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11화 (211/235)

211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33)>

꽤 충격을 먹어서 한동안 땅만 쳐다봤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산책은 멈추게 됐다. 내가 우두커니 멈춰 버려서, 프라키도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멈춘 것이다.

―음… 이제 놀랄 건 다 놀랐나? 자네.

진득하게 기다리던 프라키가 넌지시 재촉해왔다.

피곤에 찌든 시선을 들었다. 놈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것 같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만. 아직 더 놀랄 게 남아 있으니까 말이야.

“…아.”

―가장 중요한 현왕. 최초의 초인이 누군지 아직 못 들었잖나. 이게 진짜배기인데 말이야.

“…….”

그러네. 이것조차 시작에 불과했던가.

이미 죽은 왕의 정체만으로도 어지러웠는데. 이건 또 얼마나 날 어지럽게 할까.

상상만 해도 벌써부터 신나서 미쳐버릴 것 같다.

“…….”

아니. 슬슬 눈 가리고 아웅은 그만두자.

그냥 솔직해져라 한정용. 이미 반쯤은 예상하고 있지 않은가. 이쯤 되니 이 악물고 모른 척하기도 무안할 지경이다.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툭 물어봤다.

“그래. 대망의 최종보스는 누구냐.”

―보자. 분명 그것도 여인이었네. 그 때 분명, 자네가 애타게 불렀던 이름이…….

“강수아?”

―어어, 그래. 그 이름이었지.

“…….”

―뭐야, 어떻게 알아챘나? 내가 혹시 중간에 말해버렸던가?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보다 놀라지 않는 자신에게 놀랐다.

“…그렇구나.”

뭐라도 좋으니 반전이 있길 바랐다.

내 불길한 예상이 이번 한 번만 틀렸으면 했다. 그 동안 수도 없이 적중해왔으니까.

“역시. 그렇구나.”

이번 한 번 정도는 틀려도 괜찮지 않나 싶었다고.

그 간절한 믿음의 결과는, 어김없이 배신으로 돌아왔다.

“하.”

모 게임에서 그랬었지. 애초에 기대를 하니까 배신당하는 거라고.

기대를 해 버린 내가 죄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반전이 없는 게… 반전이었네. X발.”

피식.

뒤틀린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백지가 됐고. 이내 시커멓게 물든다.

“…몇 개만 짚고 넘어가자.”

―그러시게. 얼마든지.

지금 나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 생각도 없었다.

어쩌면 너무 생각이 많아서 뒤죽박죽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닥쳐온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걸 수도 있고.

어쨌든 덕분에 지금, 내 목소리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최초의 초인이라는 그 여자. 지금 나랑 같이 산다.”

―으잉? 그런가?

“그래. 먹고 자고 싸고. 잘만 살고 있다고.”

―그건 좀 의외구만. 자네, 최초의 초인과도 아는 사이였나?

“그렇게 됐네. 어쩌다 보니.”

거 참 대단한 우연이다.

주인공과 악역, 양쪽과 친한 엑스트라라니. 세상에 이런 십인싸 엑스트라가 다 있나. 쌍욕 나오는 상황에 혀를 찼다.

그런 내 생각을 부정하듯, 직후 프라키가 고개를 슬슬 저었다.

―옥좌 양반. 그건 좀 전후관계가 뒤집힌 게 아닐까?

“뭔 소리냐 그게.”

―죽어 버린 왕과도, 최초의 초인과도 깊게 관련이 있는 사람이 자네뿐이었다. 그러니까 자네가 새로운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맞는 순서 아니겠나?

“…그래. 그게 맞겠네.”

나와 프라키는 사이좋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니. 태평하게 납득이나 하려고 꺼낸 얘기가 아니었지.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다시 이야기를 본궤도로 돌렸다.

“어쨌든 그 여자… 강수아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왕 같은 게 아냐.”

―오호. 그런가?

“그래. 의심할 여지없이 평범한…….”

―그러면 평범한 쪽은 왕이 아닌갑지, 뭘.

“…뭐?”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긍정해버리는 프라키였다.

나는 두 눈을 튀어나올 듯이 부릅떴고. 놈을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프라키는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일 뿐. 여전히 유들유들하게 받아쳤다.

―자네와 함께 산다는 그 평범한 여인. 그쪽은 왕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닌가? 대체 뭐가 문제인가?

“아니. 하지만, 방금까진 수아가 왕이라고……!”

―그러면 둘 중 하나는 가짜라는 거겠지.

“……!!!”

―그리고 높은 확률로. 당연히 자네 옆에 있다는 그 평범한 여인 쪽이, 가짜겠지.

“…….”

―아니 그런가? 왕의 옥좌여.

흐으음.

별안간 프라키가 침음을 흘리며 상념에 빠졌다.

이내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찐득한 흥미가 서렸다.

―그래.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인데. 아마도 그건 초인의 유해일 걸세.

“초인의… 유해?”

―전임 초인은 새로운 왕이 되기 위해 옥좌에 앉았지. 그리고 그러려면… 초인도 일단 한 번 죽을 필요가 있네. ‘왕’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말이야.

“다시 태어난다?”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일단 한 번 죽는다.

죽은 왕이었던 이브가, 육사도로 태어나기 위해… 알에서 다시 깨어난 것처럼.

―강수아는 이미 한 번 죽었네. 도전자.

머리맡에 베르페아노의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간다.

나는 멍하니,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일단 한 번… 죽는다고.”

―그래. 그리고 죽어 버린 왕이 그 시커멓고 거대한 찌꺼기를 남겼듯이. 죽은 초인도 이번 시나리오에… 일종의 찌꺼기를 남긴 거지.

“…찌꺼기.”

최초의 초인이 남긴 유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강수아의 찌꺼기.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지금의 강수아.

내가 1033번이나 목숨 바쳐 지키려던 것의, 실체였다.

“…….”

대충 그 때쯤부터였다.

나는 서서히, 두 눈을 부릅뜨기 시작했다.

“그 시커먼 거… 참칭차는, 죽은 왕의 유해라고 그랬지.”

프라키가 한참 전에 했던 말.

그게 뒤늦게 뇌리를 후려쳤기 때문이다.

놈은 내가 중얼거리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다만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가 던전 마스터라고 착각했던 그건 죽어 버린 왕의 유해. 최초의 왕이 죽으면서 남긴 사념의 찌꺼기이자… 왕릉의 입구 같은 것이다.

“…왕릉?”

―그거 아나? 왕의 무덤에는 보통 왕이 잠들어 있네.

의미심장한 웃음과 목소리가 뇌리를 맴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듣는 즉시 깨달았다.

―그 왕의 유해 최심부. 거기에 자네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진짜 왕이 숨어 있네.

“……!!”

―게다가 지금. 드디어 모든 육사도는 옥좌 앞에 모였다. 조건은 완벽히 갖춰졌어.

입을 한 번도 뻥긋하지 못했다.

서늘한 겨울바람에 실린 웅혼한 목소리가, 귓전을 후려쳤다.

―이제 내 힘까지 가져가서. 왕의 탈을 쓴 참칭자를 찢어발기게나.

꾸벅.

문득 프라키가 내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답지 않게 기품 있는 인사다.

엄숙함과, 거룩함마저 느껴진다.

―진짜 왕을 영접하러 가세.

푸화악!

놈이 별안간 자기 목을, 자기 손으로 쥐어뜯었다.

피분수가 하늘 높이 솟구치는 가운데. 멍하니 서 있는 내 앞으로, 뜯겨나간 오경태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왔다.

―지겹게 반복된 이 연극의, 막을 내릴 시간이다.

잘린 오경태의 머리가 말해왔다.

피범벅의 광소가 만면에 가득하다.

* * *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었다.

꽤 오래된 예전 일이다. 한참 전의, 이젠 기억도 희미한 회차의 사건.

기억의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수아의 목소리다.

“…오빠.”

그 날 수아는 엄청난 공포와 혐오와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쏟아지는 마이너스 감정에 온몸을 격렬하게 떨며, 그녀는 슬며시 물었다.

“사람들이… 대, 대체 왜. 왜 저러는… 걸까요?”

그 날 수아는 집단 살육전을 벌이는 인간군상들을 목격했다.

몬스터와 사람의 전투가 아니다. 서로의 이권과 생존을 놓고, 사람과 사람이 벌이는 순수한 골육상쟁이었다.

“지금. 안 힘든 사람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데……! 다, 다 같이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대체 왜! 서,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고요……!!”

수아는 지극히 옳은 소리를 넋두리처럼 늘어놓았다.

맞는 말이다. 힘들 때일수록 돕는 게 맞지. 심지어 전 세계가 미증유의 멸망 위기에 닥친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녀의 별나라 꿈동산 사고방식으론, 생존자끼리의 소요사태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자. 일단 이리 와. 앉아 봐라.”

“어, 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수아에게 턱짓했다. 그녀는 곧잘 알아듣고 뽈뽈거리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덥석.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착석.”

“아……!”

손에 슬쩍 힘을 줬다.

털썩. 수아를 내 앞에 반강제로 앉혔다.

“…좀 이상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 가정을 좀 해보자. 수아야.”

“네, 네?”

수아는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든 말든. 나는 멋대로 넋두리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나랑 네가 있다.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어. 먹을 식량도 딱 정해져 있는 세상이야.”

“아, 네에…….”

“이 한정된 식량을 이제, 나랑 네가 합의해서 분배해야 되는 걸로 하자.”

“그, 그렇군요?”

수아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딱 ‘이 새끼 또 개지랄이네’ 하는 얼굴이다.

내가 반복되는 한 달 이전에도 자주 꼰대질을 한 모양이다. 정작 나는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난다.

오래돼서 안 나는 건지. 베르페아노에게 먹힌 건지는 모르겠다만.

“생각을 해보자. 내 입장에선 세 가지 경우의 수가 있지.”

“세 가지……? 어떤 거죠?”

“서로 뒤지게 싸우다가 식량을 둘 다 조금씩밖에 못 가지는 경우. 합의 끝에 공평하게 반씩 나눠 가지는 경우. 마지막으로 대체로 공평하게 나누되, 네가 나보다 조금 더 많이 가져가는 경우.”

“그, 그렇군요. 그렇긴 하네요.”

“어느 쪽 선택지를 고르면. 내가 제일 불행해질 것 같냐.”

선문답이었다.

어지간히 뜬금없게도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강수아는 내 표정이 진지해서인지,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그야 당연히, 첫 번째? 둘 다 조금밖에 못 가지는 게 제일 불행하죠?”

수아는 당연한 대답을 내놓았다.

물론 이런 당연한 대답을 듣자고 선문답을 진행한 게 아니다.

그리고 저건. 애초에 정답도 아니다.

“3번이지. 네가 나보다 조금 더 많이 가져가는 거.”

“네?! 왜, 왜요?”

“원래 불행은 비교에서 시작되는 거니까.”

“…아?”

그래서 갑자기 이런 말은 왜 하냐고?

지금까지 바깥에서 일어나는 인간끼리의 분쟁들. 그 근본적인 이유를 따져보면, 이것과 다를 것이 하등 없기 때문이다.

“바깥의 미친놈들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기는 말이다. 질투심이다. 수아야.”

나는 없는데. 남은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발생하는, 그 더럽고 추악하며 끈적끈적한 감정.

질투. 시샘. 그리고 폭발하는 억하심정.

왜 나만?

왜 우리 가족만?

왜 쟤네들은 살고, 우리 가족은 죽어야 했는데?

“전 세계 모든 인간들이 다 같이 불행해졌으면 저 새끼들은 지랄하지 않았어. 오히려 서로의 상처를 물고 빨고, 보듬어줬겠지.”

그런데.

하고 많은 사람들은 아직 잘만 살아 있는데. 하필이면 우리 가족만. 재수 없게 게이트 재해에 휘말렸다.

처참하게 죽어 버렸다. 갈가리 찢겨나가 시체쪼가리가 돼버렸다.

“왜 나만. 쟤는 괜찮은데, 왜 우리만.”

행복의 빈부격차가 발생했다.

다른 모든 것보다도. 일단 그 부분이 분하고 억울한 것이다.

“…그게 문제인 거야.”

이제 가난한 쪽에선, 부유한 쪽을 어떻게든 자기 위치까지 끌어내리려 발악한다.

군대 부조리가 으레 그렇게 전염되듯. 개인의 불행이 집단 전체에 전염된다.

왜 나만 고통을 받아야 하는데.

너희들도 똑같이 당해 봐. 나처럼 고통스러워 봐야 한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거다. 전에 없이 진지하게.”

혐오스러울 것도 없다.

그게 당연한 거다. 나도 1천 번 회귀하면서 비슷한 감정을 숱하게 느껴봤다.

내가 수백 번을 복습하며 배운 인간이란, 그냥 근본이 그렇다.

“그, 그게 뭐예요. 마, 말도 안 되잖아요!”

수아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뒤흔들며 내 말을 부정했다.

그리고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래요. 백번 양보해서, 오빠는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래. 나는 실제로 그런 사람이야.”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오빠 같지는 않아요! 저는… 저, 저는 도저히 지금 오빠의 사고방식이 이해가 안 돼요!”

“그러냐. 근데 대부분은 너 같지 않고 나 같더라. 수아야.”

“으읏……!”

그렇군.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이 문답으로 나는 떠올랐다.

떠올렸던 기억을 지금 재차 떠올렸다고 할까.

‘내가 강수아를 지키고 싶어 했던 이유 중 하나. 이거였던가.’

나는 내 인간관이 정답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녀의 민들레 꽃밭 같은 이상론이 옳다고도 믿고 싶다.

‘나는… 강수아의 신념을, 지켜주고 싶었다.’

나도 진심으로 보고 싶다.

지금도 아직 늦지 않았다. 일말의 기대 정돈 남아 있다.

내 뒤틀린 인간관이 부정당하는 세상. 이제라도 와줬으면 좋겠다.

‘적어도. 지금까지 반복된 세상에선…….’

수아는 틀렸다.

나는 옳고 말았다.

* * *

“오빠……?”

희미하게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다.

비몽사몽한 정신. 뿌리 깊은 피로가 온몸을 세차게 짓누른다. 그 와중에 눈을 세차게 깜빡거려 시야를 빠르게 복구했다.

“…수아.”

되돌아온 시야엔 강수아가 보였다.

그녀의 걱정스런 얼굴 뒤론, 익숙한 이세라의 주점 풍경이 자리했다.

‘꿈… 은 아닌 것 같고.’

직전의 선잠에서 수아가 나오는 꿈을 꿔서 좀 헷갈렸지만. 나는 곧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깨닫고 나니, 절그럭. 바지 주머니에서 이질적인 묵직함이 느껴졌다.

“…….”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묵직한 그것을 꺼내들었다.

피처럼 새빨간 드래곤 모양의 석상이었다. 목 부분이 잘려나가 한층 기괴하게 느껴지는, 기묘한 분위기를 내뿜는 석상.

“…….”

두근, 두근.

크기는 딱 내 손바닥만 한 사이즈였고.

지금도 내 손바닥 안에서, 힘차게 맥박치고 있었다.

“하.”

그것이 확실히 깨닫게 해준다.

그래. 꿈이 아니다. 모두 현실이다. 외면할 길이 없는 잔인한 현실.

“…X발.”

꾸드득.

손등이 하얘지도록 손아귀에 힘을 줬다. 그리고 석상을 부술 듯이 쥐었다.

이 석상을 얻었던 순간의 기억이, 득달같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