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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47화 (147/235)

147화

<101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3)>

에티의 ‘장난감 왕국’이 월미도에 붕괴되었다.

그러자 전생 때와 똑같은 수순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뭐, 뭐야!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우아아악! 사, 살려줘!!”

거대한 장난감 병정들이나 거대 로봇, 그리고 살아있는 동물 인형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 납치해 갔다.

―돌격! 돌격해라!

―박격포 3발 효력사! 빨리 움직여!!

―여왕님을 위하여!!

장난감 군세의 규모는 전생보다 훨씬 작았다.

당연한 수순이다. 당시엔 7차 붕괴였고 지금은 2차 붕괴니까.

이 던전의 경우 에티의 전체적인 무력이 곧 던전의 규모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만큼 휘하 군세도 비례해 줄어든 것이다.

‘그래도 뭐… 월미도 내부의 인파쯤은 금방 몰살당하겠지.’

그러니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이번에도 이브에게 광학미채 슈트를 입혔고, 전과 같은 방법으로 장난감 성에 잠입하기 시작했다.

“헤에. 이, 이쁘다…….”

이브는 나이를 좀 먹었음에도, 여전히 장난감 성의 늠름한 자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전처럼 사달라고 떼쓰면 곤란하다. 나는 곧장 마력을 쏟아부어 전속력으로 입성했다.

“으음? 얼라리? 아저씨는 뭐야?”

에티는 정확히 전과 같은 장소에 서있었다.

나 역시 전과 똑같은 장소에서 투명화 스킬을 풀었고. 그에 따른 에티의 반응 역시, 전과 소름 돋을 정도로 일치한다.

“침입자 소식은 못 들었는데? 이 장난감 놈들이 또 농땡이를 피웠나?!”

에티가 혼자서 팔다리를 동동 구른다.

그 반응마저 눈에 익다. 너무 익숙해서 하품이 다 나올 정도다.

치미는 지루함을 참아가며 에티의 정면으로 다가갔다.

“진짜 존나게 보고 싶었다, 던전 마스터.”

에티와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나는 그녀의 앞에 서서 가볍게 인사부터 날렸다.

“으으응?”

에티가 내 말에 의문스런 탄성을 흘렸다.

사라락, 그녀가 내 쪽으로 불쑥 고개를 디밀었다. 긴 청록빛 머리칼이 한껏 펄럭거렸다.

“보고 싶었다…라니. 아저씨, 나 알아?”

“좀 알지.”

“어떻게 알지? 우리 어디서 봤던가?”

“그런 게 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에티의 의문을 대놓고 묵살한다.

몇 번……. 몇십 번이나 반복한 대화를 또 하고 싶진 않다. 그래서 그냥 대화를 끊어버리고 내 할 말만 지껄였다.

주섬주섬, 곧장 이브가 입고 있던 광학미채 슈트를 벗기기 시작했다.

“우선은 여기부터 주목해라.”

치지직!

노이즈와 함께 이브를 감싸던 광학미채가 해제된다.

수아가 직접 땋아준 새하얀 머리칼. 피처럼 깊고 진한 붉은색 눈.

그리고 약간은 철 지난 캐주얼 옷차림의 이브가…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아?”

반응은 신속했다.

에티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떨린다. 온몸을 경련하고, 이빨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됐다.’

성공했다.

전생에서 에티가 이브의 ‘무언가’를 깨달았을 때의 반응. 완전히 똑같아서 못 알아보기가 더 힘들 정도다.

“으, 아. 으……!”

에티가 이브에게서 떨어지려는 양, 필사적으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전보다 반응이 약간 즉발적으로 나왔다. 이브의 외관이 성장한 것과 관련이 있을까? 잠깐 그런 의문이 스친다.

물론 태평한 의문은, 이어진 목소리로 박살났다.

“…귀머거리 토끼. 길을 잃은 까마귀. 목이 잘린 붉은 용.”

역시나.

에티가 여섯 문장… ‘육사도’들을 입에 담기 시작한다.

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녀의 말이 끝나길 얌전히 기다렸다.

“하트 여왕의 눈물. 주저앉은 광대. 그리고 마지막이, 죽어버린 왕의 옥좌…였지?”

퍼뜩!

에티는 얼굴을 확 쳐들고 부릅뜬 눈을 내게 향했다.

이제 그녀는 아마, 내게 물어보겠지.

“아저씨. 전에도… 나 본 적 있지? 엄청 많이.”

예상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질문이다.

전에는 머릿속이 하얘진 나머지, 저 말의 의미에 대해 제대로 추궁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살해 버리는 것까지 손가락 빨며 관망해 버렸다.

이번 생의 나는, 그런 미련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천라.”

파지지직!

스킬 발동. 손을 중심으로 눈부신 스파크가 자글거리기 시작한다.

얽히고설킨 번개가 거대한 그물을 이루는 그 순간.

‘아니. 아니다. 이건 아니야.’

나는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푸쉬익! 날카로운 섬광을 번득이던 그물이 순식간에 바스러졌다. 나는 아른거리는 마력광을 눈으로 좇으며 침음을 흘렸다.

‘괜히 변수 행동을 할 필요는… 없겠지.’

이 자살런의 목적을 떠올려라. 한정용.

애초에 이대로 에티를 자살시키는 게 목적이었잖아.

‘자살을 막아서 어쩌려고.’

분명 지금의 에티는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보이긴 한다.

하지만 그 정보 좀 얻겠다고 그녀를 강제로 구속시키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큰 행위였다.

‘천라의 지속 시간은 무한하지 않아.’

그리고 이 장난감 성에선 에티가 가히 유일신이다.

천라를 곱게 맞아준다는 보장도 없고. 맞아준다 해도 지속시간 끝나면 역관광이 확정이다.

섣불리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보였다.

“으응.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다행히 에티는 내 행동에 하등 관심도 없었다.

다만 약간 맛이 간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땅을 쳐다보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뿐이다.

‘저 다음은 분명…….’

이제 본격적으로 자살이 시작된다.

에티의 자살까지 남은 시간, 약 30초 남짓.

아니나 다를까. 에티는 자기 머리에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겨누었다.

“게임. 할 필요도 없었네? 나, 아무리 발악해도 질 수밖에 없잖아?”

후련함과 동시에 허탈한 표정을 짓는 에티.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딱히 놀랍진 않았다.

‘여기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에는 이 타이밍에, ‘잠깐!’ 하고 외쳐서 에티를 멈추려 했었다.

무슨 역전재판도 아니고.

‘씨알도 안 먹혔지.’

그러니 부질없는 행위를 반복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물어볼 뿐이다.

“던전 마스터. 육사도에 대해 알고 있냐.”

밑져야 본전이니 다짜고짜 내 의문을 디밀었다.

반응해 주면 좋고, 아니면 좀 아쉽지만 딱히 상관은 없다. 실패한다면 다음엔 또 다른 걸 물어볼 뿐이다.

딱 그 정도의 기대만 담은 질문이었다.

“…어?”

그런데 우뚝.

에티의 행동이 일순 멎었고. 그녀의 얼빠진 표정은 즉각 내게 향했다.

놀랍게도 성공이었다. 자살이 자발적으로 멈췄다.

“아저씨가… 육사도라는 말을, 어떻게 알지?”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양. 에티가 고개를 연신 모로 꼬았다.

시커멓게 빛이 죽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노려본다.

“아저씨. 그 말. 대체 누구한테 들었어?”

에티가 내게 물어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죽은 눈에 미약한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아니, 저걸 생기라고 부르는 건 어폐다. 생기보단 광기에 가까워 보였다.

“이상하다. 난 분명, 아저씨가… ‘초인’인 줄 알았는데.”

에티는 내 반응이 없자, 다시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초인. 그 익숙한 호칭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질문하려면 지금뿐인데.’

조바심이 턱 끝까지 찼다.

지금 에티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만큼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무저갱 같은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 육사도에 대해 아는 바를 말해봐라. 에티.”

“아닌데. 이건 아닌데.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

“…던전 마스터. 듣고 있냐.”

“아니야. 확실해. 이 아저씨는 초인이야. 하지만, 그렇다면… 그걸 벌써 알고 있을 리가 없는데. 이건 이상하잖아? 응. 이상해. 분명히 이상하다구.”

“…….”

안 되겠군. 이건 텄다.

이미 내 말이 전혀 들리지도 않는 듯하다.

지금 에티는 겉보기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냥 내용물까지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헤에.”

이내 히죽.

에티의 입꼬리가 천천히, 깊숙이 말려 올라갔다.

“재밌네. 이건 좀 재밌어. 아저씨는 초인이면서, 동시에 육사도인 거구나!”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시체처럼 미동도 없는 시선.

다만 입꼬리만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실실 웃는 모습은… 실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아저씨는… 좀 다르구나. 뭔가가 달라. 지금까지랑은 전혀 달라. 아하핫! 이건 가슴이 두근거리는걸?!”

스르륵.

축 처졌던 에티의 손이 다시금 관자놀이를 향한다.

직감했다. 잠깐 삐딱선을 탔던 루트가, 그새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

“덕분에 심심하진 않았어, 아저씨.”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유언.

타아앙! 어김없이 에티의 손가락 끝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왔고. 그녀의 목 위를 깔끔하게 도려냈다.

털썩. 작은 몸뚱이가 바닥에 널브러진다.

[제41던전 ‘장난감 왕국’의 던전 마스터, ‘심심한 에티’가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나는 에티의 시신을 무심하게 내려다봤다.

삐빅, 삐빅. 그 와중에도 패널은 연신 떠오른다.

[게이트가 힘을 잃고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식됩니다.]

1011번째 2차 붕괴가 순식간에 종식되었다.

장난감 성에 진입한 지 이제 한 10분은 지났나.

이 정도 속도면 아마, 제아무리 에티의 장난감 군대라도 월미도의 전원을 몰살시키진 못했을 테다.

“많이들 살아남겠네.”

하지만 어차피 곧 리셋될 회차지. 그러면 많이 살아도 아무 의미 없구나.

피식, 스스로 떠올린 모순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던전 마스터 ‘심심한 에티’ 사냥 보상을 획득합니다.]

[아이템 ‘토끼발’을 획득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보상 패널이 등장했다.

쉬리릭! 패널의 등장과 함께, 어느새 내 손엔 작고 하얀 털 뭉치 같은 것이 쥐어졌다.

약간은 익숙한 그립감이었다.

“…다시 얻었구만, 결국.”

지금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그 조그만 고깃덩어리. 나는 그것의 복슬거리는 털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전에 이거 얻었을 때. 무조건 이걸 계승했어야 됐는데.’

우선은 막심한 후회부터 밀려왔다.

한 번 얻었다가 사라진 아이템을 다시 얻어서 쥐고 있자니. 그때 계승품으로 ‘글레이프니르’를 선택했던 내 자신의 선택이 새삼 후회된 것이다.

‘당시의 나로선 나름 최적의 판단이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 어쩔 수 없다는 건 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후회해서 뭐 하냐.”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리면서도, 반쯤 습관적으로 블라이스의 단검을 들었다.

푸직! 단검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 목을 관통했다.

“아, 아빠……!”

옆에서 아찔한 탄성이 들려왔다.

이런. 이브가 아까부터 너무 조용해서, 옆에 있다는 것을 또 까먹어 버렸다.

최소한 이브가 안 보는 데서 자살했어야 했는데. 나의 불찰이다.

“이…브헉.”

이브. 미안하다.

눈 돌려라. 보지 마라.

“컥… 크륵……!”

대충 그런 말을 해주고 싶은데. 피가래가 끓어서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시선만 필사적으로 올려 이브를 향했다.

“아빠… 아빠……!”

이브는 내 옆으로 쪼그려 앉아 있었다.

양손을 허공에 허둥지둥 휘젓고 있다.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움직임. 당황과 공포. 그리고 무력감이 절절히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그녀의 눈에선 당연하다는 듯이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빠. 기, 기억… 나, 기억할게. 그러니까. 아빠, 아빠도.… 꼭!”

말이 지리멸렬해서 앞뒤가 잘려 있었다만. 이브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았다.

빠르게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입을 열심히 움직였다.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 * *

[1011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12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자살런 도중엔 이런 자잘한 시간도 아깝게 느껴질 정도다.

나는 빠르게 모든 과정들을 스킵해 나갔다.

[다음 회차로 계승할 유물을 선택하십시오.]

이건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지.

당연히 자살런의 목표 아이템인 ‘토끼발’을 선택했다.

[유물의 계승이 완료되었습니다.]

[초인 ‘한정용’의 선택에 의해, 시간선이 역변합니다.]

째깍째깍째깍.

정신이 나갈 정도로 크게 울리는 초침 소리. 그리고.

[현재 시간선: 2031년 11월 27일. 오후 2시.]

느지막하게 눈을 떴다.

토할 것처럼 익숙한 1012번째 11월 27일. 수없이 반복돼 왔던 오후 2시의 내 방을 한 눈에 담았다.

모든 것이 똑같다. 그것을 자각하자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치밀었지만.

“아빠!! 아빠, 정신이 들어?!”

눈 뜨기 전부터 들려오던 울 것 같은 목소리와, 소매를 강하게 잡아당기는 압력.

이브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역겨움을 단번에 중화시켰다.

“……아.”

참았던 숨을 일거에 토해냈다.

역겨움을 대신하듯. 막대한 안도감이 들어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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