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100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6)>
크로스 박사가 먼저 본심을 꺼낼 생각은 없어 보인다.
결국엔 내가 먼저 놈을 압박하기로 했다.
“내가 한번 맞춰볼까.”
흠칫, 크로스 박사는 어깨를 떨었고. 약간의 불안을 담아 나를 흘겨봤다.
나는 그 시선을 빤히 응시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너는 일종의 사이비 교단을 만들러 왔다. 이름은… 그래. 던전교. 대충 그 엇비슷하게 지을 거고.”
“……!!”
“기왕 만드는데 좀 성의 있게 짓지 그러냐. 던전교가 뭐냐, 새꺄. 던전교가.”
퍼뜩!
엄청난 속도로 고개를 쳐드는 애덤 크로스.
놈의 얼빠진 얼굴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어 간다.
“뭐… 야. 아니. 그, 그건. 어?”
횡설수설. 띄엄띄엄.
부릅뜬 눈으로 날 살피듯 쳐다보며. 한동안 의미 없는 감탄사만 반복한다.
그 입에서 유의미한 단어들이 만들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니, 대체… 어떻게. 아무한테도, 심지어 로즈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크로스 박사.”
“……!”
그리고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정신없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는 크로스 박사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해 있었다.
바로 지금. 단숨에 지면을 박차고 도약했다.
“엇?!”
애덤 크로스가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파각! 순식간에 파고든 나는, 놈의 손목을 후려쳐 권총을 떨궈버렸다.
“윽!!”
철그럭!
둔탁한 소리와 함께 권총이 바닥과 마찰했다.
크로스 박사는 아찔한 표정으로 그것을 응시했고. 나는 놈의 손목을 힘껏 틀어쥔 채, 야수처럼 사납게 웃었다.
“너한테 궁금한 게 남아있는 걸 감사히 생각해라. 크로스 박사.”
“…크으윽!!”
“나한테 인질극을 벌이다니. 10년… 아니. 500회차는 이르지.”
나는 놈을 코앞에서 직시했다.
크로스 박사의 떨리는 파란색 눈도, 나를 가만히 마주한다.
이내 크로스 박사가 온몸을 마구 비틀어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 이거 놔! 이 X발! 이익!!”
“그래. 중요한 건 앞으로 할 일 자체가 아니야. 내가 알고 싶은 건 목적이다.”
“목적이라니. 무슨……!”
“갑자기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까지 찾아와서. 사이비 교단을 창설하는 목적이 대체 뭐냐. 크로스 박사.”
나는 드디어 물었다.
이놈에게 이 간단한 질문을 하기까지, 생각보다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자됐다.
“그리고…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심지어는 한 회차 전부를 대가로 바쳤고. 나와 서윤이의 목숨까지 필요했다.
“앞으로 일어날 15차 게이트 붕괴에 대해서. 던전과 던전 마스터에 대해서……! 대체 뭘 더 알고 있는 거냐고.”
그래도 결국엔, 이 질문들을 내뱉는 데 성공했다.
꾸드득. 나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자연스레 크로스 박사의 저항도 격렬해졌다.
“끄아, 아아아아!! X발! 놔! 이거 놓으라고! 아아악! 내, 내 팔!!”
“너는 숨기는 게 하나도 없다고 했지. 이미 모든 걸 매스컴에 다 밝혔다고.”
“그, 그래! 진짜로 그러니까! 그게 뭐 어쨌다고!!”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을 거다. 분명히.”
나는 확신에 차 단언했다.
그러자 크로스 박사는 억울해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는 내가 다 불쌍해 보일 정도로 울먹였다.
“뭐, 뭔 개소리야! 무슨 근거로 그딴 말을!!”
“슈레더… 한국 헌터 협회는 너를 필사적으로 조사하는 중이었다. 네가 했던 말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별의별 개지랄을 다 하고 있었지.”
“……!!”
“그래서 네가 남몰래 한국에 온 것도 곧바로 알아챈 거다. 눈에 불 켜고 너만을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슈레더의 아카이브에서 크로스 박사를 검색했을 때. 패널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정보량을 떠올려 봤다.
크로스 박사. 넌 세계 3위 규모의 헌터 협회가 X으로 보이냐.
“그 집요한 놈들이 장장 1년 내내. 그렇게까지 조사했는데도 갈피를 못 잡았다고.”
놈들은 크로스 박사의 주장에 진심이었다. 그런데도 결국엔,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한 것이다.
“네가 아직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더 있는 거야. 분명히.”
나는 사뭇 차가운 어조로 그렇게 확신했다.
하지만 크로스 박사는 요지부동. 여전히 억울하다는 얼굴로 어버버 거리다, 이내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다.
“아, 아냐. 나는 정말로,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말했어! 대체 무슨 말을… 내가 뭘 숨기고 있다는 거냐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내게 소리를 질러댄다.
‘곧 죽어도 자기 입으론 밝히지 않으시겠다?’
그렇다면 좋다. 강제로라도 실토하게 해주겠다.
나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힌트를 던져주기 시작했다.
“귀머거리 토끼. 주저앉은 광대. 목 잘린 붉은 용…이었나?”
“……!”
“이거 외에도 세 개 더 있지. 총 여섯 개의 문장. 모른다고는 못 할 거다.”
“그, 그건.”
“그래. 바로 그거다. 그것들은 대체 뭘 의미하는 거냐. 네가 주장했던 종말론은…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고.”
‘귀머거리 토끼’를 필두로 ‘죽어버린 왕의 옥좌’까지.
총 여섯 개로 이루어진, 중2병 냄새 오지게 나는 문장들. 크로스 박사는 그것들을 본인의 주장에서 언급했다.
내가 어떤 확신을 담아서 노려보자, 놈은 한없이 주춤거렸다.
“…하.”
그런데 웬걸.
크로스 박사는 별안간, 허탈한 미소를 픽픽 흘렸다.
그러자 당황하는 건 내가 되었다.
‘뭐지?’
직전까진 분명히 궁지에 몰린 쥐새끼 몰골이었는데. 별안간 분위기가 격변했다.
비유를 계속하자면… 그래. 코너에 몰리다 못해, 이제 에라 모르겠다고 고양이에게 달려들 것만 같은 쥐새끼.
그런 느낌이 물씬 들기 시작한다.
“뭔 말을 하나 했더니. 그거 말이었냐?”
“그래. 그 문장들이 무얼 의미하는지… 우선은 그것부터 말해봐라.”
“네가 물어보려는 것도 결국 그거였냐? 한국 헌터 협회가 나와 로즈를 집요하게 쫓는 이유도… 내가 그 문장들의 의미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해서였겠군?”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다.”
“하. 하하… 하. X발.”
대체 뭐지. 저건 무슨 반응일까.
행색이 이해가 안 돼서 미간을 바짝 모은 나였고.
직후 크로스 박사가, 한껏 노기 어린 목소리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거 봐. 내가 뭐랬냐. 안 말한 게 있을 리가 없다니까. X발.”
“뭐라고?”
“그건 안 말한 게 아니야. 못 말한 거라고.”
“…못 말하다니. 그게 무슨.”
“아하. 정보 통제 때문에 내 발표를 제대로 못 들었댔나? 쉽게 말해서! 나도 모른다고!”
“…뭐?”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알고 싶다, 이 개새끼야!”
이건 전혀 예상 못한 반응이다.
아니. 예상하고 싶지 않았다는 게 옳겠다.
어안이 벙벙해진 내 앞에서, 오히려 크로스 박사가 나를 압박하듯 언성을 한껏 높였다.
“난 분명히 말했어. 내가 그것들을 직접 언급하긴 했지만! 그것들이 정확히 무얼 뜻하는지는 나도 아직 모른다고! 내 입으로 확실히 발표했다니까!”
“…….”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믿어라! 누구라도 좋으니까! 나 좀 제발 믿어달라고!! 좀!!”
피를 토할 것처럼 절규하는 애덤 크로스.
나도 뭐라 대꾸를 하고 싶다. 하다못해 닥치라고 다그치기라도 해야 할 텐데.
상상을 불허하는 허탈함이 몰려오는 바람에, 입을 여는 게 늦었다.
“…그러면.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 문장들은 어디서 주워듣게 된 거냐.”
“왜. 그건 알아서 뭐 하게. 너는 날 믿어줄 거냐?!”
애덤 크로스는 지친 미소를 띠며 날 빤히 쳐다봤다.
놈은 어깨를 으쓱이며 한껏 비아냥거렸다.
“하핫. 진짜 존나 고맙네! 약혼자인 로즈마저 못 믿던데. 눈물 나올 거 같다. 진심으로!”
“닥쳐. 닥치고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라. 크로스 박사.”
“어떻게 알게 됐냐고 물었지. 그래. 대답해 주지. 알려달라는데, 대답해 줘야지. 그럼.”
“…그래. 잘 생각했다.”
“좀 궁금하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길 듣고도… 끝까지 나를 믿을 수 있을까?”
클클클. 키키킥.
그의 입에서 자포자기의 웃음이 연신 새어 나온다.
언뜻 나를 비웃는 듯하고 동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입가의 조소는 차갑지만, 눈빛은 이글이글 뜨겁다.
“던전의 진실에 대해서. 그리고 그 문장들을, 어떻게 알게 됐냐면 말이야?”
나는 귀를 쫑긋 세운 채 온 신경을 집중했고.
이내 툭툭. 크로스 박사가 자기 관자놀이를 가볍게 두들겼다.
“별안간. 돌연.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내 머릿속에 속삭였거든.”
“…뭐?”
“그날은 별이 타오르듯이 빛나는 밤이었지. 여느 때처럼 로즈와 머리를 식히려고 밤하늘을 구경하는데. 갑자기, 그 개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어……!”
아득한 표정으로 회상에 빠진 크로스 박사.
나는 정신이 아찔해진 나머지 번쩍, 쫙 뻗은 손바닥을 치켜들었다.
“아니. 그… 잠깐.”
저건 연구원보다는 사이비 교주의 언행이다. 지금의 크로스 박사는 과학의 첨병이 아니라, 명백히 던전교 교주에 가까웠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가까스로 되물었다.
“…던전신께서 별빛으로 속삭이셨다. 그딴 헛소릴 하는 거냐?”
“속삭였어. 진짜로. 누군가가. 던전이 뭔지. 던전 마스터는 뭐 하는 놈들인지! 그리고 곧 끔찍한 재앙이 닥칠 거라고… 나한테 이 세상의 종말을 예견해 줬다고!”
“…….”
“네가 말한 여섯 개의 문장도 그 목소리가 들려준 거다. 정확한 의미는… 나도 전혀 몰라.”
사뭇 장절한 어조로 뇌까리는 애덤 크로스.
나는 황당한 나머지 입을 콱 다물었고.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지금 농담하는 거냐?”
“농담. 하, 그래. 농담! 역시 너도 못 믿는구만. 그렇지?”
“그야. 그딴 개소리를 하면 누구라도…….”
“X발 나도 알아! 그래서!! 그래서 이것만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어!!”
핏발선 눈을 부릅뜨며, 급작스럽게 괴성을 지르는 크로스 박사.
아무리 나라도 그 엄청난 기세엔 깜짝 놀랐다.
“…으음.”
그야말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나였고.
크로스 박사는, 오히려 그런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그렇군. 네가 옳았네! 네 말대로 숨긴 게 있었다. 그게 바로 이 부분이었지.”
“…허.”
“내가 또 카일 인더스트리의 연구원이잖냐! 다들 내가 던전의 뭔가를 연구해서, 그런 결론에 도달했을 거라고 알아서들 착각해 주더군. 뭔가를 연구해서 발견했다곤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는데! 하핫! 멍청한 새끼들!!”
“…….”
“그래. 분명 너도 그렇게 착각했을 테지! 안 그래?!”
찐득한 광기가 들어차 번득이는 시선.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하염없이 머리를 긁적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당연한 추측이니까.”
이내 변명처럼 꿍얼거렸다.
일단 놈의 말은 사실이다. 나만 해도 분명히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 말들이 더욱 황당하게 들리는 거다.
“아냐. 그럴 리가.”
애덤 크로스는 내 반응에 헤죽, 입꼬리를 말았다.
이내 실성한 듯이 고개를 붕붕 휘저으며, 염불 외듯이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현대의 알량한 과학으로 절대 설명할 수 없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무언가다. 나는 그걸 들은 당사자니까,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고!”
“크로스 박사. 일단 좀 진정을 해보고…….”
“진정?! 난 멀쩡해! X발!! 정말로, 미친 게 아니란 말이야!!”
놈은 한바탕 고성을 지른 뒤. 갑자기 허겁지겁 뒷걸음질 쳤다.
내 눈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듯이.
“아니야. 그래. 난, 아니라고……!”
크로스 박사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 숨 막히는 광기에는, 나조차 약간 주춤거렸다.
“아아. 그래. 증거라긴 좀 뭐 하지만.”
이내 크로스 박사의 발광이 돌연 우뚝 멈췄고.
디룩, 눈알이 돌아간다. 공포와 체념으로 떨리는 시선이 내게 번득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줄까? 날 믿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네.”
“뭐냐. 갑자기.”
“난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라, 한정용 씨.”
순간 헛숨을 삼켰고. 그대로 내뱉지 못했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방금. 뭐라고…….”
뭔 소리야. 한국어를 할 줄 몰라?
그럴 리가. 놈이 지금까지 영어를 지껄였다면,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 아니다.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 이름, 어떻게 알았냐.”
크로스 박사가 버젓이 내 이름을 불렀다.
말해준 적도 없고, 들었을 리가 없는데. 어째선지 놈은 내 이름을 알고 있었고. 지금 갑자기, 당연하다는 듯이 부른 것이다.
‘장수혁과 싸우는 장면을 훔쳐봤나?’
그렇게 생각하면 분명히 사리는 맞다.
하지만 그 가설은, 크로스 박사 본인이 직접 부정했다.
“놀랍지? 하핫. 그렇겠지. 나도 놀라우니까! 궁금하다! 그치?! 대체 왜 알고 있을까?!”
크로스 박사는 여전히 미친놈처럼 실실 쪼갰다.
입은 실성한 듯이 웃고 있는데. 시선은 갈 곳을 잃은 채, 두려움으로 벌벌 떨리고 있다.
“왜 네 이름을 내가 알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진짜로!”
“…그게 대체 무슨.”
“나는 분명히 평소처럼 영어를 하고 있을 뿐인데! 어째서 불어 되게 잘하시네요, 러시아어 아주 잘하시네요, 한국어 존나게 잘하시네요… 이딴 소리를 듣는 건지. 나도 X발! 도저히 모르겠다고! 이 개새끼야!!”
자동 번역.
던전의 지성체 몬스터들에게나 적용되던, 바로 그것.
“…이게, 대체.”
애덤 크로스는 어둠의 K팝 매니아가 아니었다.
던전의 지성체 몬스터에게만 적용되었던 자동 번역 마법. 그것이 어째선지, 평범한 인간인 그에게도 적용되었을 뿐.
“왜 교단을 만들려 하냐고? 그게 내가 말했던 여섯 개 문장들이랑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었던가? 한정용 헌터!”
이내 크로스 박사는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봤고. 황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신의 목소리를 엿들은 사제의 행색이다.
“아주 간단한 얘기야. 난 이 한국에서… 뭔가를 찾아내야 해. 그래서 그걸 위해 움직여 줄 집단이 필요했다.”
“…찾아내다니. 무엇을 말이냐.”
“내가 지금 한국에 온 이유도, 교단을 만들려 한 이유도. 결국엔 전부 한 점으로 귀결되지.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니… 전혀 모르겠다만.”
“그 목소리가 나한테 명령했다는 소리야!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하나 내렸지……!”
“아?”
목소리의 명령.
단 하나의 거부할 수 없는 명령.
그 말에서 느껴지는 숨 막히는 기시감. 나는 흠칫, 어깨를 격렬하게 떨었다.
‘저 말. 어디서 분명…….’
지나치게 익숙하다.
이것과 비슷한 얘기를, 나는 전생의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직후. 등줄기에 스산한 전율이 치달렸다.
“그 잡것이 내 안에 있었을 땐. 항상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브를 지나치게 닮은, 한 던전 마스터의 목소리.
그래.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귀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직접. 내게 끊임없이 속삭였지.”
진조 노스페라드.
그녀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했다. 이브를 체내에 가지게 된 순간부터, 끊임없이 목소리가 들렸다고.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명령이었다. 단 하나의… 아주 강렬한 명령.
그 목소리가 자기한테 명령을 내렸다.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명령.
‘이건……!’
여기서 뭔가가 또 이어졌다.
나 역시 크로스 박사에게 전염된 듯,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떨리는 입술을 뗐다.
“그 목소리가, 너한테 뭐라 말하든.”
노스페라드 때와 똑같은 질문이었다.
이번에도 전처럼, 누군가의 방해가 들어오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그러면 막아낸다. 이번에야말로.’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이번엔 반드시 진실을 쟁취해 내겠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크로스 박사의 행색에 집중했다.
“…옥좌를 찾아라.”
침묵 끝에 크로스 박사는 입을 열었다.
똑똑히 들었지만,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미간을 좁힌 채 되물었다.
“뭐라고?”
“광대야. 왕이 사라진 옥좌를 찾아가라. 그런 명령이었다고.”
그것이 크로스 박사가 받았다는 명령의 정체.
그는 그 후에도 무언가에 홀린 듯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래. 그 옥좌를 찾아 한국에 왔다. 그게 진실이야. 진짜라고.”
“…….”
“왜 하필 한국이냐고? 나도 몰라. 하지만… 알아. 그건, 옥좌는 여기에 있다. 그 목소리가, 내 감각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다고! 옥좌를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라고, 지금도 계속 아우성친단 말이야!”
“…지금도 말이냐.”
“그래! 지금도 계속! 방금까지만 해도, 계속, 계속, 계속……!”
그러던 어느 순간.
크로스 박사의 경련이 우뚝 멈췄다.
미친놈처럼 떠벌대던 입도, 거짓말처럼 멈췄다.
“아니. 분명히, 방금까지 그랬을 텐데. 어……?”
별안간 놈의 희번덕한 시선이 내 얼굴을 빤히 주시하더니.
히죽, 음울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었다.
“너를 만나고. 처음으로 조용해졌다?”