명 맨 정신인데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와아! 눈이다, 눈!”

치기 어린 망상은 이브가 고함으로 날려줬다.

퍼뜩, 반사적으로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아.”

하얀 쓰레기가 펑펑 쏟아지고 있다.

갈라지고 움푹 패인 지면, 무너진 건물. 그 위에 널브러진 시체들 위에도. 소복이 눈이 쌓여 시계(視界)를 하얗게 메웠다.

“눈… 오네.”

멍하니 중얼거렸다.

세기말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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