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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98화 (198/235)

198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20)>

이후 정신을 차린 강서윤한테 개같이 처맞았다.

그 뒤로 이세라에게 설교까지 약간 듣고. 약 30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오빠.”

멀찍이서 눈치를 살살 보던 수아가 기웃거렸다.

나는 지친 눈을 들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너도 한마디 하러 왔냐.”

솔직히 사양하고 싶다. 이미 설교라면 여기저기서 많이 듣고 왔으니까.

내가 손사래를 치자니, 수아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뇨. 그걸로 찾아온 건 아니에요.”

“진짜냐.”

“거짓말해서 뭐하겠어요.”

“그럼 됐고.”

“옆에, 잠깐 괜찮아요?”

“얼마든지.”

안심하는 내 옆으로 털썩. 수아가 나란히 붙어 앉았다.

수아는 한동안 멍하니 앞만 바라볼 뿐, 그대로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

침묵이 길어지니 의아해지는 건 내 쪽이었다.

뭔가 용건이 있으니 왔을 텐데.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무게만 잡고 있는 것인가.

영 수아답지 않은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 말이라도 있냐. 수아야.”

결국 내가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스륵.

그제야 수아의 시선이 내 쪽을 바라봤다.

어딘가 공허한 기색의 눈길이 쏟아진다. 쎄한 무표정을 마주보며 가만히 생각해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수아가 나한테 지금 찾아올 만한 이유라.

언니에게 행한 돌발 성추행을 지탄하는 건 아니라 했고. 그러면 그 외에 나한테 할 만한 말이 있기나 한가.

모르겠다. 갈피도 안 잡힌다.

“오빠. 생각해보니까요. 이렇게 둘이서 대화하는 거… 되게 오랜만이네요.”

문득 수아가 그런 말로 서두를 끊었다. 씁쓸한 웃음이 입가에 걸려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다. 나도 옅은 탄성을 흘렸다.

“…그러게. 그렇구나.”

최초에 수아를 설득시킬 때 이후, 한 번이나 제대로 말을 섞었는지 의문이었다.

내가 일부러 대화를 기피한 것도 있었고. 그것을 느낀 수아가 삐져서, 더더욱 대화가 단절된 것도 있다.

그 순간에도 수아는 연신 내 얼굴을 흘깃거렸다.

“오빠. 혹시 아직도 화났어요?”

“화나다니. 뭐한테.”

“저한테요.”

“내가 왜.”

“맨 처음에요. 제가 오빠 말도 잘 못 믿고… 엄청 추궁하면서. 뭐라고 막 매도했었잖아요.”

“아.”

까먹고 있었는데 말해줘서 기억났다.

수아가 내 말을 못 믿는 건 원투데이도 아니다. 그래서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싶다.

수아가 어색하게 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결국… 오빠 말은 전부 사실이었잖아요. 던전 붕괴도 정말로 연속으로 일어나고 있고요.”

“그렇지. 거짓말은 안 했어.”

“네. 미안해요 오빠. 의심해서…….”

“못 믿는 게 당연하지. 강서윤도 처음엔 못 믿었어.”

“아하하. 그렇구나… 아무튼,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러냐.”

“네에…….”

수아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침묵이 이어진다. 어색한 기류가 잠시 흐른다.

나는 잠깐 눈치를 본 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혹시 이 말을 듣고 싶은가 싶어서.

“진짜 화 안 났어. 걱정하지 마라.”

“…진짜로요?”

“진짜로.”

나는 믿음직하게 고개를 끄덕여줬지만. 그것을 본 수아의 표정이 오히려 미묘하게 뒤틀렸다.

꾸득. 무릎 위에 다소곳이 모였던 그녀의 손에, 별안간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러면… 그건, 좀 이상하잖아요.”

“뭐가.”

“오빠. 그러면 제가요. 혹시 그 뒤로 뭔가, 오빠한테 잘못한 게 있었나요?”

“…….”

수아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물었다.

그제야 나도 수아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전번 회차에서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멘트로 들어본 적이 있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미간을 바짝 모았다.

‘서먹해진 사이를 개선하고 싶은 거군.’

분명 전전 생이었던가.

수아와의 관계를 파탄내고 자살하기 직전, 최후의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그때도 딱, 저 질문이 시발점이었다.’

내 냉정한 태도에서 이상을 느낀 수아는 저 질문을 던졌었고, 나는 시종일관 차가운 태도를 고수해서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 뒤로도 생산적인 대화는커녕, 오히려 수아를 의심하고 추궁하기 바빴었지.

‘기껏 추궁해서 얻은 것도 딱히 없었고.’

그러니 이번까지 그 과오를 반복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얻을 게 없다는 걸 안다. 지금의 그녀는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여자1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내가 차가운 태도를 거둔다 한들. 이제 와서 우리 사이가 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넌 정말로, 딱히 잘못한 거 없어. 수아야.”

이게 제일 큰 문제였다.

수아가 뭘 잘못해서 사이가 틀어진 게 아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기 때문에, 개선하고 싶어도 개선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쓴웃음을 짙게 머금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건 내 잘못이지.”

“오빠가요? 하지만, 저는 딱히 그런 기억이……!”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 전생에.”

“아……!”

여기선 ‘전생 치트키’를 써서 무마하기로 했다.

예상대로 수아는 아찔한 탄성을 흘리며 입을 가렸다. 긴가민가 싶은 의문의 시선과 함께, 그녀가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절찬리에 의심하고 있군. 입가에 걸려있던 쓴웃음이 짙어졌다.

‘의심해서 어쩌려고. 기억도 없는데.’

전생의 일을 기억하는 건 영원회귀에 묶여 있는 나뿐이다. 내가 어떻게 구라핑을 찍든 그녀는 무지성으로 믿는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수아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군요. 전생의… 저한테, 뭔가를 저질렀다고요?”

“그렇지.”

“그 일 때문에, 저를 피하시는 거라고요?”

“그렇게 되지.”

“그건… 그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누가. 내가?”

“제가요!!”

수아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푹 떨궜다.

그럴 법도 하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또 다른 시간선의 나 때문에, 지금의 내가 기피의 대상이 되다니. 세상 이런 X같은 일이 어디 있는가.

“좋아요. 알겠어요.”

어느 순간 퍼뜩! 수아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애써 지은 웃음을 내게 보이며, 절박한 어조로 애원하듯 말했다.

“제가 용서해줄게요. 알겠죠?”

“음?”

“전생의 저한테 뭘 잘못하셨다면서요? 그걸 제가 용서해주겠다고요.”

“어… 음.”

“어차피 똑같은 저잖아요! 제가 용서해줄 테니까… 이제 저, 피하지 마세요. 네……?”

똑같은 자신이라고 한다.

전생의 수아가 지금의 수아와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한 당사자가 수아였건만. 이번 생의 그녀는 다시 같은 사람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구만. 이제 무슨 장단에 딴따라를 춰야 하나.

“그래. 알겠다.”

나는 고개를 슬슬 저었다.

그리고 수아를 향해 지친 눈을 들어올렸다.

“미안했다. 이제 피하지 않을게.”

“…정말이죠? 전처럼, 다시 친하게 지내는 거예요?”

“확신은 못 하지만. 최대한 평소처럼 지내도록… 노력은 해볼게.”

“…네. 그래요. 일단은 그거면 됐어요.”

수아는 여전히 약간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그 정도에서 타협해줬다.

그녀가 약간은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럼 가볼게요. 오빠.”

“그래.”

“시간 뺏어서 미안했어요. 그… 편히 쉬세요.”

“그래. 너도.”

약간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줬다. 수아도 덩달아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휴게실 밖으로 사라지자, 나는 나름 깊은 고민에 빠졌다.

‘평소처럼 지내는 나는, 어떤 느낌이었지.’

방금의 나는 평소 같은 나였나. 뭔가 약간은 어색하지 않았던가.

큰일이군. 신경쓰기 시작하니까 더 모르겠다.

‘혼란스럽구만.’

나는 분명 평소와 똑같이 대답했을 뿐이다.

근데 ‘방금 건 필요 이상으로 차갑지 않았나?’ 하는 생각부터 들고 있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이거 하난 확실해졌다.

“전이랑 똑같이 대하긴… 글렀네. 이미.”

쓴웃음을 지으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하다. 다음 붕괴가 있을 때까지 잠이라도 푹 자둬야겠다.

* * *

7차 붕괴지는 은평구의 평범한 시가지였다.

붕괴한 던전은 제68던전. <피의 제전>이라는 비선형 던전이다.

―아아아아악!!

―크하악…! 카학!

여기도 결국 끝까지 붕괴지를 특정하지 못했다.

그 덕에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은평구를 넘어서 주변의 서대문구와 마포구, 종로까지. 방대한 지역이 쑥대밭이 된 뒤였다.

―꺄아아아악!!

―크윽… 이, 이놈… 커헉!!

<피의 제전>은 비선형 던전답게 잡몹은 일체 없다.

일곱 명의 던전 마스터만이 존재한다.

이름은 ‘세븐 미스트레스’.

퍼스트(First) 미스트레스부터 세븐스(Seventh) 미스트레스까지.

이름따나 일곱 명의 개성 있는 여성형 몬스터들이, 일제히 다구리를 쳐오는 귀찮은 던전이다.

―꺄아아아악!!

―어, 언니…! 크아아앗!!

그리고 전투가 한창 벌어진 뒤, 약 30분이 지난 지금.

7명의 미스트레스 중 6명은 이미 절명했고. 마지막 한 마리가 내 발 아래에 가슴을 짓밟힌 상태였다.

―그… 으윽…! 죽, 인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우드득, 우득.

최후의 미스트레스가 으르렁거린다. 날카로운 손톱으로 내 각반을 박박 긁어대 보지만, 당연히 소용은 없다.

나는 증오에 찬 그녀의 붉은 눈을 잠깐 마주했고.

“이것도 말이 안 통한단 말이야. 통할 것 같이 생겨갖고.”

서걱!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쿠당탕. 미스트레스의 만신창이가 된 머리통이 잘려나간다. 붉은 적발이 불꽃처럼 나부끼며 바닥을 구른다.

[제68던전 ‘피의 제전’의 던전 마스터, ‘세븐 미스트레스’가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게이트가 힘을 잃고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식됩니다.]

그렇게 7차 붕괴까지 스무스하게 종식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스무스 해도 너무 스무스 하다는 점. 다시 말하면…….

‘얻은 게 뭐, 하나도 없네.’

바로 그 점이 되시겠다.

나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귀환을 서둘렀다.

* * *

어영부영 지내니 눈 깜짝할 새에 8차 붕괴를 맞았다.

이번 8차 붕괴지는 강남의 코벡스. 기존의 8차 붕괴지인 ‘선릉역 1번 출구’와 그나마 가장 가까운 편이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지하가 아니게 된 건 분명 호재였다.

―이번 순례는 이곳인가.

콰지지직!!

게이트는 코벡스 건물 내부에서 붕괴했다.

8차 붕괴쯤 되니 발생하는 마력파동도 상상을 초월했고. 웅장한 계단형 건물이 단숨에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걸어라. 순례자들아.

그리고 목소리.

사방을 메운 흙먼지와 마력입자의 안개 속에서. 우중충한 목소리가 스멀스멀 기어온다.

철그럭, 철그럭.

다가오는 묵직한 발소리들이 시시각각 늘어났다.

―순례를 시작한다.

먼지가 잦아들고, 다가오던 인영들이 선명해진다.

수백 명에 달하는 인간 형상의 무언가다. 가장 선두에는 빛바랜 성기사 갑주를 차려입은 사내가 서 있다.

그리고 그를 필두로, 진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구부정한 인영이 도열해 있다.

―가자.

문득 선두의 성기사가 손을 들어 올렸고.

우수수수! 기사의 뒤로 도열해 있던 로브들이 일제히 진격해왔다.

어둠으로 질척이는 추레한 로브 안. 시뻘건 안광이 광기에 쩔어 번들거렸다.

―순례… 우리는, 순례를. 완성한다.

―가장 낮은 이들을 위하여.

―죽어버린, 여신을 위하여……!

스르릉!

놈들이 중얼거리며 일제히 앙상한 팔을 들어올렸다.

단검. 장검. 손도끼. 해머. 도리깨. 파이크. 창이나 표창까지.

로브로 가려졌던 그들의 손에는, 각양각색의 낡아빠진 무기가 들려 있었다.

“오랜만이네. 저놈들.”

나는 그들을 보며 격세지감에 중얼거렸다.

일단 외형을 포착한 순간 어떤 던전인지는 곧바로 알았다. 그러니 ‘오랜만’ 같은 소리를 할 수 있는 거겠지만.

“드디어 물어보겠구만.”

붕괴한 던전은 97던전. <순례의 사당>.

던전 마스터 <진격의 발트레드>와, 휘하의 몬스터인 <필그림>들로 이루어진 던전이다.

그리고 던전 마스터 발트레드는… 말이 통하는 던전 마스터.

드디어, 진득하게 말을 섞어볼 기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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