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21)>
‘우선 잡몹 정리부터.’
철컥!
사복검을 채찍 형태로 늘어뜨렸다. 그리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로브의 인영들을 빤히 주시했다.
삐빅.
우선 정확한 스펙 측정을 위해 현자의 눈을 발동한다.
[몬스터 정보]
[명칭: 필그림(pilgrim)]
[체력: 99 마력: 99]
[힘: 31 민첩: 54 지능: 37]
[상세: 제97던전 ‘순례의 사당’의 레귤러 몬스터. 죽어버린 여신의 유해를 찾아, 발트레드의 명에 따라 세상을 떠돈다. 앞길을 막는 것은 무차별적으로 없앤다.]
이런 놈들이 못 해도 수천 마리나 쏟아져 나온다.
역시 붕괴가 8차까지 오니, 발에 차이는 잡몹조차 상당히 강하다. 이 정도면 4차 붕괴의 던전 마스터와도 비벼볼 수준이었다.
‘그래서. 알맹이인 던전 마스터는……?’
나는 마력광이 일렁이는 눈을, 대열 중앙에서 진격하는 갑주의 사내에게 향했다.
삐빅. 어김없이 알림음과 함께 패널이 떠오른다.
[몬스터 정보]
[명칭: 진격의 발트레드]
[체력: 112 마력: 53]
[힘: 61 민첩: 58 지능: 31]
[상세: 제97던전 ‘순례의 사당’의 던전 마스터. 죽어버린 여신의 유해를 찾아, 추종하는 순례자들과 함께 세상을 떠돈다. 앞길을 막는 것은 무차별적으로 없애버린다.]
체력치가 100을 넘는 상당한 수준.
사실 8차 붕괴쯤 되면 근력계 던전 마스터는 대부분 저렇긴 하다. 눈앞의 발트레드 정도면 평균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저놈은 나중이고.’
나는 발트레드에게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어차피 발트레드는 당장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다. 놈이 본격적으로 싸우려면 휘하의 필그림들이 어느 정도 피해를 입어야 한다.
지금 최우선 척살대상은, 서슬 퍼런 살기를 흩뿌리는 잡몹들. 필그림이었다.
“흐아아아악!!”
“끄아… 아아아아악!!”
“사, 살려…! 꺼허억!”
파바바박!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필그림들은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 죽였다.
특유의 유령같은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접근해, 한 방에 푸욱. 각자가 꼬나쥔 무기로 심장을 관통해 버린다.
사람들은 외마디 단말마를 지를 뿐, 저항도 도주도 못한 채 절명해갔다.
―죽어라… 죽어. 죽어…….
―여신은, 어디에 있나. 여신… 여신이여……!
―간악한 불신자들. 우리의, 여신을! 내놓아라……!
필그림들은 연신 광기 어린 말들을 중얼거린다.
우득! 뿌드득! 뼈만 남은 팔뚝들이 연신 민간인들의 시체를 파헤쳤다. 그리고 무기로 꿰뚫은 심장을 쥐어뜯어 꺼내들었다.
그리고 으저적! 그것을 게걸스럽게 씹어 삼켰다.
―여신을… 어디에 숨겼나.
―불신자들. 놈들을 남김없이, 죽여야 해…….
―아아. 여신이여. 우리의 여신이여……!
뿌직, 푸화아악!
질척한 파육음이 끊임없이 울린다.
놈들의 회색 로브가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들었고. 채 흡수되지 못한 핏물이 로브 끝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붉은 안광에서 광기가 한층 짙어져 있었다.
―아아.
―불신자.
그리고 어느 순간.
주변 필그림들의 시선이 쉬쉭! 일제히 내 쪽으로 향했다.
소름 돋을 정도로 동시였다. 내가 ‘수라흉인’ 스킬로 일부러 시선을 끌어들였으니 당연하긴 하지만.
―죽여야… 한다.
―불신자… 네놈이냐.
―여신을… 숨기고 있는 게구나.
처벅처벅. 필그림들이 내게 스멀스멀 모여들기 시작한다.
놈들은 수라흉인의 상태이상에 걸릴 정도로 약하진 않다. 그러나 갑자기 뿜어져 나온 압도적인 존재감 때문에 이목이 집중된 것이다.
―불신자아아아!!
―죽여라아아!!!
쇄애액!
어느 순간, 놈들이 지면을 펄쩍 박차며 일순간에 내게 달려들었다.
전후좌우 사방팔방, 심지어 공중에서 찍어 누르는 공격까지.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하며 쇄도해오는 각양각색의 날붙이들.
키리릭! 나는 사복검을 어깨 뒤로 한껏 물렸고.
“뭐.”
콰드드득!
팔을 최대한 크게 휘둘렀다.
광대한 범위로 휘둘린 사복검이 일대의 필그림들을 한 방에 휩쓸고 지나갔다.
푸화악! 궤도를 따라 시뻘건 혈선이 허공에 흩어졌다.
―퀘아아악!!
―키아아아악!!!
칼날의 파편에 무참히 찢겨나간 필그림들. 비명과 함께 속절없이 나가떨어진다.
쉬리릭! 나는 계속해서 사복검을 휘두르며 놈들의 접근을 저지했다.
―죽어라아아아!!
그 순간. 철통같은 방어를 뚫고 한 놈이 지척까지 파고들었다.
놈의 무기는 한손 낫. 초승달처럼 휘어진 녹슨 칼날이, 내 심장을 노리고 우측에서 파고들었다.
이건 늦었다. 배리어 캐스팅조차 역부족이다.
‘그러면…….’
파팍! 나는 오히려 놈을 향해 상체를 들이밀었다.
키기긱! 낫의 칼날이 갑옷의 표면과 마찰한다. 내가 일부러 비스듬하게 흘려내서 표면을 긁는 데에 그친 것이다.
혼신의 일격이 빗나간 상대는, 이제 무방비 상태다.
“죽어.”
키리릭, 콰직!!
순식간에 사복검을 장검으로 합체. 그대로 놈의 대가리를 찍어 누른다.
반으로 쪼개진 로브 안에서, 부서진 뼛조각이 뇌수와 함께 질척하게 흘러나왔다.
―그… 으오오……!
―강하다… 부, 불신자……!
사망자가 수십을 넘어 수백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드디어 필그림들이 하나둘씩 주춤거리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내 주변에 결계라도 있는 듯, 놈들은 일정 거리 이상 내게 접근하지 못했다.
―아아… 구원의 빛!
―우리의 영도자시여……!
놈들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털썩. 일제히 그 자리에 무릎 꿇었다.
―발트레드여. 구원을.
―아아, 영도자 발트레드여!
―우리에게 나아갈 길을…! 진격의 광명을…!!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이내 격정에 찬 목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들의 리더. 던전 마스터를 불러들이는 의식이다.
―순례는… 계속되어야 한다.
철그럭, 철그럭.
묵직한 발소리가 서서히 다가온다.
동시에 웅혼한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홍해가 갈라지듯, 빽빽하게 들어찼던 필그림들이 두 줄기로 갈라섰다.
우글거리는 인파로 만들어진 외길 너머. 빛바랜 백색 갑주의 기사가 우뚝 서 있다.
―우리들의… 죽어버린 여신을 위하여.
스르릉!
놈은 투박하고 거대한 대검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검신부터 가드와 손잡이까지 새하얀 대검. 가드의 폭과 길이가 유난히 넓다. 마치, 거대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는 듯하다.
―두려워 말아라. 낮은 이들아.
철그럭, 철그럭!
발트레드가 한 발짝씩 다가오기 시작한다.
어깨에 이고 있던 대검을 양손으로 붙들더니, 쿠르릉! 그것을 번쩍 들어 내게 겨눈다.
그리고 상체를 한껏 웅크려 전투태세를 가다듬는다.
―나를. 따르라.
사냥감을 향해 달려들기 직전의 맹수. 딱 그런 느낌.
이제 온다. 대비하자.
“후우……!”
키리릭! 나는 숨을 한껏 들이마셨고. 황급히 사복검을 장검화했다.
채앵! 찌르는 금속음이 눈앞에서 터졌다.
―…막아냈는가.
순간이동에 가까운 속도였다.
발트레드는 어느새 내 앞까지 도약했고. 놈이 휘두른 대검이 내 사복검에 막힌 채 찌뿌듯한 염을 토해내고 있었다.
놈은 양손에 한껏 힘을 주는 한편, 투구 안에서 붉은 안광을 빛냈다.
―불신자. 실로 강대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안광에서도 느껴졌지만. 놈은 내게 적지 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지금 들려온 감탄 어린 목소리가 그 방증이었다.
‘역시. 말이 통한다.’
전투와는 아무 상관없는 개인적인 감정을 토로하고 있다. 발트레드에게 분명히 자아가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기분이다. 대화에 좀 어울려주기로 했다.
“내가 좀 치지.”
―그대가… 우리의 여신을 훔쳤는가.
“아니라 그러면 살려줄 거냐.”
―불가하다. 불신자는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순례의 의의고 정의이다.
“그러면서 묻긴 뭘 묻냐. X발.”
카가가각!
사복검을 비스듬하게 흘려냈다. 대검의 칼날을 미끄러진 사복검이 연신 불똥을 튕겼다.
수비 후엔 반격. 기본 중의 기본이다.
[스킬 발동: 라이트닝 헬릭스]
파지직!
제로거리에서 번개를 사격. 놈의 면상에 나선벼락을 자비 없이 쏟아냈다.
하지만 쉬쉭! 놈은 고개를 까딱이는 것만으로도 가볍게 피해냈다.
‘읽혔군.’
보고 반응한 게 아니다.
민첩성보단 노련미였다. 내 손에 마력이 응집되는 걸 보자마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고 대비하고 있었던 거다.
‘아무튼 귀찮은 새끼야.’
발트레드는 항상 저런 면이 있었다. 역전의 노장을 상대하는 느낌이랄까.
근접전 한정으로는, 비슷한 스펙의 다른 던전 마스터보다 배는 까다롭다.
―혼자서는 역부족이겠군.
저 새끼는 심지어 자기객관화도 잘 된다.
발트레드는 내 공격범위를 가늠해 거리를 잔뜩 벌렸고.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가장 낮은 이들이여. 함께 싸우자.
혼자서는 나를 이길 수 없다.
그걸 방금 두 합으로 깨달은 것이다.
―내 빛을 쫓아라.
콰아앙!
발트레드가 문득 대검을 번쩍 들어 올렸고. 힘차게 바닥에 쑤셔 박았다.
파파파파! 대검의 칼날에서 눈부신 광휘가 사방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불신자를… 처단하라.
발트레드의 대규모 버프 스킬. 워록.
사방으로 흩어진 빛무리는 일대의 공기 중으로 녹아들었고. 이내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필그림들에게 스며들었다.
우드득, 뿌득! 필그림들이 온몸을 경련하기 시작한다.
―그오, 오오오……!
―오오오오오!!!
놈들이 하나씩 몸을 일으킨다. 귀신 들린 듯이 사지를 벌벌 떨며 아찔한 신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늘을 향해 머리를 치켜들었다.
―키오오오오오!!
―케에에에엑!!!
일제히 내지르는 포효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놈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전에 없이 폭증했다. 살기도 그에 맞춰 한층 더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 것이 체감되었다.
번득! 그리고 살기등등한 시선이, 오롯이 내게 향했다.
―영도자… 께서, 명령하셨다……!!
―죽인다…! 불신자는! 죽인다아아아!!
투두두두!
사방에서 필그림들이 네발짐승처럼 게걸스럽게 달려든다. 순식간에 포위망이 좁아진다.
직전의 공포에 벌벌 떨던 그들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그대는 죽는다. 순례는 속행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발트레드 본인까지. 필그림들의 일제 습격에 맞춰 달려들었다.
본격적인 개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래. 와라.”
주무기인 쌍단검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사복검의 상태를 형식적으로 점검한 뒤, 자연스럽게 채찍 형태로 늘어뜨려 다대일 전투를 대비했다.
마지막으로 주변 필드를 한 번 훑어봤다.
‘익숙한 환경은 아니긴 한데.’
내게 익숙한 8차 붕괴의 정경은 지하다. 선릉역을 필두로 하는 음습한 지하철길이 8차 붕괴의 주 무대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씨익,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오히려 좋아.”
필드가 넓어지면 나는 무조건 환영이다.
다대일 전투에서야 좁은 필드가 유리한 게 사실이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식선의 상대에게나 통용되는 거고.
나는 1033번째 회귀자. 상식선의 전투는 통하지 않는다.
“쓸어 담기 좋네.”
사방이 뻥 뚫려있으니 내 학살에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 놈들의 숫자를 줄이는 속도가 전에 없이 빨라질 예정이었다.
파지직! 왼손이 시퍼런 전광을 머금었다.
“드가자.”
콰드득! 푸화악!
번개를 머금은 세 자루 칼날이 미친 듯이 전장을 유린했다.
‘하나. 열. 오십…….’
언제나 그렇듯이 킬 카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만뒀다. 숫자가 300을 넘어가니 스스로도 귀찮게 느껴져서 그렇다.
―끼에에엑!
―쿠에아아악!!
그저 무아지경으로 베어 넘긴다.
비명을 지르는 필그림들의 아가리에 번개를 쑤셔 박는다.
“…흐.”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찐득하게 한껏, 입매를 틀어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