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16)>
―다들 표정이 왜 그러나. 귀신이라도 본 것 같구만.
오경태의 면상을 한 육사도는 태연하게 말을 걸어왔다.
내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이내 우뚝.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그리고 나와 토식이를 탐색하듯 면밀히 관찰했다.
―뭐야. 자네들, 나를 모르나? 기억이 없어?
중후하고 지글거리는 목소리가 놀란 듯이 탄식했다.
말투는 묘하게 촐싹거린다. 나잇값 못하는 동네 노친네를 상대하는 느낌이랄까.
‘…진짜 저거 맞아?’
일단 ‘붉은 용’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저 가벼운 태도가 한층 더 놀랍다.
나는 잠깐 꿀 먹은 벙어리가 됐고.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터벅. 나를 대신해 토식이가 한 발짝 나섰다.
그의 담배 끝단이 오경태… ‘붉은 용’에게 향했다.
“넌 뭐, 전에도 우리를 만났던 것처럼 말한다?”
―그야 당연하지. 실제로 한 번은 다 모였던 적도 있잖나.
“으음? 우리가?”
―그렇다니까. 왜 모른 척인가?
“뭔 개소리야! 모른 척이 아니고. 그런 적이 없으니까 그렇지!”
―흠. 이상하군. 행색을 보아하니, 둘이서 짜고 날 골탕 먹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토식이는 의문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것은 상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내 아아. 오경태의 입에서 옅은 탄식이 흘렀다.
―그렇군. 내가 마지막이라서 나만 기억하는 거군?
알만 하다는 듯이 끄덕끄덕.
씁쓸한 미소를 지은 오경태가 고개를 슬슬 저었다.
오경태의 시커먼 눈동자 너머. 심원한 곳에 자리 잡은 거대한 무언가가, 나와 토식이를 스윽 훑었다.
―나보고 죄다 설명하라는 거구만. 설계자.
놈이 영문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이해를 못해서 어리둥절한 나와 토식이를 뒤로하고. 붉은 용은 특유의 느긋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이런 귀찮은 건 항상 마지막 육사도의 역할이긴 했지. 의도는 대충 파악했다.
그리고 납득했다는 듯이 제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개소리는 거기까지다. 슬슬 혼잣말 원맨쇼 참아주는 것도 한계였다.
“그만.”
파지직!!
신경질적으로 허공에 손을 휘적였다. 마찰한 성냥처럼 손아귀에서 번개가 치솟았다.
나는 그것을 오경태의 면상 정면으로 겨누었다.
“우선은 좀 물어보자.”
―오오, 그래. 왕의 옥좌. 뭐가 궁금한가?
“너는… 육사도 붉은 용이냐?”
―으음?
오경태의 눈이 의외라는 듯이 동그랗게 뜨였다.
왜 저런 반응이지. 설마 내가 잘못 짚었다고? 아니, 그럴 리는 없을 테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당황하고 있자니.
피식, 오경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기본 중의 기본부터 시작하는 건가? 하긴 그게 맞긴 하겠지.
“…대답이나 해라.”
―물어보니 대답을 해주자면, 내가 분명히 최후의 육사도가 맞다. 옥좌.
“……!!”
―그래, 나를 많이 찾아다녔나?
말이라고. 이 개새끼야.
너 새끼 때문에 벌였던 지옥의 생 노가다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지금도 눈앞에서 사람들 상태창이 깜빡거리는 것 같다고.
마음 같아선 그렇게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너한테…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가능하냐.”
―그러시게. 얼마든지.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이는군.”
―안 그래도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라, 자네가 말하지 않았으면 내가 먼저 대화를 제안했을 것이야.
“…오호.”
지금은 우선 실리를 챙기는 게 우선이다.
다행히 상대는 말투만큼이나 성격도 느긋했다. <목 잘린 붉은 용>이라는 살벌한 명칭과 지금 보여주는 성격은 매치가 안 되는 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질문하겠다.”
―그러시게.
“아까 중얼거렸던 그 말. 무슨 의미냐.”
우선 가장 거슬리던 부분부터 파고들었다.
오경태의 입가가 히죽 말려 올라갔다. 이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이.
―정확히 어떤 부분을 말하는 거지?
“우리가 전에 한 번 만났었다고 했지. 그리고 네가… 뭔가를 설명하는 역할을 맡았다고도 했고.”
―그걸 잘도 들었구만. 귀가 밝아.
“그렇게 대놓고 중얼거리는데. 못 들으면 이상한 거지.”
―하핫. 그것도 그렇군.
붉은 용이 능글맞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말을 빙빙 돌리는 것 같은데. 저건 분명 나를 놀리는 거겠지.
“…처웃지 말고. 대답을 해라.”
지금의 나는 조바심을 참을 수 없는 처지다. 덕분에 그의 의도대로 신나게 감정지배를 당하고 있었다.
오경태의 커다란 눈이 짙은 호선을 그리며 좁아졌다.
―네가 들은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 옥좌.
“…들은 대로?”
―우리는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자네도 토끼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 기억과 경험이 남아 있는 것은 이 세계 통틀어 오직 나뿐이다.
“…….”
―뭐, 그런 의미인 것이다.
디룩디룩.
오경태의 두 눈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간다.
기생충에게 감염 당한 달팽이 같다. 기괴한 움직임에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어느 순간 스르륵, 두 눈알이 동시에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이해가 잘 안 된다는 얼굴이구만? 옥좌.
“…그래. 잘 모르겠는데.”
―어렵게 생각할 거 없네. 시간동결의 저주를 아는 자네니까, 오히려 토끼보다도 자네가 이해하기 쉬울 거라 생각하네.
“시간, 동결?”
시간 동결의 저주. 영원회귀.
여기서 갑자기 놈이 영원회귀를 언급했다.
본인이 했던 말이 영원회귀와 관련이 있다는 소리인데. 놈이 중얼거렸던 말을 다시 한 번 반추해봤다.
“…설마.”
이내 그의 말대로 금방 깨달았고.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부릅뜬 눈은 오경태의 얼굴에 가있었다.
“이전에, 내가 통째로 잊어버린 회차 같은 게… 있었다는 거냐?”
―역시 경험자라 금방 이해하는군. 그거다.
“…….”
붉은 용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긍정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발끝에 최대한 힘을 줘서 버텼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를 뽑아냈다.
“그… 내가 잃어버렸다는 회차는, 언제 일어난 일이냐.”
―아아, 그거에 관해서 말인데.
“왜. 뭐.”
―우선 이쪽의 요구 조건부터 말해도 괜찮겠나?
“음?”
뜬금없는 소리에 나는 눈썹을 틀어 올렸다.
잠깐 할 말을 찾지 못해 말문이 막혔다. 이내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요구 조건이라고.”
―그래. 요구 조건.
“정보를 대가로 뭔가 요구할 셈이었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나?
오히려 붉은 용이 눈을 크게 뜨며 날 쳐다본다. 뭔 헛소리를 하냐는 듯이.
그건 그렇긴 하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약간 방심하고 있었네.’
지금까지 말이 통하는 육사도는 모두 내게 호의적이었다.
이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기세고, 토식이는 안 그래 보여도 츤데레라 제법 나를 신경써주고 잘 챙겨준다.
그래서 눈앞의 육사도도 호의적일 거라고, 나는 멋대로 단정하고 있었다.
‘김칫국 스탑.’
머리를 세차게 휘저었다.
새삼 눈앞에서 건들거리는 사람… 아니, 사람 모양 괴물을 쳐다봤다.
시커멓게 죽어 있는 오경태의 눈동자 너머. 묵직하게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을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봐라. 요구 조건.”
―오오. 들어줄 생각인가?
“어차피 난 네 제안을 거부 못하지. 알면서 떠보는 건 좀 띠꺼운데.”
―아아, 그렇게 느껴졌다면 미안하군.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붉은 용이 너스레를 떨며 사과해온다.
체면치레는 가소롭고 귀찮을 뿐이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눈에 힘을 잔뜩 줬다.
“됐고. 요구 조건.”
―자네는 이제 이 사내를 죽여서… 나를 밖으로 꺼내려 들겠지?
“당연하지.”
인간에게 숨어든 육사도를 꺼내기 위해선 숙주를 죽여야 한다. 이미 광대와 애덤 크로스의 사례로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니 난 지금부터, 오경태를 죽일 예정이었다.
―그걸 한 2주 정도만 보류해줬으면 하네.
“……?”
―오경태라는 사내를, 앞으로 2주 정도만 자유롭게 방면해 달라는 소리다.
“무슨…….”
의도가 가늠되지 않는 엉뚱한 요구가 나왔다.
나는 당연히 미간을 한껏 좁혔다. 그리고 오경태를 위아래로 슬쩍 훑었다.
잠깐 고심한 끝에, 그냥 돌직구를 던져봤다.
“뭐가 목적이냐.”
―나는 이 비루한 사내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옥좌.
“마음에 든다?”
―그래. 그래서 최대한 이 몸을 즐기고 싶군. 정말로 이유는 그뿐이다.
“…흐음.”
―어때. 허락해주겠는가.
잠깐 오경태의 지긋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나 나는 표정 읽기를 잘 못한다. 이건 노력으로 성장하는데 한계가 있는, 일종의 육감에 가까운 재능의 영역이니까.
하물며 저건 평범한 인간도 아니고 던전발 외계인.
그 중에서도 급이 높은 육사도다.
‘숨은 의도가 있을 것 같은데.’
정말로 저런 시답잖은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일단 무조건 안 믿고 시작한다. 타인은 기본적으로 불신하는 게 효율이 좋다.
하물며 그 상대가 위협적인 존재라면 더더욱 그렇다.
‘…당장 추측되는 목적은 없고.’
그렇다고 쉽게 거절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아니지. 그건 아직 확정이 아닌가? 혹시 모르니 확인해 보기로 했다.
“거절한다면 어쩔 거지?”
―어쩌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당연히 거절…….”
―다만 자네도 내 심기를 거스른 값은 치러야겠지.
“…….”
―잃어버린 회차의 기억에 대한 건, 영원히 알게 될 일 없다고 생각하게.
“이 새끼가…….”
―그래도 자네가 이 연극을 끝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으니. 내가 그 이야기를 꼭 해줄 의무는 없네. 그러면 설계자도 이해해주겠지.
X발 가불기 맞네. 그럴 줄 알았다.
나는 인상을 바짝 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척, 손가락 두 개를 펴들었다.
“궁금한 게 두 개쯤 있다.”
―오오. 뭔가.
“기억에 대한 건 2주 후에 들려줄 거냐.”
―나로선 그러고 싶군. 내가 가진 유일한 협상 카드니까 말이야?
지금 비밀을 술술 밝혀버리면 더 이상 협상 테이블에 설 수 없다. 저건 사실 뇌 달렸으면 당연한 판단이었다.
나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오오, 뭔가? 중요한 거라니.
“나는 너를 죽여야 하냐.”
눈앞의 ‘붉은 용’은 인간에게 기생하는 타입의 육사도.
내가 아는 다른 케이스. ‘광대’는 꺼내는 순간 내게 이빨을 들이밀었다.
문답무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고, 둘 중 하나 죽을 때까지 광기의 전투는 지속됐다.
“어차피 곧 죽고 죽일 사이면 거래해 줄 이유가 없지. 나만 시간 손해를 보니까.”
―…….
“그래서 어떠냐. 실제론 어떻지?”
오경태, 붉은 용은 입을 콱 닫았다.
느긋하게 풀어져 있던 표정이 일순 꽉 조여진다. 한없이 무표정에 가까운 오경태의 시선이 나를 가만히 주시한다.
그러나 피식, 곧 여유로운 미소가 돌아왔다.
―하등 의미가 없는 견제를 하는군. 옥좌.
“무슨 소리냐.”
―실제로 어떻든 간에. 나는 싸우지 않는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잖나. 이미 대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은 왜 하는 겐가?
“…….”
그것도 그렇다.
정말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나마 노림수가 있었다면, 놈의 표정변화를 관찰하는 건데……….
‘눈에 띄는 반응은 보여주지 않는군.’
이제 어쩔 수 없다. 그쯤에서 저항은 관두고 승복하기로 했다.
처척. 다시 한 번 손가락 두 개를 들어올렸다.
“조건이 두 개 있다.”
―허어. 이번엔 또 뭔가.
“기한이 끝날 때까지 오경태에겐 감시를 붙일 거다. 그리고 허튼짓 한다 싶으면, 곧바로 오경태를 죽이고 너까지 끄집어내 죽여 버린다.”
―허허. 이번의 옥좌께선 심성이 살벌하시군 그래.
“당연한 조치다. 붉은 용.”
오경태가 곤란한 듯이 뒷머리를 긁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내게 손을 슬쩍 내밀어왔다.
―받아들이겠다. 뒤틀린 옥좌 양반.
“좋아.”
―그리고 ‘붉은 용’이라는 애매한 호칭은 좀, 듣는 입장에서 껄끄럽군. 내겐 프라키라는 멋진 이름이 있네.
“…프라키.”
그 말로 내뻗은 손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 새끼는, 내게 악수를 신청하고 있는 듯하다.
―자, 이제 자네 차례야. 어서 이름을 알려주게나.
“X이나 까 잡숴라. 프라키.”
철썩!
나는 붉은 용… 프라키의 손바닥을 후려쳤고. 다만 현관문을 훌쩍 가리켰다.
한 시라도 빨리 사라지라는 축객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