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9)>
푸화악!
나는 신전의 대포가 일직선으로 뚫어놓은 경로를 그대로 따라갔다. 그리고 천경의 두터운 살점을 파헤치고 밖으로 탈출했다.
“하아.”
오랜만에 맡는 바깥 공기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늘에선 천경의 걸쭉한 피가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고, 천경의 본체는, 힘없이 바닥에 추락하는 중이었다.
[게이트가 힘을 잃고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식됩니다.]
동시에 패널이 불쑥 솟아났다.
천경은 확실히 사망했다. 그래서 게이트가 폐쇄된다는 고지다.
“후우.”
무사히 임무를 마쳤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다.
동시에, 쿠과아앙! 천경의 육중한 거체가 지면에 그대로 처박혔다.
거대한 땅울림. 가공할 충격파에 휘말린 건물과 사람들이, 수수깡처럼 박살 나 흩어진다.
“꺄아아아아악!!”
“으아아아! 사, 살려… 살려줘어어!!”
추락한 천경의 일대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됐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광경이다. 듣기 싫은 소음을 피하기 위해, 나는 곧장 몸을 돌렸다.
‘퇴근하자.’
푸쉬익!
이세라의 주점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2차 붕괴라 아직 헌터협회도 건재하다. 저 정도 피해쯤이야 헌터협회 사후관리팀이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다.
‘아 몰라.’
아무튼 난 이제 모르는 일이다.
헌터협회. 해 줘.
* * *
잠깐의 휴식 끝에 곧장 일반인들을 스캔하는 업무를 착수했다.
지쳐 곯아떨어질 때까지 반복한 뒤, 그 다음 날도 그 생노가다를 반복했다.
‘현자의 눈… 현자의 눈. 현자의 눈…….’
수확은 놀라울 정도로 없었다. 그냥 헛고생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것밖에 방도가 없다는 게 한탄스럽다.
“…쓰읍.”
시간은 하릴없이 다음 날이 되었다.
12월 2일. 3차 붕괴가 약속된 날이다.
“여기요. 이 주소로 가 보세요. 아마 3시간 20분 정도 뒤일 거예요.”
이세라는 그 날 해 질 녘쯤이 돼서야 예언을 했고. 내게 꾸깃한 종이쪼가리 하나를 내밀며 그렇게 말했다.
종이엔 알아먹기 힘든 약도와 함께 주소가 쓰여 있었다.
“…여수?”
그리고 주소를 본 나는 눈을 의심해야 했다.
쪽지와 이세라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세라는 태연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얼떨떨한 목소리를 냈다.
“이거 그 여수냐. 여수밤바다?”
“네. 그거 맞을 걸요? 전라도 쪽 관광지 있잖아요.”
“…허.”
“예지된 장면에서 간판이나 표지판 같은 걸 읽어냈어요. 아마 확실할 거예요.”
천안과 월미도. 그리고 해운대에 이어 또 다른 출장지의 등장이었다.
이번엔 우리나라 남쪽의 끝자락. 가지가지 한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유독 서울에서만 집중적으로 게이트 붕괴가 일어나는 이유.
나는 지금까지 ‘서울이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으니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던전은 열릴 때나 붕괴할 때나, 인간의 생체 마력과 마력 잔향이 집약된 곳에 발생하니까.
‘그게 아니었나?’
지금 그 가설에 약간 신빙성이 흔들리고 있다.
15번의 게이트 붕괴가 유독 서울에 집약된 이유. 어쩌면 그것도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뭐… 일단 알겠다.”
하지만 이 문제는 고민해봐야 실리도 없다. 어쩌다 알게 된다면 몰라도, 굳이 파헤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이세라에게 가볍게 인사만 남기고 곧장 주점을 떠났다.
“저기 아빠. 있잖아.”
푸쉬이익!
목적지까지 비행하는 와중. 문득 내게 업혀있던 이브가 말을 걸어왔다.
한층 성숙해진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다.
“어. 왜.”
“요즘 나랑 대화하는 시간이 많이 줄었네. 그치?”
“…그렇게 됐구나. 어쩌다 보니.”
“으응, 섭섭해. 나한테도 관심 좀 가져줘. 아빠!”
스르륵.
이브가 내 목에 팔을 깊숙이 둘렀다. 그리고 아양 떨 듯이 상체를 한껏 밀착해 왔다.
흠칫. 등 뒤로 전해지는 폭신함과 따스함.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노력해본다.”
“안 돼. 난 노력 말고 결과가 필요하다구.”
“그… 일단 좀 떨어지자.”
“으으응. 싫은데에? 더 붙을 건데에? 에잇. 에이잇!”
선언한 대로 대놓고 더 달라붙기 시작하는 이브.
꾸욱, 꾸욱. 그녀가 한계까지 밀착한다. 즐거운 듯한 숨소리와 웃음소리가, 귀와 목 뒤를 지척에서 간질였다.
“음.”
이브는 사춘기 시즌이 지나고 계속 이런 느낌이다. 쌀쌀맞은 겨울이 지나니 봄이 왔다고 해야 하나.
약간 봄이 너무 빡세게 온 것 같기도 하다. 꽃샘추위 X된다.
‘나를 가지고 노는군. 아주.’
옛날처럼 순수하게 잘 따르는 느낌은 또 아니다.
저것만 해도 일부러 저러는 거다. 지나치게 살갑게 대하면 내가 당황하는 걸 알아내더니, 그 뒤로 내가 당황하는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최대한 신경 쓰지 말자.’
미치겠는 건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는 거다.
장난에 어느 정도 응해주지 않으면 삐져버리는데. 혈천갑을 빌려야 하는 입장 상 삐지게 놔두면 그것도 아주 곤란하다.
그 중도의 길을 걷는 외줄타기가 좀 어려웠다.
“전속력으로 간다. 장난 그만하고 꽉 잡아.”
“으응. 안 그래도 꽉 붙들고 있어!”
“그럼 다행이고.”
푸화악!
타이밍을 봐서 속도를 최대한으로 올렸다.
도저히 이브가 장난칠 엄두도 안 날 정도의 초고속. 가히 음속에 가까운 속도였다.
“으꺄앗! 아, 아빠아! 너무 빨라아!”
“혀 깨문다. 입 닫고 꽉 잡아.”
“으우우!”
사람 놀려먹는 요망한 목소리를 봉쇄하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덕분에 여수까지 도착하는 데는 10분이면 충분했다.
“대충 이쯤이면 되겠지.”
털썩.
이세라가 지정해준 스팟 주변. 가장 높다란 빌딩의 옥상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새 날은 완전히 저물었고. 전방으론 그 유명한 노래 속의 ‘여수 밤바다’가 달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중이었다.
“와아. 이쁘다……!”
이브가 새빨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반짝이는 시선이 하얗게 부서지는 밤바다에 꽂혀 있었다.
그녀는 홀린 듯이 내려보다가, 이내 갸웃. 고개를 까딱거렸다.
“으음, 아빠.”
“왜 그러냐.”
“있잖아. 아빠는 여기, 전에 와본 적 있어?”
“없어. 한 번도.”
나는 영원회귀 전이나 후나, 여행 다닐 정도로 한가했던 적이 없다.
내 대답에 이브가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치? 그러면 나랑도 와본 적 없지?”
“그야 그렇겠지.”
“으음. 그치. 나도 분명 와본 적 없어. 근데… 으음, 뭐지? 왜일까?”
밤바다를 내려다보는 이브의 시선이 약간 혼탁해졌다. 미약한 혼란과 의문이 느껴진다.
중얼거리는 말들의 의미가 심히 궁금해진다.
“아까부터 무슨 말이냐.”
“나 있잖아. 왜 이렇게… 여기가 익숙하지?”
“…뭐?”
“으응, 익숙하다 해야 하나. 뭐랄까. 좀 그리운 듯한, 아련한 느낌? 아아, 데자뷔? 그렇게 말하던가?”
“…….”
이브가 횡설수설 낱말들을 늘어놓는다.
사고방식은 좀 지나치게 순진하지만, 어휘만은 외관에 가까워진 이브.
그런 이브가 직접 표현하길, 지금 그녀는 이곳에서 아련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나… 언제…….”
이브는 확신이 안 서는 말투로 중얼거린다.
나는 넋이 나간 채 이브의 옆모습을 주시했다.
“여기, 온 적 있던가……?”
왜인지는 모르겠다.
바로 옆에 있는 그녀가, 어째선지 아득하고 멀게 느껴졌다.
어딘가 홀려 있는 것 같던 이브는 곧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다시 장난을 걸어왔고. 나는 적당히 맞춰주며 놀아줬다.
“아빠. 가위바위보 하자.”
“…갑자기 웬.”
“으음, 그래. 지는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
“거절하면 어떻게 되냐.”
“아빠가 내 소원 들어주기!”
“그냥 소원 들어달라고 해라. 차라리.”
“들어줄 거야??”
“미쳤다고.”
실없는 짓거리로 시간을 죽이자니. 마침내 바닷가 쪽의 하늘이 굉음과 함께 찢어졌다.
웅장한 마력 파동에 이브가 시선을 들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왔다.”
거대하고 시커먼 균열 속.
1033번째 3차 붕괴의 주역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놈들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본 나는…….
“X발.”
참지 못하고 욕설을 발사했다.
내가 그러든 말든. 쉬쉬쉭! 게이트 균열을 빠져나온 몬스터들이, 일제히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스으으. 해안가 전역에 스산한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다.
“귀찮은 게 나왔구만.”
제33던전 <안개 낙원>.
전형적인 일반형 던전이다.
‘미혹의 안개’라는 광대한 안개 지대를 살포하고. ‘미스트 엘프’라는 인간형 몬스터들을 중심으로, 한 명의 우두머리 개체가 있다.
“뭐가 보여야 말이지. 이거…….”
벌써부터 안개로 꽉꽉 막힌 시야에 짜증이 울컥 일었다.
타타탓! 나는 이브를 업은 채 빌딩 벽을 미끄러져 내려왔고, 해안가로 질주하며 통한의 한숨을 흘렸다.
‘이러면… 속도를 제대로 못 내는데.’
전방 1미터는 고사하고 눈앞 30센티미터도 제대로 안 보인다.
시야 확보가 제대로 안 되니 방향 감각도 사라진다. 정면만 보고 달리다가도,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든다.
“던전 마스터는 어느 세월에 찾냐.”
기존 미스트 엘프들의 대략적인 포진은 머릿속에 전부 들어 있었다.
무려 1천 번이다. 2차 붕괴부터 14차 붕괴까지, 제1던전부터 99던전까지. 이 던전들을 모든 타이밍에 한 번씩은 경험해봤으니까.
‘근데 여수에선 겪어본 적이 없으니, 이거.’
단서는 전혀 없고. 이정표가 될 만한 건물도 없다.
해수욕장은 기본적으로 광활한 개활지다. 여기에 있는 거라곤 발등까지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뿐.
시야가 극한까지 차단된 상황에서 최악의 환경까지 겹쳤다.
“일단 정석대로 간다.”
게이트 붕괴 대처 매뉴얼. 정석 1순위.
일단 붕괴한 게이트와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가야 한다. 던전 마스터는 대개 게이트와 가까운 곳에 출몰하니까.
멈칫. 나는 쓸모없어진 눈 대신, 귀에 신경을 바짝 집중했다.
“꺄아아아악!!”
“끄아아악!!”
안개 너머. 찢어지는 비명소리들이 귀를 찔렀다.
스산하게 가라앉은 밤바다와 모래사장 일대. 무수한 비명소리가 안개 속을 메아리 쳤다.
목숨들이 뭉텅이로 으깨지는 소리였다.
‘이 부근부터 정리해야 하나.’
투학! 소리의 방향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비명의 발원지에 도착했다. 혼비백산 도망가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 뒤로, 판타지 소설의 전형적인 ‘엘프’들이 안개 속을 꿀렁거렸다.
―…아아?
―흐음?
놈들이 무자비한 살육을 멈추고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번득! 섬뜩한 청색 안광이 안개를 꿰뚫고 일렁거린다. 그 수가 최소 수백.
츠츠츠. 안광의 주인들이 내 주변으로 스멀스멀 모여들어, 순식간에 빽빽한 스크럼을 완성했다.
―이놈. 뭔가 다르군.
―그렇군. 옆의 하얀 계집도 마찬가지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놈들이 안개 너머에서 제들끼리 중얼거린다.
스스스. 포위망이 발소리도 없이 점점 조여들었다. 수많은 안광들이 유령처럼 움직여 나를 감싸고, 이내 신형이 선명해졌다.
―남자. 그리고 여자.
―네놈들은 뭐냐.
사방팔방. 어디로 눈을 돌려도 놈들의 서늘한 시선이 가득했다.
그새 완전히 포위당했다.
‘현자의 눈.’
우선 놈들의 스테이터스부터 재확인에 들어갔다.
변수가 많아진 지금 회차에선, 상태창 확인은 필수적인 작업이다.
[몬스터 정보]
[명칭: 미스트 엘프]
[체력: 58 마력: 66]
[힘: 21 민첩: 33 지능: 46]
[상세: 제45던전 ‘안개 낙원’의 레귤러 몬스터. 마력을 머금은 ‘미혹의 안개’ 안에서만 서식하는 박무의 정령. 성정은 잔혹하여, 안개를 헤매는 사냥감을 살육하길 즐긴다.]
꽤 강하다. 3차 붕괴인 점을 감안하면 잡몹치곤 강한 수준이다.
나는 놈들의 생김새를 빤히 주시했다.
“흐음.”
안개에 동화되듯 투명하게 일렁거리는 망토와, 눈처럼 새하얀 머리칼.
유령처럼 창백하고 반들거리는 피부. 그리고 엘프의 전형적인 특징인 길쭉한 귀. 양손에 일괄적으로 들고 있는, 길이가 다른 쌍곡도.
‘언제 봐도 재수 없게 생겼네.’
약간 특이한 생김새들을 제외하면. 외관은 그야말로 판타지소설의 엘프 그 자체였다.
참고로 내 기준 ‘재수 없는 외모’는 그냥 잘생긴 연놈이다.
―…….
“…….”
잠깐 동안 싸늘한 적막이 감돌았다.
당연하다. 내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이후로도 대답해줄 생각은 없다.
“긴 말은 필요 없고.”
대답 대신 이브와 눈을 맞췄다.
쿠르륵! 그녀가 곧장 내 가슴팍을 물어뜯었고. 솟아난 핏줄기가 나를 집어삼키며 붉은 갑주로 화했다.
미스트 엘프들이 그 괴현상에 흠칫, 한 발짝씩 물러섰다.
“너희들 보스. 어디 있냐.”
파지직!
한 손에 사복검. 한 손에 라이트닝 헬릭스를 장전했다.
그리고 서슬 퍼렇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