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101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
‘목마르다.’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냉장고로 다가가, 냉수를 힘껏 들이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전처럼 꽤 오래 잔 것인가. 정해진 수순처럼 목이 굉장히 말랐기 때문이다.
“시간이…….”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니 11월 28일 오전 6시 언저리. 새벽이었다.
6시면 아직 동이 틀 시간은 아니다. 덕분에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과 알싸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후우.”
습관처럼 한숨을 쉬고, 물로 범벅된 입술을 대충 문질러 닦는다. 그리고 침대로 비척비척 돌아온 순간. 나도 모르게 덜컥, 침대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어둠 속에서 번득이는 붉은 시선이 보인 것이다.
“안녕. 아빠.”
붉은 안광의 주인… 이브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말을 거는 건 약간 예상 밖이다. 직전 회차만 해도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노려볼 뿐이었으니까.
나는 당황하면서도, 일단 순순히 화답하기로 했다.
“그래. 안녕.”
“잘 잤어?”
“그냥 그렇네.”
“이번엔 평소보다 좀 더 오래 버티더라? 꼴에 힘 좀 내셨나 봐?”
이브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물어왔다.
베르페아노와 심각한 대화가 좀 길어졌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혼자 개지랄을 하느라 더더욱 늦어졌단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좀.”
“뭐야. 또 그냥 좀이야?”
“…….”
“이번엔 다른 레퍼토리라도 준비했나 했더니. 실망이네? 하긴, 내가 아빠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했나?”
이브의 조리돌림 스킬이 나날이 발전한다.
특히 경멸과 측은함이 뒤섞인, 저 하등 생물 쳐다보는 표정과 시선이 압권이다.
‘허접~ X밥~’ 같은 대사가 심하게 어울릴 듯한, 업계 포상의 시선이랄까.
“아빠. 이번 생에는 빨리 올 거야?”
이브가 게슴츠레한 안광을 빛내며 물어왔다.
무시하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대로 다시 잠드는 척을 해버렸다.
그러자 전에도 그랬듯… 이브의 혼잣말이 계속 들려온다.
“이번에 아빠가 나갔을 때 말이야. 엄마가 계속 내 옆에 있었다?”
“……!”
“내가 펑펑 울고 있으니까, 나한테 막 아무 말이나 조잘조잘 떠들어 대더라구? 그러면서 안아주고 토닥여 줬어.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주제에. 흐흐.”
진득한 외로움과 씁쓸함이 느껴지는 넋두리다.
나는 결국 자는 척을 포기하고, 그녀의 말에 대꾸해 주기로 했다.
“…그러냐.”
“응. 친해지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자기도 불안해서, 누구라도 좋으니 대화를 하고 싶었던 걸까? 으음, 그것까진 잘 모르겠네.”
저번 생의 수아에겐 2차 붕괴 때 슬립 스킬을 안 썼다.
이브가 갑자기 꺼이꺼이 통곡하는 바람에,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까먹었다.
‘그 뒤로 그렇게 됐나.’
아마 수아는 우리 집에 계속 머물렀을 거다.
그렇다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수아가 이브와 불편한 동거를 계속하는 상황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전말을 털어놓았다.
“그거 내가 시켰다.”
“응? 뭐라고?”
“내가 시켰다고. 너 우는 것 좀 달래주라고 수아한테 부탁하고 갔다.”
“…헤. 그랬던 거구나. 어쩐지.”
이브가 그제야 납득했다는 양 탄성을 흘렸다.
어쨌든 이브가 방금 한 말에 따르면. 수아는 내 부탁을 최대한 들어주려 노력한 듯싶다.
한편으로 기특하고, 한편으론 씁쓸하다.
“지금은 있잖아. 나를 엄청 싫어하던 그 때의 엄마도… 이미, 없어져 버린 거지?”
이브가 내 씁쓸함의 원인을 시원하게 긁었다.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그러자 이브가 추궁하듯이 바로 물어왔다.
“다음에 만나면. 엄마는 다시 나를 처음 보는 상태로 돌아오는 거지? 응? 그런 거잖아?”
“…그렇겠지. 당연히.”
“으응. 그, 그렇구나. 그렇지……?”
이브의 목소리에서 짙은 안도감이 느껴졌다.
사뭇 색다른 반응이다. 전생까지는 똑같이 저 말을 해도, 엄청난 실망감과 공허함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잊어서 다행’이라는 반응이다. 이건 왜지?
“아빠. 아빠는, 엄마한테 그런 눈빛 받아본 적… 있어?”
그 순간 이브가 더듬더듬 물어왔다.
그런 눈빛. 뭘 말하는 건지는 단박에 짐작이 됐다.
수아가 이브에게 쏘아보내던 경계와 적대 어린 시선. 그걸 말하는 거겠지.
‘그런 거였군.’
그제야 이브가 안도한 이유를 깨달았다.
단단히 삐졌던 이브가 선뜻 말을 걸어온 이유도 파악됐다.
나는 어둠 속에서 쭈뼛거리는 이브 쪽을 쳐다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있다. 많지.”
“와. 그냥 있는 것도 아니고, 많아?”
“많아. 셀 수도 없을 만큼.”
“그럼, 음. 아빠는 엄마가 그렇게 쳐다볼 때마다… 기분이 어땠어?”
“당연히 거지발싸개 같다. 몇 번을 당해도 늘 새롭게 개같지.”
“푸흐!”
내 솔직담백한 발언에, 이브가 웃음을 터뜨렸다.
직후 황급히 입을 틀어막긴 했지만. 참지 못하고 조금씩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그렇게 이브가 제 혼자 끅끅거리길 잠시. 결국 그녀는 심각한 분위기를 포기해 버렸다.
“하아. 뭔가… 질질 짰던 내가 바보 같아졌어.”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이브가 날 빤히 쳐다봤다.
아까보다 약간 밝아진 방 안의 어스름이, 이브의 하얀 얼굴을 어렴풋이 비췄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
“왜.”
“아빠는… 아빠는 절대, 죽어도 나 잊어버리면 안 돼?”
“내가 너를 어떻게 잊겠냐.”
이브는 이미 영원회귀에서 너무 큰 축을 차지하고 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내가 신경 끄고 살고 싶어도, 세상이 신경 쓸 수밖에 없게 만든다.
“…진짜? 그 말, 정말이야? 믿어도 돼?”
불안과 공포에 찌든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뜩이나 엄마한테 계속 잊혀지는 것도 억울한데. 자기가 맹목적으로 좋아하던 엄마에게, 난생 처음으로 노골적인 적대를 받았다.
그게 이브에게 어지간히도 충격적이었나 보다.
“날 믿어라. 이브.”
그래서 단언했다.
지금 이브의 행색은 꽤나 익숙하다.
회귀 초창기. 내가 수아에게 전면적으로 부정당하면 놀랍도록 지금의 이브와 비슷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듣고 싶은 거겠지.’
이브가 지금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잘 안다.
나 때는 그 말을 들려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브에겐 적어도 내가 있다.
어둠 속에서 어깨를 잘게 떠는 이브를 보며, 나는 재차 힘 있게 말했다.
“나는 절대로 널 잊지 않는다. 네가 나를 잊지 않듯이.”
“…응. 그렇구나. 그, 그렇구나……!”
이브가 내 말을 음미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간이 잔뜩 찡그러졌고. 눈물이 붉은 눈망울로 순식간에 그렁그렁 차오르더니.
이내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흐흑. 으아아앙……!”
복잡한 심경이 담긴 오열이 흘러나왔다.
수많은 감정 중에서도 안도감이 가장 크게 느껴졌다.
“…….”
한동안 그냥 울게 내버려 뒀다.
우는 암컷 외계인 달래는 법은 모를뿐더러. 굳이 지금 내가 건드려서 좋아질 것 같지도 않다.
아니나 다를까. 곧 이브는 스스로 울음을 그쳤다.
“…아빠.”
한결 후련해진 기색으로 날 부르는 이브.
나도 그제야 봉인했던 입을 열었다.
“왜.”
“나, 졸려.”
긴장과 걱정이 풀리고 안도가 찾아오자, 뒤늦게 졸음이 밀려오는 듯하다.
나는 당연히 ‘침대 쓰게 너 좀 꺼져봐라’라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녀에게 턱짓했다.
“푹 자라. 난 잘 만큼 잤다.”
“어… 그, 아빠. 잠깐!”
그런데 덥석, 내 행동을 이브가 틀어막았다.
나는 침대에 몸을 반쯤 걸친 채 멈춰 섰고. 이브가 그런 내 소매를 힘껏 붙잡으며 고개를 격하게 휘저었다.
“아, 아냐. 비켜달란 소리가 아니었어.”
“그럼 뭐냐. 이브.”
“그… 여, 옆에서 같이 자도 돼?”
“…….”
그런 의미로 한 말이었군. 이해했다.
다만 굳이 나한테 허락을 맡는 저의는,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허락 없이도 잘만 자놓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그래라.”
“으, 으응. 이히히.”
이브가 배실거리며 꼬물꼬물 침대 위로 올라왔다.
스르륵. 고양이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이불을 파고드는 이브. 그녀가 한동안 꼼지락거리다가, 이내 내 쪽으로 몸을 한껏 밀착시켰다.
유난히 평소보다 거리가 가까운 것 같다. 기분 탓인가.
“아빠 등은 엄청 따듯했구나. 나 좀 더 가까이 붙어도 돼?”
“…상관은 없다만.”
이후 행색을 보니, 마냥 기분 탓은 아니지 싶다.
단숨에 호감도가 극락까지 떡상 한 모습이다.
‘반쯤은 노린 거였긴 했는데.’
내 예상 이상으로 이브의 반응이 뜨겁다.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들려줬던 내 말이, 완전히 치명타로 작용한 듯하다.
‘하긴.’
내 삶과 모든 행동이 잊힌다.
소중한 사람에게 근본부터 부정당한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어쩌면 죽을 때까지 평생. 그것이 반복된다.
‘무섭겠지. 아무렴.’
그걸 실감했을 때의 절망적 심정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비슷한 처지인 나한테 의존하고 싶을 법도 하다.
“하아. 이렇게 붙어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아빠!”
갑자기 이브가 추억에 젖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와 숨결이 목 뒤편을 선명하게 간질였다. 어지간히도 가까운 거리를 실감하며, 나는 재빨리 대꾸했다.
“옛날이라니. 언제 말이냐.”
“옛날엔 아빠가 나 막 안아주고, 비행기도 태워주고 그랬잖아!”
“…아. 그때.”
“뭐야. 벌써 기억 안 나는 거야? 씨이. 안 잊어버린다며!”
“아니. 기억나지.”
옛날 운운하길래 뭔 소린가 했더니. 자기 갓난쟁이 시절 얘기였다.
생후 3개월쯤 된 본인 딴에는 옛날 얘기긴 하지. 갓난아기 때 기억이 온전히 남아있는 게 신기하다면 신기하다.
“아빠. 더 붙어도 돼? 그… 옛날처럼.”
이브가 내 목 뒤로 속삭여 왔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나와 완전히 상체를 맞붙이고 있는 상태.
여기서 더 붙겠다는 건?
“…혈천갑으로 합체를 하겠다는 뜻이냐?”
“푸핫. 농담이야, 아빠! 합체는 무슨!”
“농담이었냐. 차라리 다행이다.”
이브와의 화해는 나도 바라던 바였다.
애초에 그녀가 없으면 던전 마스터 에티를 자살시킬 수 없다. 그 트리거가 ‘이브를 목격하는 것’이니까.
근데 이건 좀, 내 생각보다 심각하게(?) 화해한 느낌이 슬슬 든다.
‘갑자기 너무 살갑게 구는데. 이거.’
아무리 내 말에 감동받았다고 해도 그렇지. 이 정도면 고양이가 벼락 맞고 강아지로 변한 수준 아닌가.
이브의 외계 소녀 사고회로에서 뭘 잘못 건드려 버린 건가. 살짝 두려워진다.
“…피곤하면 빨리 자라, 이브.”
“으응. 알았어. 으히히.”
이브는 뭐가 좋은지 자꾸 실실 웃었고. 내 등에 얼굴을 푹 묻었다.
최소한 졸립다는 건 사실이었던 듯하다. 금세 그녀의 호흡이 규칙적으로 변해갔다.
“으웅. 아빠아.”
화해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잠꼬대에서까지 나를 찾는 이브.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약간의 불안을 느끼는 한편.
‘…나도 잠이나 자자.’
부족한 잠이나 보충하기로 했다.
날은 아직 심야처럼 어둡고. 나는 사시사철 피곤하며. 밀착된 외계인 소녀의 체온으로 등까지 따시다.
잠드는 데는 최적의 조건이기에, 나도 금방 잠들었다.
* * *
어영부영 하는 사이에 1차 붕괴일이 밝았다.
그리고 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붕괴를 저지해 냈다.
―키에에에……!!
“아가리.”
푸확! 퍼버버벅!
이제는 1분대 중반이란 기록이 자연스러워졌을 정도.
그야말로 순삭이었다.
“…고생했다, 이브.”
“으응, 이 정돈 가뿐하지!”
시간이 더욱 단축된 데에는 이브의 합류가 컸다.
새벽의 대화에서 내가 대체 뭘 건드린 건진 모르겠지만. 이브가 전에 없이 협조적으로 내 자살런을 도와주기 시작한 것이다.
혈천갑 없이 나 혼자라면, 아무리 용써도 1분대는 좀 무리다.
“아아. 힘드네에. 너무 열심히 일했어. 당 떨어진다, 당 떨어져~”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직후. 허리를 두들기며 ‘나 열심히 일했음’을 온몸으로 어필하는 이브가 있었다.
‘당 떨어진다는 말은… 또 어디서 배웠냐. 저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자연스럽게 아공간을 열어 딸기우유를 꺼냈고. 그것을 곧장 이브에게 던졌다.
덥석. 이브도 나만큼이나 자연스럽게 그것을 캐치했다.
“이히히. 역시 아빠야! 최고! 사랑해!”
이브는 배시시 웃으며 내게 손바닥 키스를 연신 날렸다.
전에 없이 노골적인 애정 표현이다. 저걸 순순히 받아줘야 할지 말아야할지 애매해서, 대충 손사래만 쳐줬다.
그 와중에 내 시선은 현관문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수아는… 역시 안 오나.’
수아에겐 이브와 붙어서 자던 현장을 그대로 들켰다.
그래서 이번 생의 수아는 내가 둘러대는 이브의 정체를 절대 믿지 않았다. 현행범으로 검거됐으니 당연한 말이긴 하다.
현재는 연락도 일체 무시하고, 옆집에 찾아가도 아예 대꾸도 안 해주는 상태였다.
“…심란하구만. 이래저래.”
“응? 왜. 아빠, 뭐 고민 있어? 나한테 상담해! 응? 응?”
“너. 지금 네가 제일 문제다, 이브.”
“으으응? 왜, 왜? 내가 뭐 어쨌다고?!”
따개비 마냥 들러붙는 이브를 어렵사리 떼어내며, 어영부영 시간이 지나간다.
그렇게 순식간에 이틀의 시간이 흘렀고.
2차 붕괴의 날이 도래했다.
“…….”
그리고 나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이브와 함께 월미도에 도착해 시간을 죽이다, 마침내 붕괴된 던전을 목도한 순간.
씨익, 내 입가에는 선명한 웃음이 걸렸다.
“드디어.”
나왔다.
고대하던 첫 번째 당첨의 등장.
던전 마스터 에티의 ‘장난감 왕국’이 눈앞에 출현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