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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88화 (188/235)

188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0)>

“보스의 소재.”

내 목소리는 한없이 거만했다.

태도는 마치, 맡겨놓은 물건 찾는 듯했다.

“아니면 최소한 동선을 아는 놈. 거수해라.”

술렁거리는 소란이 안개 속으로 퍼진다. 놈들이 제들끼리 수군거리는 것이다.

이내 조심스런 반문이 흘러나온다.

―무슨 의미냐. 남자 인간.

“그대로 받아들여. 로드 바실라스의 소재를 묻는 거다.”

―……!!

로드 바실라스.

이 던전의 던전 마스터 이름이다.

윗대가리 이름이 서슴없이 나오자, 안개 너머가 또 한 번 크게 술렁인다.

―남자 인간. 네놈이, 그분의 존함을 어찌…….

“알 거 없고. 지금부턴 그 새끼 어디 있는지 아는 놈만 아가리 열어라.”

―이놈… 망발을……!!

가끔씩 잡몹들 중에서 나름 간부급인 놈들이, 던전 마스터의 동선을 아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한 번 물어본 거다.

“아는 놈만 나와. 사실대로 말하면 그놈은 특별히…….”

살려준다.

…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몬스터들이라도 거짓말을 하는 건, 아직 거부감이 살짝 있다.

“…최대한 안 아프게 죽여준다.”

빠지지직!

손아귀에 휘몰아치는 전광의 출력을 더욱 높였다. 나선의 회전력이 극에 달한다.

주위의 안개가 번개 빛을 머금어, 사방이 은은하게 빛났다.

―무슨 자신감인가 했더니.

―…단순한, 광인이었나.

놈들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잠깐 중얼거리나 싶더니, 쉬리리릭! 수백에 달하는 형체가 순식간에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순간.

―죽어라.

쇄애액!

날카로운 파공음이 귀를 찔렀다.

안개가 사방에서 꿀럭거리며 재구성되었고. 아무런 전조도 없이, 전방위에서 둥근 날붙이가 쇄도했다.

“…아무도 모르는 걸로 알겠다.”

나는 실망에 차서 중얼거렸고. 손에 머물던 나선의 번개를 바닥에 힘껏 내리꽂았다.

파지지직! 백청색 섬광줄기가 꽃처럼 피어난다.

―그우욱!

―이, 이건……!

안개와 반쯤 동화되어 흐느적거리던 형체들이 일제히 신음을 냈다.

섬광이 연신 번쩍거렸고. 그럴 때마다 놈들의 신형은 크게 요동쳤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이다.

푸스스! 놈들은 결국, 다시 황급히 안개 속으로 형상을 감췄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우리에게 상처를……!

―단순한 전격이, 아니었단 말인가?

놈들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는 입술을 비틀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양손을 번쩍 들어 전방에 겨누었다.

“알아 뭐 하려고. 뒤질 건데.”

파바바박!

사방팔방, 전방위를 향해 나선의 번개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뇌전의 섬광이 도처에서 터진다. 그때마다 허옇게 일렁거리던 반투명한 신형들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크하아악……!

―끄으으윽!!

미스트 엘프는 ‘안개화’라는 고유 방어스킬을 보유했다.

놈들의 테리토리인 ‘미혹의 안개’에서만 발동 가능한 특수스킬. 육체를 안개와 동화시켜 물리는 물론이고, 마법 피해조차 받지 않게 하는… 아주 그냥 X사기 스킬이다.

―끄아아아악!!

―카하악!!

하지만 지금.

라이트닝 헬릭스가 안개를 지질 때마다, 놈들은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뭐냐… 이건! 대체, 뭐냔 말이다!

이건 물론 라이트닝 헬릭스의 효과가 아니었다.

라이트닝 헬릭스는 분명 강력하지만, 일반적인 번개 속성 전격 마법일 뿐. 상대의 방어 스킬을 꿰뚫는 효과 따윈 없다.

[스킬 발동: 스펠 인챈트―아머 피어스]

[스킬 발동: 스펠 인챈트―스펠 피어스]

없으면 추가하면 그만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 던전 3차 붕괴에서 만난 것만 5번째다. 다른 순번에서 나온 것까지 합치면 수십 번째 상대한다.

아무렴. 대비가 없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끄허억…….”

푸확! 푸쉬익!

여기저기서 안개화가 풀리며 미스트 엘프의 신형이 드러난다.

놈들은 시커멓게 탄 숯덩이가 된 채, 바닥에 하나씩 엎어져 갔다.

“짜릿하지. 응?”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뇌까렸다.

안개와 동화되었다 함은 곧 안개 전체가 적이라는 뜻.

다시 말해 공격만 통하면, 어딜 지져도 대미지를 입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조준을 안 해도 되니, 나야 땡큐지.”

정용몬의 백만 볼트나 배 터지게 먹고 가라.

파지지직! 양손에서 미친 듯이 나선 전류를 방전하기 시작했다.

―크욱……!

―이, 이놈!

슈르륵. 쿠르륵.

아직 살아 있는 미스트 엘프들이 안개화를 풀고, 다시 실체를 드러냈다.

하나같이 번갯불에 잔뜩 그슬린 모습이다.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비틀거리는 이들도 다수 보인다.

“어떻게… 어, 어떻게.”

“뜨, 뜨겁다. 있을 수 없다… 이런, 일은……!”

놈들은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있을 수 없다!’ 이딴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다.

이미 지나간 일에 집착이 심하다. 뭇 여성들에게 인기가 없을 법한 모습이다.

“또 숨어보지. 왜.”

나는 대놓고 비아냥대며 놈들을 도발했다.

파지직! 까딱대는 손끝에 스파크가 번득인다. 놈들은 그것만으로도 파블로프의 개새끼들마냥 몸을 움찔댔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상태를 뒤늦게 깨닫고, 굴욕에 찬 표정을 지었다.

“고작 기술 하나, 봉쇄한 정도로…….”

“우쭐대지 마라……!”

파팟!

이번엔 놈들이 육탄 돌격을 감행해왔다.

“후우웃!”

“하아아앗!!”

안개화는 못 쓴다고 하나, 놈들은 여전히 귀신처럼 신속했다.

하물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이다. 깜빡이는 허연 신형이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속속들이 들이닥쳤다.

“흐.”

이번에도 짧게 웃었다.

지금껏 놀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올렸고, 있는 힘껏 휘둘렀다.

“그래주면야.”

거듭 말하지만. 애초에 내 전공은 마법전이 아니다.

스피드를 위시한 육탄전이지.

“더 땡큐지.”

촤르르륵! 사복검이 늘어나며 손끝의 궤도를 따라 휘둘린다.

안개가 붉은 궤적에 따라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크하악!”

“아아아악!!”

채채챙! 채앵!

놈들의 쌍검은 막힌다. 그리고 허연 살갗이 무참히 파헤쳐진다.

비명. 그리고 금속음. 사복검의 지휘에 따라, 놈들은 안개 속에서 처절하게 합창했다.

“끄아아아악!!”

절규의 합창은 절정에 이르렀다가, 점점 줄어들다가. 얼마 못가 끝나버렸다.

생존한 합창 단원이 하나도 없어져서 그렇다.

* * *

해안가 일대에 넓게 퍼진 안개를 한참 헤맸다.

소대, 혹은 중대, 크게는 대대급까지. 여기저기 군집한 미스트 엘프들을 닥치는 대로 처죽이고 다녔다.

그리고 빠짐없이 물어봤다.

“너희들 보스. 대체 어디로 갔냐. 너희도 모르냐?”

―무, 무슨 헛소리를……!

“모르면 뒤져.”

―끄, 으허어억!!

이 개놈의 새끼는 어딜 이렇게 싸돌아다니는지.

미스트 엘프를 거의 천 마리 가까이 학살할 동안, 던전 마스터가 좀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반쯤 뜯어 먹힌 사람의 시체들만 수십 구씩 쌓여있을 뿐이다.

“…드디어 찾았다.”

그렇게 얼마나 수색을 진행했을까.

나는 전방에서 일렁거리는 신형에게, 징글징글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도망 좀 그만 다녀라. 던전 마스터.”

그것은 확연히 외형이 다른 미스트 엘프였다.

잡몹들보다 키가 머리통 하나 만큼은 더 컸고. 체격도 건장했으며, 귀와 머리칼이 유난히 길었다.

―…….

놈도 입을 닫은 채, 안개 너머에서 나를 빤히 쳐다본다.

푹 뒤집어쓴 새하얀 로브 아래. 다른 미스트 엘프보다 한층 강렬하게 빛나는 짙푸른 안광.

폐부를 얼리는 듯이 섬뜩하다.

‘상태창 확인.’

거의 100% 확실했지만, 일단 형식상 확인은 해봤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고 하니까.

[몬스터 정보]

[명칭: 로드 바실라스]

[체력: 95 마력: 84]

[힘: 31 민첩: 49 지능: 48]

[상세: 제45던전 ‘안개 낙원’의 던전 마스터. 모든 미스트 엘프의 우두머리. 지나친 망향으로 광인이 되어, 자신의 군세와 함께 영원히 안개 속을 떠돈다.]

확인은 끝났다.

철커덕! 놈의 면상에 사복검을 겨누었다.

“죽이러 왔다. 로드 바실라스.”

일방적으로 통보했고.

파자작! 일언반구도 없이 라이트닝 헬릭스를 발동했다.

“죽어.”

콰지지직!

섬광이 안개 속을 순식간에 치달린다. 허옇게 일렁거리는 바실라스의 신형을 지졌다.

육안상으론 분명히 적중한 것으로 보였다.

“쯧.”

하지만 나는 혀를 낮게 찼다.

투학! 나는 곧장 지면을 박차고 하늘로 솟구쳤다.

―후우……!

귓가를 간질이는 서늘한 숨소리.

쇄애액! 내 잔상을 향해 쌍검이 순식간에 찔러 들어온다. 두 번의 참격이 아슬아슬하게 발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

슈르륵. 바실라스의 신형이 코앞에서 드러났다.

순식간에 지나간 찰나의 공방 속. 놈은 입 한 번을 뻥긋하지 않았다.

몇 번째 회차에서든 항상 그랬듯이.

―…스으.

그저 스르릉. 안개 속에서 다시 쌍검을 들어올린다.

마치 춤을 추는 듯, 유려하면서도 기괴한 준비 동작이 눈에 띈다. 날카롭게 정제된 살기가 동작 하나하나에서 느껴진다.

―…후우우.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곧 바실라스는 길게 숨을 한 번 내뱉었고. 형체가 안개 속으로 완전히 좀먹어 들어갔다.

나는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사복검을 장검 형태로 합치고 상체를 조금 낮췄다.

“후웃……!”

채앵! 채채챙!

직후에 왼쪽, 오른쪽, 그리고 후방까지. 세 방향에서 거의 동시에 쌍검의 참격이 날아왔다.

눈이 아닌 감각에 의지해 사복검을 휘둘렀고. 셋 다 무난하게 막아냈다.

―……!

순간적으로 드러난 바실라스의 얼굴에 당황이 스친다.

나름 회심의 일격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손 몇 번 휘두르는 걸로 간단히 막혀버리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후우우……!

바실라스가 재차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그러자 다시 한번 물속에 잠기듯, 안개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로드 바실라스의 고유 스킬인 <안개 잠영>.

저건 잡졸들의 안개화와는 결이 약간 다르다. 그래서 아까처럼 라이트닝 헬릭스로 안개를 지지는 전략은 먹히지 않는다.

‘그러면 나도, 생각이 있다.’

스르륵. 나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사복검을 거칠게 내리쳤다.

―후우우……!

“스으읍……!”

채앵! 챙! 채채챙!

찰나의 순간에 수없이 터지는 금속음. 내 주위로 무수한 섬광이 불꽃놀이처럼 피어났다.

쌍검과 사복검이 맞부딪치며 발생한 불꽃이었다.

‘이건…….’

수 초에 이르는 짧은 시간. 수백 합을 나눴다.

나는 놈의 공세가 느슨해지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길 잠시. 곧 이유를 깨닫고 바싹 굳었다.

전생에서 몇 번이나 당했던 패턴이 불현듯 떠오른다.

‘위험하다.’

나는 황급히 백 스텝을 밟았고.

쿠르르르! 안개 너머에서, 새하얀 사슬 다발이 쏟아져왔다.

‘역시.’

예상대로의 진행.

전생에서 수없이 겪어봤던 전개였다.

‘바실라스의 안개……!’

저건 피할 수 없다.

내 속도가 느려서가 아니고, 그냥 시스템적으로 무조건 피할 수가 없다. 확정 CC 스킬인 <글레이프니르>와 비슷한 메커니즘의 아이템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스킬 발동.’

콰드득!

하얀 사슬이 내 온몸을 단단히 감싼 직후. 아니, 거의 동시였다.

나는 득달같이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발동: 디스펠(dispel)]

채채채챙!

청명한 소리가 잇달아 울리며 안개의 사슬이 산산조각 났다.

그러면 이젠, 반격의 시간이다.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애초에 생각조차 하지 마라. 그러면 반응이 늦는다.

수십 번의 반복에 따른 조건 반사. 그저 본능에 각인된 프레이즈 따라,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킬 발동: 스파이럴 블러드]

콰드드득!

주먹을 중심으로 맹렬히 모여드는 혈류의 나선.

나는 순식간에 몸을 반 바퀴 돌렸고. 그 회전력을 그대로 실어, 주먹을 내질렀다.

―아아.

바실라스가 눈앞에 있다.

배후로 습격해오던 바실라스의 얼빠진 표정이 보인다.

놈의 안개처럼 희미한 얼굴이 번쩍, 새빨간 핏빛에 파묻혔다.

―커헉……!

놈의 단말마가 도중에 끊어진다.

콰콰콰쾅!! 혈류의 폭발음이 우악스럽게 놈을 집어삼킨다.

[제45던전 ‘안개낙원’의 던전 마스터, ‘로드 바실라스’가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그렇게 이번 3차 붕괴는 종말을 고했다.

스스스스. 허공의 거대한 균열은 빠르게 아물었고. 그에 따라 자욱하던 안개가 순식간에 물러가며 시야가 밝아진다.

“으… 아아. 아, 안개가……!”

“걷혀버렸다. 우리를 숨겨주던, 안개의 장막이…….”

“아아. 나의 주군, 우리의 위대한 바실라스께서…….”

잔당 처리는 간단했다.

안개가 없는 상태에서 미스트 엘프는 전투력이 급감한다. 애초에 섬길 주인을 잃은 시점에서, 놈들은 더 이상 한 톨의 전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끄억……!”

“커헉!!”

푸직, 푸화악!

그저 무기질적으로 하나씩. 저항하지 않는 몬스터들의 목을 자른다.

처형. 처형. 그리고 또 처형의 연속이다.

[게이트가 힘을 잃고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식됩니다.]

그렇게 완전히 안개가 걷혀진 뒤.

원래대로 돌아온 시야에 들어온 건.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을씨년스러운 밤바다. 그리고 도처에 시신이 널브러진 모래사장이었다.

내 품에 안겨있던 이브가 눈살을 바짝 찌푸렸다.

“으엑. 아빠아, 냄새 나. 지독하다!”

“…그렇구나.”

“뭔 냄새야, 이거? 머리 아파! 어질어질해.”

“피 냄새에… 바다 냄새가 섞여서 그런 거 같은데.”

이번 피해는 해안가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여수시 전역에 이르는 엄청나게 방대한 지역이 안개에 잠식되었고. 미스트 엘프의 무참한 유린으로 쑥대밭이 됐다.

‘운이 좀 안 좋았어.’

바실라스를 찾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그러다 보니 놈이 내뿜는 던전 테리토리… 안개가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그만큼 미스트 엘프도 방대한 지역을 헤집어 놓은 것이다.

[최근 2시간 내 사멸한 생명 반응: 20,635 개체]

현자의 눈에 따르면. 이번엔 2만 정도가 폐사했다고 한다.

적당히 많이 뒤졌네.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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