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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22화 (222/235)

222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44)>

“…전부라고.”

무르무르의 말을 멍하니 곱씹었다.

클클클. 무르무르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그에 반응해왔다.

―자네조차 잃어버린 회차. 원래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바뀐 왕과 원래의 왕이 누구였는지까지. 나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초인.

“…….”

한동안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내 가까스로 쥐어짜낸 말은, 이것이었다.

“왜.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냐.”

―그 질문은 좀 뒷북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초인.

“…뭐?”

―그렇게 따지면 말이야. 애초에 난 어떻게 자네의 1033번이나 반복된 회귀를 전부 기억하고 있는 거냐?

“그건.”

할 말이 없었다.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자, 무르무르의 조소가 한결 짙어졌다.

―그래. 애초부터 난 특별했다. 다른 던전 마스터들과는 근본적으로 뭔가가 달랐지.

“…….”

―그렇지 않나?

실제로 그랬다.

무르무르는 베르페아노와 함께, 회귀 전의 회차를 전부 기억하는 존재.

단순히 차원이 다른 무력뿐만이 아니다. 처음부터 놈에겐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왜… 그랬던 거냐.”

지금까지 고이 접어둔 의문이었다.

놈이 밝혀줄 생각이 없었고. 그래서 알 방도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무르무르는 최후에 다다른 지금. 드디어 밝혀줄 기분이 든 모양이다.

―간단하지. 나 역시 계약자기 때문이다. 초인.

그것이 무르무르가 이죽거리며 밝혀준 진상이었다.

나는 눈썹을 슬쩍 비틀어 올렸다.

“계약자?”

―자네가 곧 만날 ‘왕’과 비슷한 케이스라는 거다. 초인.

“…아.”

―난… 설계자와 스스로의 의지로 거래를 했지. 동등한 입장에서 계약한 끝에, 내 발로 놈의 휘하에 들어가 ‘던전 마스터’를 자처했다. 그런 소리가 되겠군.

평범하게 내기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놈은 화신과 모종의 계약을 했다.

진짜 수아와 비슷한, 계약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난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

그 결과. 무르무르는 스스로 화신에게 지배받는 던전 마스터가 되었다.

마치 봉건제의 기사가… 계약을 통해 영주에게 충성을 바치듯이.

―피와 목숨이 흐르는 싸움의 기억. 내가 나로서 살아 왔던 모든 기억들을 원했다. 그 결과 나는 스스로를 잃지 않은 채, 영원 무궁히 전투를 계속할 수 있게 됐지.

“…….”

―한도 끝도 없이 날 싸우게 해줄 것. 그게 내가 내걸었던 계약의 유일한 조건이었고. 나는 지금까지도, 이 계약에 충분히 만족하는 중이야.

무르무르는 여타 쓰고 버리는 장기 말이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화신 소유의 기사(騎士) 같은 존재다.

계약과 이해관계로 묶인, 충직한 기사 말이다.

―그리고 이번 패배의 기억을 말미암아. 다음번의 나는 더욱 강해질 게야. 흐흐.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무르무르의 광기는 상상 이상으로 순박하고 순수했다.

감히 내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턱 막힐 수준의 전투 광이다.

‘베르페아노도… 이런 케이스인 건가.’

화신과 직접 계약을 해서 무언가를 얻는다.

그리고 그 대가로 던전 마스터가 된다. 화신의 수족으로서 움직이는 기사가 된다.

나는 새삼, 광기로 번들거리는 베르페아노의 눈빛을 떠올렸다.

“…X발.”

나도 모르게 넌더리를 냈다.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마음껏 처싸워라. 나 없는 데서.”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린 뒤. 나는 놈에게서 시선을 뗐다.

터벅, 터벅. 아까보다도 한결 좋아진 몸을 이끌고,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예언을 해주지.

무르무르의 시체는 이미 8할 이상의 형체가 허물어졌다.

하지만 회광반조라도 되는 건가. 목소리는 지금까지보다도 훨씬 뚜렷하게 들리는 듯했다.

나는 넌더리를 내듯 놈의 시신을 노려봤다.

―아마도 말일세. 내가 자네의 마지막 강적이 될 거다. 초인.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들려왔다.

나는 놈이 했던 말을 가만히 머릿속으로 되뇌었고, 그래도 이해가 안 된 나머지 결국 육성으로 내뱉었다.

“마지막이라니. 이게 끝이라고?”

―그래. 자네가 앞으로 전투를 할 일은, 아마 이제 없을 테지.

“그게 무슨…….”

갈 곳을 잃은 의문의 시선이 괜히 허공을 방황한다.

내 반응만을 기다렸다는 듯, 무르무르는 즉각 대꾸해왔다.

―이 내가, 사실상 자네를 막아서는 마지막 관문이다.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는 소리다. 내기를 해도 좋다네.

“하지만 아직, 마지막 던전 마스터가 있는데…….”

―그 던전 마스터의 정체를 이미 알 텐데. 그런 말이 잘도 나오는군?

“…아.”

그제야 나도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최종국면에서 나를 기다리는 게 누구던가. 바로 강수아다.

알다 못해 친한 사람. 그리고 친하다 못해… 볼꼴과 못 볼꼴도 다 본 사이지.

“…너. 그 여자를, 잘 아냐?”

무르무르가 더 이상의 전투는 없다고 확언했다.

그건 내가 모르는 ‘진짜 강수아’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기억이 하나도 없는 나보단 많이 아는 게 확실했다.

―뭐, 그래. 기억이 없는 지금의 자네보단 잘 알겠지.

아니나 다를까. 긍정이 나왔다. 그것도 내 생각을 그대로 읽은 듯한 불쾌한 긍정.

무심결에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마지막 던전 마스터는… 나한테 적의가 없는 거냐?”

―높은 확률로 그럴 거다. 그 계집은 일단, 자네가 알고 있는 그 가짜와 기본적으로 다를 건 거의 없으니까 말이야.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아는 수아의 형상을 뇌리에 떠올린다.

어깨까지 오는 흑발과 서글서글한 눈매. 하얀 피부와 핏기가 옅은 입술. 그리고 작은 체구와 좁은 어깨까지.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다.

―다만 자네는… 그녀를 만나면. 아마도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거다.

상념에 잠겨있던 정신을 무르무르의 목소리가 깨웠다.

우중충한 하늘로 흩어지는 잿가루를 쳐다봤다. 눈앞에서 흩날리는 시커먼 알갱이들이 무르무르의 목소리를 싣고 날아온다.

나는 미간을 바짝 좁힌 채 중얼거렸다.

“선택이라고?”

비슷한 얘기를 전에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 아마도 에티였던 걸로 기억한다. 놈도 나에게 비슷한 말을 했었다.

―아아, 그렇구나. 이러면 선택지가 달라지는구나.

그 때. 에티는 내게 말했었다.

최대한 후회가 남지 않는 선택을 해보라고. 분명 그런 말을 했었지.

멍하니 상념에 잠겨있자니, 무르무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인가. 아니면 소를 위한 대의 희생인가. 말하자면 그런 선택이 되겠군.

“그건 또 무슨……?”

―글쎄. 거기까지 말해주는 건 내 소관이 아니다. 내 주인에게 제지당하기 전에… 난 이만 퇴장하도록 하지.

“아니, 잠깐……!”

파스스!

채 멈출 시간도 주지 않았다. 할 말을 모두 지껄인 무르무르는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놈이 사라져간 하늘을 망연히 올려다봤다.

“…아.”

그리고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잿가루가 잔뜩 섞인 회백색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다.

* * *

이세라의 주점으로 복귀했다.

아니. 주점에 복귀했다고 해야 하나. 정확히는 주점(이었던 것)에 복귀했다.

그곳엔 이미 뼈대만 남은 폐허밖에 없었다.

“허.”

끼익, 덜커덩!

무너지다 못해, 가루가 되다시피 쓸려나간 건물의 잔해들. 산처럼 쌓인 잔해 밑으로 익숙한 계단의 형상이 보였다.

나는 잔해들을 힘겹게 치우기 시작했다.

“후우, 후……!”

탈진이 회복되지 않았기에 힘들기 짝이 없다. 하물며 스킬 사용은 어림도 없다.

수십 년만에, 진짜배기 D급 헌터로 돌아간 기분이다.

“푸하아.”

털커덩! 쿠당탕!

한참이 지난 뒤. 가까스로 내려갈 만한 통로를 확보했다.

나는 두더지 마냥 그 굴속으로 파고들었다. 시커먼 어둠에 잠긴 지하로, 힘겹게 한 걸음씩 전진해갔다.

‘의외로 지하까진… 피해가 덜하네.’

이걸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아까의 전투를 뇌리에 슬쩍 복기해 봤다.

나와 무르무르의 전투는, 분명 금세 노원구를 벗어나는 양상으로 흘러갔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서울 전역. 가까운 경기도 일대까지 모조리 쑥대밭이 될 만큼 성대하게 날뛰었지만. 정작 같은 곳을 다시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이번 생은 파괴지역이 좀, 유독 넓고 얕게 퍼졌다.

“찾았다.”

얼마나 잔해를 헤집고 토사를 쓸어냈을까. 드디어 눈앞에 익숙한 출입구가 등장했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이세라의 주점 출입구였다.

“끄… 응.”

문을 슬쩍 밀었고. 그것으로 입구의 수명이 다했다.

우직, 콰당탕! 이미 뼈대만 남아 있던 출입구가 산산조각 났고. 그대로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우르릉! 그 충격으로 지하통로 전체가 낮게 신음했다.

“워.”

설마 무너지는 건가.

연신 돌가루를 쏟아내는 천장을 조마조마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격렬한 진동은 금세 잠잠해졌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다이나믹해졌네, 아주.’

쓴웃음과 함께 주점 입구를 지나쳤다.

그리고 내부를 슬쩍 훑어본 나는, 무심결에 피식 웃었다.

“난리도 아니구만.”

박살난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무너진 선반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지하인데다, S급 배리어 스킬 덕택에 직격은 피했다지만. 워낙 어마어마한 힘의 격돌에 버티지 못한 것이다.

뭐랄까. 거인이 주점을 통째로 붙잡고 칵테일처럼 뒤흔든 모양새였다.

‘역시 피신 시켜놓길 잘했군. 나머지들.’

여기에 수아를 비롯한 다른 애들이 그대로 숨어 있었다면?

솔직히 상상도 하기 싫다만. 아마 박살난 테이블과 의자들 사이에 시체 쪼가리들이 같이 널브러져 있었겠지.

‘뭐 그래도… 누울 곳 정돈 남아 있네.’

털컹!

만신창이로 널브러진 소파를 냅다 발로 차서 제대로 세웠다.

그리고 털썩, 나는 소파 위로 몸을 던지듯이 뉘었다.

“후… 우.”

주점을 안전지대라고 인식해서 그런가. 지금껏 잊고 있던 피로감이, 노도처럼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하다.

철그럭!

온몸을 감싸고 있던 갑옷이 비명을 지른다.

“아.”

그제야 아직 혈천갑이 장착돼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슈르륵!

즉시 변신을 해제시켰다. 핏줄기가 가슴 앞으로 모여들며, 성인 여성의 형체로 천천히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

그것을 끝까지 보고 있을 여력도 없었다.

소파가 날 잡아먹는 듯하다. 눈이 저절로 감긴다. 거부할 힘조차 없다.

덥석.

주변에 나뒹굴던 담요로 몸을 덮는 게 고작이었다.

“…흐.”

순식간에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마지막으로 들린 건.

조소 섞인 내 한숨소리였다.

* * *

피곤이 쌓여서 그런가.

힘을 한계까지 쓰고 난 다음엔, 으레 악몽을 꾸곤 한다.

“…오빠.”

이번에도 그냥 그런 악몽 중 하나지 싶었다.

시작부터 수아의 우울한 목소리가 들려서 그랬다.

저 목소리만 나오면 반사적으로 꿈이겠거니 생각한다. 이젠 그런 경지에 이른 것이다.

“흐흑. 오, 오빠. 오빠아……!”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는 울상을 짓고 있는 수아가 있다.

“아니에요. 내가 바랐던 건. 이런 게 아니란 말이에요……!”

뭔가 이상하다는 건 직후에 깨달았다.

위화감이 강하게 들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는 수아의 얼굴이 전에 없이 낯설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강렬한 의문에 휩싸인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나는, 나는…! 정말로! 이,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요……!”

입이 닳도록 사죄한다.

영문 모를 소리들을 주워섬기고. 이내 뭔가를 필사적으로 변명한다.

그제야 뭐가 이상한 건지 깨달았다.

“너. 누구냐.”

아니구나. 아니었다.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저런 처절한 표정을 짓는 수아 따윈… 본 적이 없다.

이건 악몽이 아니다. 내 옛날 기억엔 저런 수아가 없다.

“여기는…….”

그쯤 돼서야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온통 시커먼 공간이었다. 상하도 전후좌우도 아득한 검은색 뿐. 바닥조차 가늠이 안 돼서 공중에 떠있는 게 아닌가 싶은, 그런 공간.

“어디야……!”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공간 역시, 기억엔 없다.

굳이 따지자면… 그래. 여기는, 회귀하기 직전마다 들르는 그 심연의 장소를 닮았다.

“너, 설마.”

나는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강수아. 그녀의 정체가 어렴풋이 짐작됐기 때문이다.

“왕이냐?”

물어보는 형태였지만. 심증은 이미 확실했다.

터벅, 황급히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 했다.

“큭……?”

웬걸. 발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선을 흘깃 내렸다. 발아래의 시커먼 어둠이 어느새 내 발목을 삼켰다. 끈적하고 질척한 감각이 신발을 뚫고 쏟아진다.

나는, 점점,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삼켜져가고 있었다.

“수아. 수아야……!!”

쿠르르륵!

발목을 지나 무릎. 허벅지. 그리고 허리와 가슴까지.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몸이 아래로 빨려 들어간다.

점점 숨이 막혀가는 걸 느끼며, 나는 필사적으로 수아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오빠. 미안. 정말… 미안해요.”

수아가 그런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는다.

우는 것보다 처절한 웃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도 내 손을 맞잡기 위해 양손을 뻗어왔다.

이건 좀 익숙한 상황이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전생의 수아가 내 앞에서 죽기 직전에 항상 내뱉는 사과. 그리고 저 표정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익숙한 것이었다.

이내 그녀의 축 쳐진 고개가 힘없이 추락했다.

“나를요, 용서하지 마세요. 절대로요.”

쿠르르륵!

그리고 그 순간. 마침내 어둠이 내 몸을 완전히 잠식했다.

수아의 형상이 어둠 속에서 빠르게 희미해지고. 흩어져 가기 시작했다.

“아… 극……!!”

괴롭다. 숨이 막혀온다.

사지를 열심히 버둥거렸다. 물속을 헤집는 듯한 둔중한 감각이 온몸을 지배했다.

나는 의식이 희미해지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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