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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74화 (174/235)

174화

<103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8)>

저녁놀로 새빨갛게 물든 하늘.

그 하늘 위로 솟구치는, 노을보다 새빨간 선혈의 파도.

―키하하하하하핫!!

그리고 주저앉은 광대의 찢어지는 웃음소리.

“꺄아아아악!!”

“뭐, 뭐야! 괴물!! 괴, 괴물이다!!”

“몬스터다아아아!!”

사람들이 쏟아내는 비명소리. 혼비백산 도망가는 무수한 발소리.

모든 상황들이 오감을 자극하는 그 순간.

나는 광대 사냥의 시작을 실감했다.

“오.”

그리고 나는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갑자기 튀어나온 광대 때문이 아니다. 내 온몸을 둘러싼 혈천갑을 이제야 제대로 봤기 때문이었다.

나는 팔뚝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바뀌었군.”

탁한 붉은색에서 적갈색.

그리고 검정에 가까운 적색이었다가, 다시 빨간색으로 돌아왔다.

최초의 적색보다도 아득히 순수한 적색. 지금의 혈천갑은, 사람의 피에 한없이 가까운 색상이었다.

‘그 외에 바뀐 점은…….’

사실 외형보다 더 중요한 건, 진화하면서 추가된 요소.

즉 부가 옵션 쪽이다.

‘이번에도 뭔가 있나?’

최초엔 소형 방패와 전용 스킬.

그다음 진화 땐 외형만 살짝 변했고, 그다음 진화에선 날개형 아이템과 전용 스킬이 붙었다.

옵션이 추가됐을 확률은 대충 반반. 나는 기대를 담아 갑옷을 여기저기 더듬거리거나 직접 둘러봤고.

“오.”

이내 투구 옆쪽을 더듬거리던 손이 덜컥 멈췄다.

둥그스름한 뭔가가 만져진다. 전에 없던 이물감이 생겨 있었다.

[종말의 이브의 특수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 상세 정보를 확인하려면, ‘종말의 이브 특수 스킬 상세’를 영창하십시오.]

현자의 눈을 발동시키는 것보다 약간 빨리 패널이 튀어나왔다.

양반은 못 된다. 역시 귀 옆쪽에 달린 둥그런 무언가가 새로 추가된 부속품이었던 것 같다.

나는 순순히 시키는 대로 따랐다.

“종말의 이브. 특수 스킬 상세.”

삐빅.

언제나처럼 등장한 상태창. 나는 눈알을 굴려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스킬 정보]

[스킬명: 피어 블러드]

[타입: 즉발형/관통]

[효과: 혈액을 주입한 광선을 시선 방향으로 발사. 발동 후 3초간 시각 차단.]

[효력 범위: 시전자 기준, 전방 1km.]

[상세: 3차 개량된 혈천갑의 ‘기어스 하트’가 장착됐을 때만 사용 가능. 혈액을 순수한 빛의 형태로 응결하여 만물을 꿰뚫는 강력한 광선을 발사한다. 재사용 대기 시간은 30분이다.]

“눈에서 빔이냐.”

한 줄 평은 그것이었다.

효과 설명에 ‘3초간 시각 차단’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눈에서 광선 나가면 본인이 눈뽕 맞는 거야 당연하다 치고. 여기서 중요한 건 디버프를 동반한 스킬이라는 소리인데.

‘그걸 감수할 정도로, 강력한가?’

아직 안 써봐서 모르겠다.

아마 높은 확률로 이번 전투에서 알게 되겠지.

“…드가자.”

나는 고개를 마구 휘저어 상태창을 물려버렸고. 약속했던 대로 로즈 휴스턴의 안전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스킬 발동: 위상변이]

파지직! 스킬로 간이 아공간을 만들어 거기에 로즈 휴스턴을 집어넣었다. 이제 약 30분 정도는 그녀의 안전이 확보된다.

“이 스킬이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베어오겠다.

키잉! 사복검을 한껏 늘어뜨리며 지면을 힘껏 박찼다.

[스킬 발동: 블러드 스트림]

푸화악!

내 신형이 솟아오름과 동시에, 광대도 그 거대한 신형을 완전히 일으켰다.

어느 순간. 놈과 나의 눈높이가 일치한다.

―으흐흐……?

피눈물이 줄줄 흐르는 광대의 창백한 시선. 그 한가운데에 내가 포착되었다.

놈은 의문스러운 웃음소리를 잠깐 내나 싶더니.

―키하하하하학!!

콰과과과!!

전생에도 그랬듯, 눈앞의 날파리를 터뜨리기 위해 양손을 마구 휘둘렀다.

거대한 손바닥과 날카로운 손톱이 순식간에 양쪽에서 쇄도해 온다.

“안 되지.”

몸을 살짝씩 움직여 가뿐하게 공격 궤도를 이탈했다.

쉬이익! 손톱이 휘둘릴 때마다 거센 돌풍이 일어났고, 가공할 풍압이 온몸을 연신 할퀴고 지나간다.

‘이런.’

풍압에 버티지 못하고 신형이 점점 밀린다.

키기긱! 나는 블러드 스트림의 출력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그리고 바람을 정면으로 꿰뚫으며 놈을 향해 성큼 전진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나는 투구 안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공격 패턴은 이미 다 안다.’

전생에서 내 죽음을 담보로 빠삭하게 알아냈지.

그저 짓이겨진 다리로 느리적하게 기어다니며, 양손의 거대한 손톱을 닥치는 대로 휘두른다. 그걸 반복하는 게 광대의 전부였다.

“끄아아아악!!”

“꺄아악! 무, 무너진다!!”

다만 무식한 공격이 위력도 무식해서 문제다.

손톱이 가르고 지나가는 건물과 교량. 내리치는 손바닥과, 놈의 거체가 휩쓸고 지나가는 무수한 사람들까지.

순수한 폭력의 화신 앞에서 모두 속절없이 파괴되고 죽어나간다.

“끄욱……!”

“카하아아악!!”

단말마를 내지르는 놈들은 그나마 운이 좋다. 대부분은 본인의 죽음을 인식할 틈조차 없었다.

한순간에 온몸이 찢기고 짓눌려, 시뻘건 무기물이 되어나갈 뿐이었다.

‘역시… 장기전으로 가는 건 곤란해.’

벌써부터 피해가 후반 붕괴에 비견될 정도다.

아무리 이번 생의 수아가 이미 모든 설명을 들은 상태라곤 하지만. 그렇다고 희생자가 많아졌을 때 수아의 멘탈이 안 갈려나가는 건 아니다.

‘어쨌든 공격 패턴은 지극히 단순하다.’

후에 2페이즈가 있다면 또 모르겠다만.

일단 동등한 조건에서라면 나는 절대 저놈에게 지지 않는다. 아니, 질 수가 없다.

그래서 문제는 일대일 교전의 승리가 아니다.

‘교전 자체가 성립하질 못하니 문제지.’

전에는 내가 모종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유효타를 먹일 방법 자체가 없었다.

이번엔 그 경험을 살려서, 두 개의 ‘준비’를 해왔다.

“뭐 하나는 걸려주겠지.”

우선은 먼저 얻은 준비물 쪽부터 시험해 보겠다.

파지직! 나는 인벤토리를 열고, 그 안에 짱박아 놨던 ‘준비물’을 거칠게 꺼내들었다.

“아아. 야, X발. 살살! 신사적으로 좀 빼라, 좀!”

준비물… 토식이가 볼멘소리를 해왔다.

그러든 말든. 나는 인형 뽑기 기계 마냥 놈을 그대로 들어올려, 내 투구 코앞까지 가져왔다.

토식이의 새빨간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마주했다.

“토식아. 저거 보이냐.”

처척. 나는 손가락을 번쩍 들어 삿대질한다.

혈천갑의 투구를 쓰면 목소리가 자동적으로 변조되고, 강조된다. 그래서 확성기를 쓰지 않아도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음… 저거? 저거라니.”

당연히 토식이의 시선은 내 손가락을 따라갔고. 지금도 나를 향해 난동을 쏟아내는 주저앉은 광대를 눈에 담았다.

때마침 놈의 손톱이 내 코앞까지 쇄도해 있었다.

“이런.”

파파팟!

몸을 비틀어 광대의 손톱을 빗겨냈다.

정말 질리지도 않고 공격 일변도로 몰아치는군. 그런 생각에 혀를 차고 있자니.

“오오.”

문득 토식이의 입에서 옅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놈의 흥미 어린 시선이 광대에게 붙박여 있다.

“뭐야. 광대네? 생각보다 빨리 찾았다?”

“저놈은 이미 소재를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아하. 그런 거였나? 어쩐지 진도가 빠르다 싶었지.”

그제야 토식이는 납득한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중요한 용건은 지금부터다. 나는 한층 더 토식이를 내 면전으로 밀착했다.

“어쨌든… 저놈이 나왔다. 토식아.”

“어. 그래 보인다.”

“네가 준다던 검인지 뭔지. 빨리 내놔. 지금 급하다.”

“아아. 그거였구만.”

토식이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느긋한 행색으로 담배를 하나 빼어 물고. 불을 붙여 깊숙이 빨아들였다.

“암요. 줘야지. 이 상황에서까지 여유부리면 한 대 처맞을 거 같으니.”

여유부릴 수는 없는데 담배는 피워야겠냐? 이게 전 우주의 흡연자 평균 인성인가? 언행불일치의 극치다.

이젠 하다하다, 이세계 괴물 토끼한테 흡연자 혐오까지 생기려 들 때쯤.

“칼 가져와. 내밀어 봐라.”

토식이가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더니. 그것을 내 쪽으로 쑥 내밀었다.

나는 담배 끝을 가만히 주시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고?”

“그 갑옷에 달린 칼. 여기 갖다 대라고.”

“…칼을, 그 담배에……?”

“그래. 몇 번 말하냐. 급하다던 새낀 그새 뒤졌나?”

태도가 심히 띠꺼운데. 아쉬운 게 나니까 참는다.

나중에 기회만 와 봐라. 반드시 물 올리고 된장 풀어버릴라니까. 해묵은 다짐을 가슴 깊숙이 새기는 한편.

“…이러면 되냐.”

치지직!

나는 사복검을 담배 끝자락에 갖다 댔다.

박현우 때도 선례가 있었다. 놈의 담배빵엔 특별한 힘이 있다는 건 나도 이미 알아서, 크게 당황은 하지 않았다.

“그래. 바로 그거야.”

토식이가 입꼬리를 의미심장하게 말아 올렸고.

푸스스! 그의 신형이 담배 연기에 녹아들듯, 회백색 연기가 되어 칼날 주위를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갑작스러운 변화에 무심코 탄성을 흘렸지만. 정신을 차리는 것도 금방이었다.

이 변화의 방식이 생각보다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이브. 하트 기어.’

분명 어디서 봤다 했는데, 방금 생각났다.

종말의 이브가 혈천갑으로 변신하는 것. 그 과정을 붉은 피에서 잿빛의 연기로만 바꾼 모양새다.

‘토식이가 지금부터… 뭔가로 변하는 건가.’

나는 사복검을 둘러싼 회색 연기를 주시했다.

쿠르르륵! 칼날 주위를 맴돌던 연기들이 어느 순간 한계까지 압축되었고. 맹렬한 기류를 따라 회전하는가 싶더니.

[고유 아이템, <살신의 무형검>이 성공적으로 현현되었습니다.]

푸화악!

이내 폭발하듯이 사방으로 연기가 흩어져 버렸다.

서서히 연기가 흐려진 뒤. 남은 것은 ‘살신의 무형검’이 현현했다는 패널. 그리고 또…….

“…없어?”

그리고, 끝이었다.

나는 멍하니 오른 손목을 들어올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 달려있던 사복검이, 어느새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뭐야. 트릭 쇼야?”

이건 좀 많이 당황스럽다.

나는 황급히 오른손을 허공에 휘적여 봤다. 그러자 철그럭! 금속의 마찰음이 분명히 들려왔다.

흠칫.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오른 손목 위쪽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있구나.”

익숙한 묵직함은 지금도 느껴진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사복검 특유의 칼날끼리 마찰하는 소리도 분명히 들려왔다.

분명히 여기에 있는데. 다만 칼날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캬하하하하!!”

그 순간 광대의 웃음소리가 가까워졌음을 깨달았다.

잠깐 한눈파는 사이 거대한 신형이 지척에 있었다. 쇄애액! 광대의 거대한 손바닥이 신의 심판처럼 쏟아진다.

“키하아아아!!”

콰아아앙!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 지면에 내리꽂히는 거대한 팔뚝. 동시에 일대를 휩쓸어 버리는 장중한 폭음과 가공할 충격파.

수많은 생명과 인프라가 또 한 번 갈려나간다.

“…무형검.”

재차 광대와 거리를 벌린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시선은 여전히, 날카로운 무형의 기운만이 일렁거리는 오른 손목에 향해 있다.

삐빅. 나는 당연한 수순으로 상태창부터 띄워봤다.

[아이템 정보]

[명칭: 살신(殺神)의 무형검 (S급)]

[타입: 무기/특수]

[효과: 죽일 수 없는 것을 죽인다.]

[효력 범위: 유동적]

[상세: 제41던전의 던전 마스터 ‘심심한 에티’의 클리어 보상. ‘혈천갑’의 부속장비 ‘파산검’의 최종 진화 형태다. 형태가 없는 무기는 날카로운 의지의 현현이요, 불사의 낙인이 찍힌 존재조차 능히 참살한다.]

‘파산검(破山劍)’은 기본 사복검의 명칭이다.

그 최종 진화 형태가 바로 이것. 그리고 진화의 조건은 토식이… <귀머거리 토끼>를 수집해 그의 힘을 빌리는 것.

아무래도 토식이가 빌려주는 힘은, 이브의 혈천갑에 기생하는 형식인 듯하다.

“죽일 수 없는 것을… 죽인다고.”

상태창엔 허투루 볼 수 없는 구간이 있었다.

정확히 뭔 의미인지는 당연히 모르지만. 아무튼 ‘죽일 수 없는 존나게 큰 것’을 눈앞에 둔 나로선 아주 구미가 당기는 대목이다.

“아주 좋아.”

‘준비’가 속속들이 되어간다. 주저앉은 광대를 찢어 죽일 준비.

그런 좋은 예감이 등줄기를 치달렸다.

‘내친 김에 하나 더.’

스르릉!

손등 위로 기척만 어른거리는 무형의 사복검. 그것을 천천히 들어 올려 광대에게 겨누었다.

한껏 눈을 벼린 채, 검 끝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스킬 발동: 멸망의 화염]

육사도 ‘까마귀’의 사냥 보상.

비장의 두 번째 준비물을 꺼내든 것이다.

“오래 기다렸냐?”

푸화악!

형태 없는 칼날을 타고 진홍의 화염이 치솟았다.

타오르는 화염 덕에 칼날의 형상이 선명해진다. 나는 그것을 바닥에 길게 늘어뜨린 뒤, 철컹! 흐느적거리던 칼날들을 그러모아 장검의 형태로 합쳤다.

“…끝장을 보자.”

투학!

광대를 향해 순식간에 쇄도해 들어갔다.

반격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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