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32)>
―설계자는 감독이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극장의 주인에 가깝지.
프라키가 혀를 낮게 차며 중얼거렸다.
나는 순간 그 말이 이해가 안 됐고. 당연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극장… 주인?”
―의지는 있으나 구현할 능력이 없는 감독에게 무대를 제공해 주고. 그에 따른 대가와 보수로써 한 편의 장절한 드라마를 받아가는 게야. 쉽게 말해 스폰서 같은 존재일세.
“…스폰서라고.”
―이번만 해도 그렇지. 전체적인 시나리오를 짜고 무대를 제공한 이는 설계자가 맞을지 모르겠으나, 자네에게 저주를 걸게 한 당사자… 감독은 따로 있지 않았나?
거기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주니. 그 뒤로 이어질 말은 나도 추측이 가능했다.
추측한 바를 어렵사리 입에 담기 시작했다.
“그 감독이 최종보스. 육사도들이 말하는 왕인 거냐.”
―그런 셈이지.
“그 감독은, 설계자가 직접 선발하나?”
―대개 그렇다네.
“그러면 무대와 시나리오가 바뀔 때마다… 항상 달라지겠군. 주인공인 초인과 똑같이.”
―정확해. 제대로 이해했구먼.
목이 탄다.
머리가 핑 돈다. 하나씩 추측하면서도 내가 이해한 게 맞나 싶었다.
그래서 목소리는,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 경우엔, 그 왕이란 놈이…….”
―자네에게 주인공의 역할을 떠넘긴 탈주자. 다른 말로는 ‘최초의 초인’이었다. 그렇게 정리가 되겠지.
“…아아.”
더듬더듬 이어지던 말을 가로채는 프라키.
말문이 막혔다. 멍하니 탄성만 흘렸다.
내 예상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아. 이건 별로 중요한 건 아니네만. 그래서 옥좌의 명칭도 좀 변했더구만.
“변하다니. 죽어 버린 왕의 옥좌… 이거 말이냐?”
―원래는 그냥 ‘왕의 옥좌’였어. 그래서 나는 그게 익숙한데… 그새 형편에 맞게, 앞에 수식어가 좀 더 붙었던데?
수식어가 더 붙었다고 한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다, 이내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바뀐 거였냐. 최초의 왕이 죽어 버려서?”
―그런 것 같네. 허헛.
피식.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쓴웃음이 입가에 맴돌았다.
내 입에서 홀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좀, 이해가 되네.”
―음? 뭐가 말인가.
“전에 누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거든.”
나는 베르페아노를 떠올리고 있었다.
놈과의 마지막 대화가 뇌리를 잠식했다. 그 끈적한 목소리를 찬찬히 되새겨본다.
“내가 던전 붕괴를 종식시켜도 영원회귀는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원회귀가 끝나면… 던전 붕괴는 종식될 수밖에 없다던가.”
그럴 수밖에.
회귀의 저주는 왕이 화신과 계약한 결과물이다. 지금 흘러가고 있는 시나리오의 엔딩 여부와는, 결과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니까. 그 계약을 내가 건들지 않는 한.’
내가 마침내 왕을 죽여서 엔딩을 만들어 내도. 영원회귀는 끝나지 않는다.
그 둘은 애초에 별개의 문제니까.
‘반대로 그 계약을 건드리고, 파기시킬 수만 있다면…….’
이 시나리오의 근간이 흔들리게 된다.
내가 주인공인 이 이야기는, 애초에 그 둘의 계약 덕분에 시작되었다.
새로운 왕이 원해서. 화신에게 일종의 억지를 부렸고. 강제로 엔딩을 틀어막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파기되어 버리면?
화신 역시 계약의 의무에서 자유로워진다. 계약 지속할 이유가 없어진다.
다시 말하면, 이 지리멸렬한 연극을 유지해줘야 할 이유도, 없다.
“이제야. 알겠어.”
놈이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야 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도. 확실히 알았다.
“둘이서, 대체 무슨 계약을 했는지. 우선은 그걸 알아야겠군.”
나는 확신에 차서 중얼거렸고. 프라키는 그런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자 그러면. 배경지식은 이 정도 설명했으면 됐겠지?
프라키가 한껏 밝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밝은 목소리라 해봐야 특유의 노이즈 때문에 귀에 거슬릴 뿐이다. 나는 인상을 바짝 찌푸리며 놈을 노려봤다.
―이제 자네가 가장 궁금할만한, 엑기스들만 남았구만!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그것을 위해 어조를 바꾼 듯했다.
나는 찡그린 인상을 펴지 않은 채 손사래를 쳤다.
“여기서 더 중요한 얘기가 남았냐.”
―있지. 있고말고.
“뭐냐.”
―그래서 죽어 버린 옛 왕은 누구고. 최초의 초인… 그러니까 지금의 왕은 누구인가. 이런 것?
“……!”
―설마 자네는 알고 싶지 않은 겐가? 그럴 리는 없을 텐데 말이야.
“…….”
찡그렸던 인상이 단박에 펴졌다.
멍하니 풀린 얼굴이 프라키에게 향했다. 놈은 내 벙찐 표정을 보더니, 입가의 조소를 한껏 짙게 머금었다.
나는 더듬더듬 물었다.
“알고, 있는 거냐?”
―알지. 나는 그 최초의 회차를 전부 기억하니까. 모를 수가 없지.
“그럼, 대체 누가……!”
―오오, 너무 달려들진 말고. 하나씩 전부 말해줄 거니까. 진정하게.
멱살을 쥐어 챌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그걸 미리 감지한 프라키가 손사래를 치며 만류했다.
어쩔 수 없이 내 돌진은 우뚝 멈췄다.
“…크……!”
나는 이를 박박 갈았고. 유유자적한 프라키의 면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프라키가 난처한 듯이 고개를 휘저었다.
―이렇게 반응이 좋아서야. 진실을 밝혔을 때… 자네의 감정이 얼마나 격렬해질지. 벌써부터 두려워지는구만.
“…됐으니까. 말해. 빨리.”
―아아, 알겠네. 알았어. 보채지 좀 말게.
프라키가 입맛을 다시며 슬쩍 몇 걸음 물러섰다.
내가 뿜어내는 기세와 살기가 어지간히도 흉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보자, 누구부터 말해줄까. 최초의 왕? 아니면 최초의 초인? 응?
“아무 거나 상관없어. 빨리.”
―흐음. 그러면 죽어 버린 왕의 정체부터 말해주겠네.
“그러든가.”
나는 될 대로 되란 듯이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프라키는 지금까지 그랬듯, 평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입고 있는 갑옷 있잖나? 그 시뻘건 거.
“…그래. 혈천갑.”
―그걸 자네한테 빌려주는 육사도가 있을 걸세.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 지금은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을 텐데. 맞나?
“이브. 여자 맞지.”
―음. 그 여인이 최초의 왕이었네.
강물 흐르듯이 스무스하게 지나간 대화.
잘 흘러가나 싶다가 중간에 뭔, 터무니없는 소리가 하나 들려온다.
“……?”
순간 이해를 제대로 못했다. 그래서 반응도 제대로 못했다.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뭐?”
―자네에게 지금 혈천갑을 빌려주는 여인. 그 자가 원래의 시나리오에선 왕이었다.
“…….”
―기존의 ‘하트여왕의 눈물’은 말이야. 애초에 사람의 형상도 아니었네. 그냥 시뻘건 보석에 불과했지.
“…….”
―그런데 이번에 자네가 주인공으로 바뀌면서. 그녀가 새로운 육사도로 급하게 변경되었다. 그래서 선대 왕의 형상을 그대로 가져오게 된 것이야.
뭔가 비밀이 더 있을 거라곤 예상했다.
하지만 이건 좀 선을 넘었다. 내 예상의 범주를 아득하게 뛰어넘은 정체다.
그래서 도저히 믿지 못한 나머지, 다시 한 번 물었다.
“뭐가, 어쨌다고?”
―에헤이. 다 들었잖나. 거 적당히 좀 하시게나.
“…아니. 그, 그…….”
―그 여인은 본래 평범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설계자에게 왕으로 선정되는 바람에, 던전에 속한 존재로 변질되었어.
“…….”
―그런데 거기서 왕으로서 한 번 죽고. 그녀는 또 다시 부활했다. 역할을 돌려쓰기 당했다고 해도 좋겠군. 이번엔 육사도 중 하나… 하트 여왕의 눈물로서 말이야.
침묵 위로 프라키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해가 안 된 것은 아니다. 지금 내가 넋이 나간 것은 완전히 다른 이유다.
아까부터 놈의 목소리가 한 군데만 계속 맴돈다.
“원래… 인간이었다. 라고.”
좀처럼 풀리지 않던 의문 중 하나가 드디어 풀렸다.
이브는 던전 마스터를 죽여서 파밍한 아이템에서 태어났다.
보석을 닮았던 그것은 사실 알이었고. 그녀는 거기서 태어난 던전 생물이다.
‘분명 던전 생물인데.’
그런데 이브의 육체는 인간의 그것이었다.
여러 사람이 보증해줬고, 혹시나 해서 전문가의 정밀검사까지 받아봤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인간이었군. 원래는.”
지구의 인간이 확실하다고 했다.
그 이유가 밝혀지지 않아 답답했었는데. 바로 이것이었다.
“왕도. 초인도… 설계자가 선발해서.”
그래서 주인공이든 최종보스든. 처음엔 지구의 평범한 인간이다.
그래서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육체를 가지게 됐다. ‘왕’이었던 시절은 어떨지 모르겠다. 어차피 이제와선 알 방도도 없다.
어쨌든 육사도인 지금은, 그렇게 됐다.
―나 있잖아. 왜 이렇게… 여기가 익숙하지?
―으응, 익숙하다 해야 하나. 뭐랄까. 좀 그리운 듯한, 아련한 느낌? 데자뷰?
지난날에 이브가 했던 말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것들도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또한 그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나는 지금 어렴풋이 깨달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었던 시절.
혹은 내가 모르는, ‘왕’이었던 시절의 기억.
이브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모종의 이유로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으음. 자네가 생각하는 그건 아닐걸?
내 생각을 읽은 듯이 프라키가 손사래를 쳤다.
흠칫,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프라키의 이죽거리는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혹시나 그 여인의 옛날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거 아닌가?
“…맞긴, 한데.”
―그건 아닐 걸세. 내 생각엔 그럴 일은 없어.
전처럼 평이한 어조.
그러나 전에 없이 단호한 어조였다.
이브의 옛날 기억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프라키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건 왜냐. 프라키.”
―왕으로 전락했던 시점의 그녀라면 몰라도, 육사도인 그녀는 한 번 죽었다가 부활한 상태일세. 그렇잖나?
“그게 뭐.”
―아무리 육체가 인간 시절과 똑같은 구조라고 해도. 지금의 그녀는 육사도로 재생산된, 완전히 다른 개체에 가깝다는 거지.
“그건…….”
―돌아올 기억 자체가 없다는 소리야. 굉장히 흡사한 다른 개체니까. 이해하겠나?
툭툭.
프라키가 자기 관자놀이를 두들기며 말했다.
돌아올 기억이 없다니. 그건 좀 현 상황과 매치가 안 되는 말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 애는 분명, 어렴풋이 전의 기억을……!”
―그건 기억은 사라져도.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기 때문일세.
“…감정?”
―나도 가끔 그럴 때가 있거든. 처음 보는 물건이나 생물한테 이상하게 아련한 느낌을 받는다든지. 원인 모를 친근함을 느낀다든지.
“…….”
―이 오경태만 해도 그렇다네. 나도 왜 이 친구가 마음에 드는지 잘 몰라. 하지만 뭔가… 이상하게 마음이 쓰인다. 분명히 그런 감각이 있어.
프라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을 툭툭 쳤다.
놈의 아련한 시선이 오경태의 팔다리를 훑었고. 이내 나를 똑바로 향했다.
―나 자신도 기억이 결손 돼 있다는 자각은 있다. 뭔가가 허전한 기분도 분명히 있네.
“…그러냐.”
―하지만 지금까지 수백 년은 지난 것 같은데. 내가 설계자에게 삭제당한 과거의 기억이 돌아온 적은 한 번도 없다네.
“…그렇군.”
―설계자의 능력이 불안정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악질적으로 일부러 그렇게 설계된 건지는 모르겠다만. 이건 참 신기한 기분이란 말이야. 허헛.
프라키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지금까지의 기괴한 조소와는 근본부터 다르다. 놈의 말마따나, 어딘가 아련한 기색이 깃든 웃음이었다.
“…….”
그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깊은 상념에 빠졌다.
머릿속에선 아직도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의 말들이 하나씩 머릿속을 맴돈다.
―아빠를 오빠라고 부르는 거. 왠지 나 좀… 익숙한 느낌인데.
그리고 거기서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나는 고개를 확 쳐들었다. 프라키가 깜짝 놀랄 정도의 기세였다.
―워 씨. 깜짝 놀랐잖나.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뭐, 뭔가. 갑자기.
“이브. 전대 왕은, 혹시 나랑… 아는 사이였나?”
―내 눈이 맞다면, 아마도?
“…….”
―확실하진 않네. 나는 어디까지나 목격자일 뿐이니까. 확실한 관계는 이전의 자네와… 죽어 버린 왕. 본인들만 알고 있겠지?
설마 했던 긍정이 나왔다.
발밑이 아득해지는 감각이 재차 찾아온다.
“나는…….”
당사자였던 ‘왕’은 이미 죽었다. 그 회차 자체도 완전히 없던 일이 돼버렸다.
그리고 한낱 엑스트라였던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이 없다.
“이브랑 나는.”
그러니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정확한 진상이 밝혀질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정황상 이것만은, 확실해보였다.
“이브는, 나랑, 꽤 친한 사이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