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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75화 (175/235)

175화

<103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9)>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전생에서 붙어본 경험까지 통틀어, 사실상 최초의 유의미한 반격이지 싶다.

“그흐흐?”

갑작스런 내 태세 변환에 광대가 당황한 듯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놈은 다시 한번 양손을 번쩍,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키하하하하핫!!”

쇄애액!

놈의 양손은 그대로 다시 낙하한다. 그 공격 궤도 끝에는 어김없이 내가 있었다.

나의 비행 경로와 놈의 공격 경로가 일점에서 맞붙는 그 순간.

‘제발. 베여라!’

어차피 모 아니면 도.

이번에도 공격이 안 통하면 자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벼랑 끝의 심경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광대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후웃……!”

푸화악!

화염으로 휩싸인 무형의 사복검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콰자작! 칼날이 선명한 불꽃의 흐름를 그렸고. 쇄도해 오던 광대의 거대한 손바닥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키하! 케하하하하학!!”

광대의 광소, 어쩌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토막 난 거대한 손가락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흩어지고. 그 절단면을 따라서 시뻘건 홍염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크, 흐으?”

나와 광대는 동시에 이변을 직감했다.

그 시작은 광대가 내뱉은 짤막한 의문의 탄성.

그리고…….

“끄아아아아악!!!”

광대의 입에서 튀어나온 순수한 고통의 비명.

즐거움의 쪼가리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괴로움의 결정체가 쏟아진다.

선명한 리액션에 불끈! 반사적으로 주먹을 틀어쥐었다.

“먹힌다……!”

공격이 유효타를 주고 있다.

지금의 나는 죽일 준비가 되었다. 광대를 죽일 조건을 달성한 것이다.

“끄아… 아. 아아아아!!”

광대가 그 거대한 몸을 한껏 둥글게 말았다.

잘려나간 손을 다른 손으로 쥐어 싸매고, 고통으로 신음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전이랑 달라. 대미지를 분명히 주고 있어.’

그것이 <살신의 무형검> 덕분인지, 아니면 고유 스킬 <멸망의 화염> 덕분인지는 모르겠다.

둘 다 사용할 수 있는 지금. 딱히 중요한 부분도 아니었다.

‘상태창은.’

슬쩍 상태창을 띄워 체력 상태를 확인해 봤다.

하지만 이내 실망했다. 놈의 상태창 수치는 여전히 물음표로 점철되어 있을 뿐. 정확한 현재 체력은 여전히 표기되지 않았다.

“뭐, 아무래도 좋아.”

아쉬움은 금방 접었다.

그리고 차킹! 손목을 흔들어, 합쳐졌던 사복검을 다시 채찍처럼 늘어뜨렸다.

씨익. 내 입가에 사나운 비웃음이 만연했다.

“뒤졌다고 복창이나 하자.”

놈의 남은 체력치 따위 알 게 뭐냐.

까짓 거 뒤지게 패다보면. 언젠가는 뒤지겠지.

“간다.”

파파파팍!

허공을 박찬다. 다섯 번.

순식간에 광대의 거대한 신형이 눈앞까지 치달았고. 나는 타이밍을 맞춰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쿠헥……!”

콰드드득!

선홍빛 화염이 반월 모양 참격을 그렸다.

광대의 면상에 쩌적, 한 줄기의 혈선이 그어지나 싶더니. 이내 양쪽으로 맥없이 쪼개져 각기 지면을 나뒹굴었다.

“키에에에엑!”

갈라진 머리통이 각자 처절한 비명을 쏟아내는 한편.

푸화악! 어김없이 잘린 단면을 따라 불꽃이 치솟는다. 광대의 머리통에서 시작한 멸망의 화염이, 일대의 폐허에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케헥! 케하아악!!”

버둥버둥.

목이 허전해진 광대의 몸뚱이가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린다.

제대로 타깃이 고정된 공격은 아니었지만, 필사적인 몸부림이 덩치와 맞물려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귀찮게 하지, 또.”

쉬쉭! 쇄애액!

연속적인 파공음이 전신을 상하좌우로 휩쓸고 지나갔다. 광대의 마구잡이로 휘둘린 팔뚝들이 내는 소리였다.

나는 가볍게 발밑의 혈류를 조정하는 것으로, 효율적으로 공격을 피해냈다.

“키아아아아악!!”

그리고 나를 지나친 팔뚝은, 콰쾅!!

어김없이 지면을 폭격했고. 일대를 더더욱 처참한 폐허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쩌적. 놈이 손바닥을 들어 올리자, 빈대떡이 된 시신 몇 구의 살점 쪼가리가 찐득하게 흩어진다.

“히, 히이…….”

“미, 미, 미친. 뭐야. 저, 저게… 대체, 뭐, 뭐야!”

“저딴 건, 본 적도 없어. X발. X발……!!”

한껏 날선 감각으로 지상의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하나같이 공포와 혼란에 휩싸인 말들. 나는 광대의 발악을 피해내는 와중에 그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려봤다.

시선이 한껏 가늘어졌다.

‘헌터들인가.’

복장과 무기로 단박에 파악했다.

아무래도 일대에서 체류하다가 긴급 소집 된 헌터들 같은데. 방금 전 납작하게 짓눌려 터져버린 자기 동료의 시신 쪼가리를 보며, 하나같이 주저앉거나 넋이 나가 있었다.

‘하급 헌터들이구나.’

마냥 두려움에 떠는 행색을 보고 그렇게 추측했고.

이내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부정했다.

‘꼭 그렇게 단정은 못 하겠네.’

체장 1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광대.

거대한 손톱은 한 번 휘둘릴 때마다 일대의 건물이 초토화되고. 심지어 지금은 잘린 목에서 피를 콸콸 쏟고 있어 비주얼까지 끔찍하다.

저건 고위 헌터든 하위 헌터든, 제정신 박힌 인간이라면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키야아아아악!!”

그 순간 광대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쿠르륵, 쿠륵! 놈의 토막 났던 머리통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뭐지.’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그 전조에 나는 숨을 낮게 삼켰다.

콰자작! 이내 광대의 잘렸던 머리통이 시간을 역행하듯 다시 맞붙었고. 허전했던 목 위로 거짓말 같이 안착했다.

푸쉬익! 절단면을 따라 타오르던 화염도, 점차 그 세기가 약해진다.

“…재생. 면역.”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듯한 초재생.

익숙한 장면의 현현에 나는 넋을 잃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간신히 깨달았다.

전생과 똑같다. 광대의 특수한 능력이 발동된 것이다.

“크… 후우. 으크크크흐!”

결국 깔끔하게 원상 복구 된 광대.

놈은 신음 같은 웃음을 간헐적으로 흘려댔고, 잠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번쩍. 온몸을 빳빳하게 펴며 머리를 치켜들었다.

“키… 하! 파하하하하!!”

하늘을 향해 광소를 쏟아내는 주저앉은 광대.

잠깐 그 거체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디룩. 놈의 눈알이 맹렬히 회전했다.

“그흐. 으흐흐흐…….”

흰자뿐인 섬뜩한 시선은 정확히 나를 향했다.

그리고 거기에 숨어있는 엄청난 분노까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파팟! 나는 허공을 박차고 하늘로 솟구쳤다.

“키야아아아악!!”

콰콰콰쾅!!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를 광대의 손톱이 지나간다. 가공할 풍압과 충격파가 그 뒤를 따라 허공을 마구 난도질했다.

나는 그 위세에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아까보다 흉포해졌다. 좀 많이.’

방금 일격만으로 그것이 체감되었다.

육체가 완전히 회복된 것에 더불어 극심한 분노까지 더해졌다. 그 덕에 공격은 아까보다 훨씬 빨라졌고, 흉흉한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대체 뭐지.’

상황이 그렇게 되자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반사 신경의 명령대로 광대의 공격을 회피하는 한편. 뇌리 한편에 떠오르는 의문을 증폭해 나갔다.

‘이제 죽일 수 있는 거 아니었냐고……!’

공격 대미지의 무효화. 그리고 신체의 초재생.

둘 중에서 전자는 분명히 막아냈다. 그 증거로 광대는 피격당할 때마다 극심한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하지만 후자인 초재생. 이건 어째선지 아직도 건재했다.

‘뭔가가… 잘못됐나?’

그리고 제일 큰 문제. 궁금증을 해결해 줄 토식이가 내 옆에 없다.

당신의 지식보따리 토식이, 무형검으로 대체되었다.

‘일단 이것저것 시험해 보자.’

저쪽이 저렇게 나온다면 나도 깡패가 되는 수밖에. 오랜만에 실험실을 재개장한다.

실험체는 주저앉은 광대. 실험 목표는, 놈의 정확한 살해법을 알아내는 것.

‘우선은 대미지 누킹부터.’

막대한 대미지를 한 번에 쑤셔 박아보겠다.

일거에 들어온 대미지가 초재생의 임계를 돌파한다면. 더 이상 재생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스킬 발동.”

푸화악!

내가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과 함께, 잠깐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직후에 키기긱, 키긱! 왼쪽 귀 옆에서 무언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갑작스런 이변이었지만 나는 딱히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스킬인가.’

이번에 얻은 새로운 부속품. <기어스 하트>의 기동음이다.

스킬을 발동함에 따라, 나는 그것의 작동 원리를 순식간에 모두 이해했다.

[스킬 발동: 피어 블러드]

키이잉!

붉게 물든 시야 앞으로, 새빨간 혈류가 모이기 시작했고. 이내 한계를 모르고 응축되고, 또 응축된다.

‘조금 더.’

쉬리리릭!

전방으로 밀고 들어오는 왼쪽 손바닥을 피하고. 위에서 내리치는 오른 손톱을 무형검으로 거칠게 쳐냈다.

신형이 이리저리 휘청이는 한편. 눈앞의 붉은 구체는 점점 더 커져갔다.

‘아직. 조금 더.’

지금 발동한 스킬, ‘피어 블러드’는 출력량을 내가 조절할 수 있다. 즉 생명력만 충분히 공급하면, 어디까지고 위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

어느 순간. 둥글게 뭉쳐진 순수한 혈액이,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대충 이 정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내가, 혈액 공급을 중단한 것이다.

나는 또 다른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발동: 멸망의 화염]

콰콰콰!

맹렬하게 한 점에서 꿈틀거리는 혈액 위. 석유에 불이 붙듯 멸망의 화염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이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고.

“발사.”

콰아아앙!

나의 사출 명령에 따라, 붉은 광선이 터져 나왔다.

방향은 주저앉은 광대의 미간. 그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순식간에 뻗어나간다.

“키… 히히힛!!”

광대는 덩치에 비해 움직임이 날랜 편이지만. 그래봤자 ‘덩치에 비해’다.

콰자자작! 광선은 그야말로 빛살처럼 쇄도했고, 놈의 미간을 사정없이 꿰뚫어 버렸다.

“키아아아아악!!”

어김없이 터지는 광대의 쩌렁쩌렁한 비명.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내줄 생각은 없다. 고작 머리통 좀 뚫은 정도로 끝나면, 소모한 체력에 비해 수지 타산이 안 맞지.

휘리릭! 나는 ‘기어스 하트’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끄아……! 캬하아아악!!”

콰작, 뿌드드득!

광선다발의 궤도를 순식간에 격변시켰다.

놈의 미간에서 인중, 목과 경추, 그리고 가슴과 배와 사타구니까지. 광선검처럼 광선을 휘둘러 일거에 갈라버렸다.

“끄… 오오오.……!”

일순간에 너덜너덜해진 광대의 육체.

휑하게 갈라진 육체에서 철퍽, 철퍼덕! 대량의 핏줄기가 장기와 함께 쏟아진다.

인간의 것을 심하게 닮은 장기는, 하나하나가 작은 주택만 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쓰읍.”

집채만 한 심장이 바닥에서 펄떡거리는 그로테스크에 숨을 삼키자니. 이내 시야가 완전히 새빨갛게 물들며 점차 탁해졌다.

스킬 사용의 후폭풍. 시야 차단 디버프가 발동된 것이다.

‘차라리 다행이군.’

아무리 나라도 약간은 비위가 상하는 광경이었으니까. 이대로 반응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금세 정상으로 돌아온 시야로 전방을 주시했고.

“역시 소용없나.”

눈앞에는 원상 복구 된 광대가 히죽대고 있다.

내 시야가 돌아온 것과 거의 동시였다. 디버프 지속 시간이 3초였으니, 고작 3초 만에 ‘반갈죽’의 치명상이 완치된 셈이다.

‘어쨌든 다행인 건…….’

이번에도 광대는 비명을 질렀다.

무형검을 쓰지 않았는데 대미지를 입혔다. 다시 말하면 ‘대미지 무효화’를 틀어막는 요소는 무형검이 아니라 멸망의 화염이었다는 뜻.

최소한 수확은 있었다. 그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다.

“그럼. 다음.”

대미지 누킹 작전은 실패했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 포기하지도 멈추지도 않는다. 곧장 다음 시험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할 뿐이다.

씨익. 입가엔 어느새 오기의 미소가 걸렸다.

‘어디 해보자고. 끝까지.’

네 기믹이 먼저 밝혀지나. 아니면 내가 먼저 지치나.

치킨 레이스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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