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26)>
전투를 무사히 마치고 베이스까지 귀환했다.
주점의 정문 앞에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문고리를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결계라도 쳐있는 양 그 자리에 붙박였다.
“…….”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6차 붕괴 이후와 비슷하면서도 좀 다르다.
강서윤 때는 한 시라도 빨리 상태를 확인하고 싶다는 기분이었는데. 이번 이세라 때는… 오히려 두려움 때문에 확인하길 주저하고 있다.
“…아빠. 안 들어가?”
한참을 가만히 있으니 뒤에서 이브가 재촉했다.
결국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야지. 들어간다.”
붙잡은 문고리를 천천히 돌렸다.
끼이익.
내가 미는 힘에 따라 문이 열리며 주점 내부 정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덜컹! 누군가 문틈을 비집고 확 튀어나왔다.
“왁!”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칼과 눈가를 칭칭 묶은 안대. 그리고 타이트한 정장 차림의 차분한 분위기의 여자.
그것은, 척 봐도 사지가 멀쩡한, 이세라였다.
“…이세라.”
나는 바짝 굳은 채 멍하니 이세라를 쳐다봤다.
그 희박한 리액션에 무안해진 것인가. 이세라가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내게서 후다닥 떨어졌다.
“음… 여, 역시 안 놀라네요. 아하하. 혹시나 했는데.”
미래를 봐서 안 놀랄 걸 알았음에도 저 짓을 한 모양이다.
그 장면까지 빠짐없이 눈에 담은 뒤. 나는 멍하니 상념에 빠지며 중얼거렸다.
“살아 있구나.”
“네. 걱정해 주신 덕에 멀쩡하네요?”
“…그렇군.”
“넵. 솔직히, 지금 엄청 쪽팔려요. 혼자 죽는다고 난리쳤던 게… 아하하.”
그렇다.
이세라는 지나칠 정도로 멀쩡했다.
지금까지는 무슨 짓을 해도 죽음을 막을 수 없었는데. 세계가 손에 손 잡고 그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데.
‘이렇게까지, 아무 일도 없을 줄은.’
이번 회차엔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아무런 사건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평화로우니까 오히려 불안하네, 이거.’
레드스컬의 박상아가 별안간 쳐들어오지 않는다.
붕괴지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이 다짜고짜 주점 쪽으로 들이박지도 않았고. 웬만한 상황을 다 대비했는데, 이세라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지도 않는다.
이것 역시 서윤이 때랑 똑같다.
‘내가 있는 여기. 1033회차는… 지금까지랑은, 다른 세계 수준인 건가.’
지겹도록 반복되던 지옥의 한 달은 깨져버렸다.
‘확정성 사건’들은 모두 확정이 아니게 되었고. 모든 인과가 비틀어지고 뒤섞였다.
내가 기억하던 영원회귀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훨씬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강서윤이 멀쩡히 살아 있고. 이세라까지 살아 있는 이 시점.
나는 비로소, 내가 알던 영원회귀의 종말을 실감했다.
‘나도 이제 뭐, 회귀 뉴비나 다름없네.’
내가 토할 만큼 반복했던 회귀의 사이클이 붕괴했다.
이건 단순히 회귀가 덜 지루해져서 좋다, 그 정도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육사도의 등장으로 막혔던 혈이 뚫린 거야.’
누군가가 강제로 틀어막고 있던 연극의 전개. 나를 주인공 삼은 화신의 연극이 이제야 정상궤도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다시 말하면…….
‘…엔딩이, 가까워졌다.’
아니지. 가까운지는 모르겠는데.
최소한 엔딩을 볼 최소요건은 갖추기 시작했다. 그런 거창한 소리가 된다.
‘그 최소 조건의 시발점이…….’
999번의 회귀.
내가 999번이나 그 무간지옥을 반복해서, 최초의 육사도인 이브를 획득하는 것.
그래야만 이 이야기가 비로소 출발선에 서도록, ‘왕’과 ‘화신’이 합심해서 판을 짜 놨다. 그것이 현재까지 밝혀진 정황이다.
‘진엔딩 보려면 회차 플레이가 강제된 게임. 그런 느낌인가.’
그것도 최소 999번 반복하도록 강제하는 게임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런 게임은 옛날부터 극혐하는 편이다.
회차 플레이는 어디까지나 플레이어의 선택 사항이어야 한다. 게임플레이 외적인 선택을 개발자가 강요하는 순간, 그건 그냥 병신 똥겜일 뿐이다.
“진짜, 존나…….”
과거의 나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개인적인 신념이 확신 수준으로 굳었다.
“개병신 똥겜이 따로 없네. 내 인생.”
“어… 예? 뭐, 뭐라고요?”
“아니. 그냥 혼잣말이다.”
“으음?”
복잡다단한 기분이다.
이제 와서는 다만 의문만 들 뿐이다.
‘대체 이 앞에… 무슨 결말을 내놓으려고.’
그리고 대체 어떤 개같은 현실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건지.
의문스러우면서도, 한없이 무서울 뿐이다.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다. 정말로.”
“후후. 제가 살아 있어서 기쁘세요?”
“말이라고. 당연히 기쁘지.”
“아으… 흐흐.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시니, 저도 기쁘네요!”
이세라가 빙긋 웃으며 내 앞을 연신 기웃거렸다. 나도 슬쩍 입꼬리를 비틀어 화답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복도에 흐르길 잠시.
“…….”
“……?”
이세라가 그 뒤로도 한참동안 내 앞을 기웃거렸다.
이내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내 쪽으로 양팔을 슬쩍 내밀었다.
뭔가 맡겨놓은 것을 요구하는 듯한, 당당한 행색이다.
“자요. 준비됐어요.”
“…뭐가.”
“살아 있음에 감격해서 와락 껴안아줘야죠. 서윤 씨 때처럼!”
“…….”
뻔뻔하게 요구하는 이세라.
이 여자는 장난을 너무 진지한 어조로 친다. 가끔은 혹시 진심인 거 아닌가 헷갈릴 때가 있을 정도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미래의 나 중에 누군가는 해줬겠지.”
그렇게 얼버무리고 주점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퍼뜩, 이세라가 내 앞을 다시 막아섰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뭐야. 안 해줘요?”
“…굳이?”
“서윤 씨는 해주더니! 사람 차별하는 거예요? 그건 좀 서운한데.”
“아니. 그게 아니고.”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이세라도 되레 기가 막히다는 듯이 따지고 들어오니, 한층 더 어이가 없었다.
이내 그녀가 하아, 한숨을 내쉬며 뻗었던 손을 거뒀다.
“알겠어요. 특별히 제가 그건 양보할게요.”
“…그, 그래.”
“그러면 약속했던 거나 해줘요.”
“……?”
“청혼해준다고 했잖아요? 일단은 그걸로 만족할게요!”
“…….”
잠깐 이세라와 무언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난 숨을 삼켰다.
이 미친년, 약간 진심인 것 같다.
“…끝까지 살아남으면. 난 분명 그렇게 말했다. 지금 얘기가 아니지.”
“에엥? 그런 게 어딨어요!!”
“여기 있다. 난 거짓말은 안 했어.”
“여자 마음 갖고 장난친 거예요? 와아, 진짜 너무해!”
이후 이세라가 나머지 여성진에게 전말을 일러바쳤다.
나는 엄청난 비난의 화살을 한 몸에 받았다. 단숨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나는 급한 대로 이브에게라도 내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그건, 아빠가 무조건 잘못한 거 같은데…? 청혼이 장난이야 아빠?”
그리고 이브까지 날 배신했다.
아군이 없으니 서럽다.
“토식아. 맞담 가자.”
“…오랜만에 불렀다 싶었더니. 첫 마디가 그거냐?”
이세계 만렙토끼 소환해서 줄담배 피웠다.
오늘따라 담배가 맛있다.
* * *
덜컹! 띠로링!
눈앞의 인형 뽑기 기계가 귀여운 효과음을 냈고. 이브가 조이스틱을 움직이자 천천히 크레인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나와 이브는 그것을 눈에 불 켜고 주시하는 중이다.
“하, 한다. 아빠!”
“그래.”
“한다? 진짜 누른다?!”
“…그래. 빨랑 해라.”
“에잇!”
꾸욱. 이브가 긴장된 얼굴로 버튼을 눌렀다.
크레인은 먼지가 잔뜩 쌓인 인형들 중 하나를 덥석 집어 들었고, 천천히 위로 올라간다.
힘겹게 옆으로 기어가던 크레인은 얼마 안 가서 곧…….
투둑. 매가리 없이 인형을 놓쳐버렸다.
“아아~! 또 놓쳤잖아!”
이브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머리를 쥐어 싸매고 박박 긁었다.
이이, 이이잇, 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흘리길 잠시. 새빨간 시선이 퍼뜩 나를 향했다.
“아빠! 이거 순 사기 아냐? 10번이나 했는데 한 번이 안 걸려!”
“…원래 인형 뽑기가 그래.”
“으우… 내가 못하는 건가? 아빠가 한 번 해볼래?”
“내가 해도 똑같다. 못 뽑아.”
여기는 용산의 CCV.
정확히는 영화관 앞에 흔히 하나씩은 꼭 있는, 폐허가 된 작은 오락실 안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뭐 하고 있냐면. 인형 뽑기 하는 중이다.
“이잇. 이번에야말로……!”
풍비박산 나서 방치된 오락실.
유일하게 크레인 기계 하나만은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돼, 됐다. 걸렸다. 느낌이 좋아, 아빠!”
당연히 기적의 산물 따윈 아니다.
망가져 있던 뽑기 기계를 리스토레이션 스킬로 복원시켰다. 그리고 내가 마력을 변환해 전력을 불어넣고 있는 중이다.
“으약! 또 떨어졌어! 왜 이리 힘이 없는 건데!!”
여기에 찾아온 용무는 당연히 10차 붕괴를 막기 위해서.
그럼에도 인형 뽑기나 하고 있는 이유는, 그냥 붕괴 전까지 할 일도 없어서.
결정적으로 이브가 눈깔 돌아서 생떼를 써댔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돌고 돌아 용산은 또 나왔네.’
전의 고정 붕괴지는 용산 전자상가였지.
무작위로 변한 붕괴지까지 용산 CCV냐.
용산에는 무슨 마가 끼기라도 했나. 그야말로 비운의 아포칼립스 오브 드래곤마운틴이다.
‘하긴. 유동량이 어지간히 많으니.’
교통의 허브인 용산역이 있으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잠깐 잡생각에 빠져 있자니. 이브가 조이스틱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아빠아. 진짜 안 할 거야? 재미없게?”
파짓!
나는 대답 대신 기기에 올려놓았던 손을 치웠다.
쿠르릉! 인간 발전기 한정용의 전력공급이 중단되자, 환하게 빛나던 인형 뽑기 기계가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어. 안 해.”
“아아. 저 하얀 강아지 인형, 진짜 갖고 싶었는데…….”
“갖고 싶으면 꺼내줄게.”
스윽. 반대쪽 손을 들어 주먹을 말아 쥐었다.
표적은 유리판 너머. 얼빠진 표정의 하얀 강아지. 스눕피 인형이다.
주먹을 장전하고, 목표지점을 죽일 듯이 노려본 후. 그대로 유리판을 향해 내지른다.
“안 돼! 뭐하는 거야 아빠!”
우뚝.
주먹질 직전에 이브의 고함으로 중단됐다.
그녀가 인형 뽑기 기계를 지키듯이 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고개를 열심히 좌우로 가로저었다.
“그렇게 반칙으로 빼내면 무슨 의미가 있어!”
“갖고 싶다며.”
“정당하게! 뽑아서 가져가야 의미가 있는 거라구.”
“…뭐가 다른 거냐.”
“으음, 성취감이랑 추억이 남잖아, 추억!”
“허.”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헛숨이 흘러나왔다. 던전발 외계인 처자가 성취감과 추억 운운하는 게 예상외라 그렇다.
파지짓! 어쨌든 나는 다시 왼손을 기판 옆에 갖다 댔다.
“그렇다면야… 도전은 해본다.”
“으응? 아빠, 강아지 뽑아주려고?!”
“그래.”
“앗싸! 아빠가 뽑아주면 기분 더 좋을 거 같아! 히히.”
그렇게 내가 바통을 이어받아 인형 뽑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약 30분이 지난 뒤, 이브가 질린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빠. 진짜 어지간히 못하긴 하는구나……?”
“…말했잖아. 안 된다니까.”
내가 30분 동안 한 개도 못 뽑아서 그렇다.
보다 못한 이브가 내 대신 도전해보려 했지만. 이번엔 내가 단호하게 막아섰다.
“잠깐만. 이번에야말로 될 거 같다.”
“아빠. 그 말만 지금 수십 번째야.”
“이번엔 진짜로. 무조건 된다니까.”
“아휴. 네네, 그러세요…….”
그 과정이 정확히 24번 더 반복된 뒤. 나는 드디어 이브가 원하던 스눕피 인형을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덜컹!
인형이 배출구에 떨어졌고,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노력이 승리했다.”
“이겼다고 할 수 있나, 이거……?”
“아무리 희생이 커도 원하는 걸 얻었다. 그러면 승리야.”
“그, 그런 거야?”
“그런 거다. 내 기준으론.”
“으음. 그렇구나…….”
이브가 영 마뜩찮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품으로 털썩, 뽑아낸 스눕피 인형을 안겨줬다.
이브의 표정은 단박에 밝아졌고. 이내 인형을 꽉 끌어안으며 얼굴을 부볐다.
“으응. 아빠 말이 맞네! 역시 아빠가 최고야!”
“…그래.”
그렇게 난데없는 전초전은 끝을 맺었다.
시간을 하도 까먹어서 금세 10차 붕괴가 닥쳤고. 전투는 본편으로 들어갔다.
―아아. 시간이.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간다.
붕괴한 던전은 제59던전. <시간의 틈새>.
‘시간의 마녀 세 자매’라는 세 명의 보스만으로 이루어진 비선형 던전.
성가시기로는 100개 던전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이 갈리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