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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95화 (195/235)

195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17)>

오경태가 깨어나기 전에 ‘괴뢰의 실’로 정신을 조작해 기억을 삭제했다. 그리고 폐허가 된 붕괴현장의 한 가운데에 다시 돌려놓았다.

그리고 반야의 식신을 소환해, 오경태의 감시역으로 붙이기로 했다.

“이 새끼가 뭔가 이상한 짓 한다 싶으면 곧바로 보고해. 목숨이 위험할만한 일에 맞닥뜨려도 호출하고.”

―…….

“네 역할이 막중하다. 정용 주니어.”

툭툭. 멍하니 서있는 분신의 어깨를 두들겨줬다.

분신은 내 애기를 곧잘 알아듣고,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였다.

―…….

스르륵.

식신… 정용 주니어의 신형이 눈앞에서 녹은 듯이 사라져갔다. 투명화 스킬을 사용한 것이다.

이제 앞으로 2주 동안, 식신은 오경태의 일거수일투족을 밀착 감시할 것이다.

“앞으로 어쩔 셈이냐. 프라키.”

오경태를 길바닥에 내려놓던 도중. 나는 툭 던지듯이 물어봤다.

번쩍! 감겨 있던 놈의 눈이 부릅 뜨였다.

―으음. 뭐가 말인가.

등줄기를 긁는 장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작 입은 열리지도 않는다. 육사도의 목소리는 귀가 아니라, 두개골을 뚫고 머릿속으로 직접 쑤셔 박혔다.

어쨌든 육사도… 프라키는 부름에 현현했다. 나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 몸을 이용해서. 2주 동안 뭘 할 셈이냐고.”

―뭘 하긴. 그냥 이대로 숨어서, 사내를 면밀히 관찰한다고 했잖나.

“…관찰?”

―그래. 내가 뭘 하려는 게 아닐세. 난 그저 이 자의 마지막 인생을 지켜보고 싶을 뿐이야.

“…….”

상상 이상으로 엉뚱한, 그리고 관음증 변태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침음을 흘렸다.

“그 새끼가 앞으로 2주 동안이나 살아남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데.”

―허허. 그건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옥좌.

“……?”

―이 자는 자네가 건들지 않는다면, 최후의 최후까지는 무조건 살아남을 걸세.

“그야 네가 붙어 있다면 그렇겠지.”

―내가 뭘 건드리지 않아도. 그런 운명을 타고난 사나이라고. 내 눈은 정확하니 내기를 해도 좋네.

프라키의 형형한 시선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연신 혀를 내둘렀고. 호언장담하는 이유에 적지 않은 호기심이 들었지만.

‘관두자. X발.’

이내 이해하길 포기해 버렸다.

저런 미친 새끼들 사고방식은 오래 생각해봤자 나만 피곤하다. 1033번째 회차면 슬슬 그것을 깨달을 때도 됐다.

“…그러든지. 어디 X대로 해봐라.”

―허허. 말 안 해도 그럴 셈이라네.

“2주 뒤에 다시 찾아오겠다.”

―그러시게. 재회할 그 날이 벌써부터 기대되는구먼. 껄껄.

“퍽이나.”

그 짤막한 대화가 작별이었다.

투학! 나는 지면을 차올렸고. 신형은 순식간에 솟구쳤다.

* * *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러간다.

최후의 육사도까지 발견한 지금. 내게 남은 임무는 게이트 붕괴 현장에 출동해 붕괴 저지, 단 하나뿐이었다.

휴식과 붕괴 저지. 요 며칠간은 그것의 기계적인 반복이었다.

―아윽……!

콰자작!

사복검의 칼날들이 매섭게 전방으로 쇄도했고. 내 눈앞에 얼쩡거리던 여성형 목각인형의 몸통을 단숨에 분쇄해버렸다.

이제 보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나는 53던전의 주인. <꼭두각시 소녀>였다.

―아, 아아.

세 갈래로 쪼개진 소녀의 입이 삐걱거린다. 억지로 열린 입에선 신음이 흘러나왔다.

오래 봐서 좋을 것도 없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5차도 끝났고.’

12월 6일. 5차 붕괴가 예정된 날.

오늘 붕괴한 것은 제53던전인 <유령의 축제>.

내가 알던 대로라면 어린이대공원에 붕괴했겠지만, 이번에도 붕괴지는 내 예상을 빗나갔다.

“멀리까지 오게 만들긴.”

여기는 광주의 한 대학교였다.

경기도 광주 아니고, 전라도 쪽의 광주 맞다.

혹시나 출장지가 가까워질까 싶어서 이세라한테 몇 번이나 확인받은 사항이다. 확실하다.

―아… 아아아……!

―축제가, 끝났다… 끝나버렸어어…….

피로 시뻘겋게 물든 상아탑.

시체와 육편이 널려있는 캠퍼스 정경이 시야에 가득하다.

그나마도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예정이다.

―…아가씨.

―이제 우릴 위해, 춤춰주지 않는 거냐?

칠판을 긁는 듯한 목소리가 연신 들려온다.

갈가리 찢겨버린 던전 마스터 곁에 스멀스멀 모여든 잡몹들. 묘지기 광대가 제들끼리 두런거리는 소리였다.

―아아… 아아…….

―축제가 끝나 버렸으니.

익숙한 프레이즈가 한창 진행 중이다.

그들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온몸을 경련했다. 시커멓게 물든 눈에 점점 붉은 기운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푸직! 놈들이 자기 목을 망설임 없이 쑤셨다.

―아가씨. 우리 귀여운 아가씨.

―이것이 마지막이야.

우지직, 뿌득!

수십, 수백 마리의 광대가 일제히 자기 머리를 뽑아버렸다.

특유의 소름끼치는 광소를 입가에 두른 채. 날카로운 이빨을 까득까득 갈아댔다.

―함께 피날레를 맞이하자.

우우우웅!!

놈들의 대가리가 일제히 눈부신 섬광을 뿜어냈다.

섬광이 최고조에 달한 그 순간. 찢어지는 광소와 함께 광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후의,

―불꽃놀이다!!

콰아아아앙!!

광대들의 대가리가 일제히 폭발했다. 가공할 충격파와 폭발의 섬광이 시야를 새하얗게 표백해버렸다.

그렇게 5차 붕괴는 종료되었다.

[해당 위치 내 생명반응: 0개체]

[최근 1분 내에 사멸한 생명반응: 42,513개체]

해당 대학교는 물론이고 인근 상가와 지역구 주민들까지. 일대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흙먼지로 돌아갔다.

거기에 남아 있는 건 압도적인 공허와 무(無)다.

“…이번에도 꽝이었나.”

이번 붕괴에서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나는 이번 붕괴가 만들어낸 거대한 크레이터를 빤히 내려다봤고,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릴 뿐이다.

“다음엔 나오겠지?”

‘꼭두각시 소녀’는 대화가 불가능한 던전 마스터다.

말은 할 줄 알지만 대화는 안 된다. 그 기분 나쁜 목각인형이 내뱉는 말은 타인의 행동을 그대로 모사한 것일 뿐이다.

정작 내뱉은 본인이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한다.

‘천천히 하자. 천천히.’

그렇게 하루가 흐르고. 다음 날이 된다.

그 날도 웬 종일 누워서 푹 쉬다가, 이세라의 뒤치다꺼리에 동원됐다가. 또 강서윤이나 강수아의 말동무를 해주던 중이었다.

“…있잖아. 정용아.”

문득 강서윤이 날 불렀고. 나는 테이블을 닦다 말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 엄마… 살릴 수 있을까?”

강서윤이 나를 ‘야’, ‘강정용’ 따위로 안 부르고 ‘정용아’ 하고 불렀다.

이건 진지한 얘기를 꺼낼 때 나오는 그녀의 습관이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바짝 펴고 그녀를 똑바로 마주봤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강서윤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부턴 절대 거짓말 없이. 솔직하게 말해줘야 해. 알겠지?”

울 것 같지만 절대로 울지는 않는다. 그저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입술을 악문 채 태연함을 연기한다.

나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뭔데.”

“네가 반복했다는 전생에서, 우리 엄마… 한 번이라도 산 적이 있어?”

“…아니. 없어.”

“…….”

강서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입술을 피 나도록 꽉 물었다.

하지만, 이내 숨을 길게 내쉬며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그래. 그렇구나. 하긴. 그, 그렇겠지… 아하하.”

이미 내 대답을 예상했다는 기색. 저 씁쓸한 웃음을 보건대 실제로 예상했을 거다.

아니. 사실 예상을 못하는 게 더 이상하긴 하다.

‘애초부터 반쯤 죽은 상태였으니.’

수아와 서윤이의 어머니는 마력 중독에 의한 가사상태다.

마나폭주를 막고, 숨만 간신히 쉬도록 붙들어 놓는 장치가 수십 개에 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억만금의 돈이 들어가는 거기도 하고.

“정용아. 너도… 어, 엄청나게 회귀한 너라도, 안 되는, 거지?”

“불가능하지.”

그래서 전문가의 지식과 장비 없이는 살릴 방도도 없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좀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수아네 어머니 하나 살리자고 영원회귀를 반복한 게 아니니까.

“네 어머니도 여기로 데려오면. 하루 이틀 정도는 더 살지도 모르지.”

“그, 그러면……!”

“하지만 연명장치는 누가 설치해주고. 누가 구동해 줄 거냐.”

“…아.”

던전 붕괴를 효율적으로 막을 궁리. 그리고 수아와 서윤이 살릴 길을 모색하는 데만도 머리가 터질 뻔했다.

내 좁아터진 두 손에 쥘 수 있는 용량은, 진작에 넘어갔다.

“어떻게 설치가 가능하고. 구동해줄 사람을 구한다 쳐도 문제지.”

“또… 무, 문제가, 남았어?”

“연명장치가 잡아먹는 전력이 어마어마해. 조만간 전기가 끊기면, 일개 가정용 발전기 돌리는 걸론 절대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그, 그런.”

“결국, 이러나저러나 돌아가시게 되겠지. 조만간.”

선택과 집중.

내게 있어서 서윤이 어머니 생명의 가치는, 서윤이나 수아에 비해 한없이 낮다.

나는 히어로가 아니다. 뭔가 얻으려면… 뭔가는 희생해야 한다.

“…응. 그, 그렇… 겠지.”

결국은 서윤이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느 순간 그녀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눈물로 촉촉해진 새빨간 눈동자가 간절히 나를 올려다봤다.

“있잖아. 다음 붕괴 막으러 갈 때… 나도 데려가줘.”

“안 돼. 절대로.”

전에 없이 단호하게 틀어막았다.

이렇게까지 단호한 거절은 예상 못했을 테지. 당연하게도 서윤이는 눈을 끔벅이며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를 냈다.

“어… 어? 왜, 왜?”

“위험하니까.”

“위험…? 그, 그게 끝?”

“그럼. 그거 말고 이유가 필요하냐.”

아마 어머니를 찾아갈 생각이었을 테다.

지금도 병상에 누워있는 모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뇌리에 새기겠다. 그런 생각으로 함께 나갈 결심을 한 것이리라.

“나가지 마. 무조건 여기에, 얌전히 있어.”

하지만 그건 절대로 허락해줄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말 나온 게 하필이면 지금 타이밍인 게… 개같군. 진짜로.’

6차 붕괴를 앞둔 지금.

원래대로라면, 서윤이가 운명이 선고한 죽음을 맞이하는 바로 그 타이밍.

그게 참을 수 없이 불안했다.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자, 잠깐만이라도……!”

“안 돼.”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있다.”

“한정용. 지, 지금까지 오냐오냐 따라줬다고 막 나가나 본데… 내가 네 종년이야?! 나가지 말라면 뭐, 못 나갈 줄 알아?!”

“못 나갈 줄 알지.”

파지지직!!

손아귀에 벼락줄기를 생성해 휘몰아쳤다. 그 살벌한 기세에 흠칫, 대치해있던 서윤이 숨을 크게 삼켰다.

번갯불에 춤추는 음영 속에서, 나는 계속 말했다.

“나가 봐. 날 이길 수 있다면.”

“…크, 읏……!”

강서윤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나를 노려보는 시선과 얼굴에 반항심이 가득해졌다.

내 의지를 보여준 결과는 강서윤의 더 굳은 의지였다.

‘역시 위협으론 안 되나.’

그대로 포기해줬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어김없이 기대를 빗나가는 반응에 나 역시 당혹스럽다.

잠시 일촉즉발의 대치가 이어졌고.

“왜. 왜 안 되는 건데?”

의외로 먼저 한 수 접어준 건 강서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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